“되게 비싸 보인다.”
“이거 깨면 내 월급도 날아가.”
시시덕거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도 차례대로 내렸다. 박승기의 뒤를 따른 건 캠코더를 들고 넋이 나가 보이는 오하나였다.
“내가 왜 주말에 강원도까지 차출된 거지…….”
원흉은 디지털소통팀의 노 팀장이었다. 현규하가 인솔팀에 있다는 걸 알게 된 노 팀장은 조회 수 대박을 예감하고 그나마 그와 안면이 있는 오하나를 살살 꼬드겼다. 손 떨림이 없다는 능력의 소유자인 F급 각성자이기도 하니 적격이다.
던전 연수 브이로그를 빙자한 현규하 브이로그 촬영이라는 막중한 임무 속에서 어쨌든 그녀는 성실하게 촬영을 이어 갔다. 뷰파인더 속으로 최진혁을 비롯한 공무 헌터들과 각성자들이 줄지어 내리는 모습이 비쳤다. 부상자를 대비한 힐러 송찬영도 있었다.
오늘 인솔팀의 리더는 감마팀장 최진혁이었다. 등급과 랭킹이 제일 높은 사람은 물론 현규하였으나 그 누구도, 심지어 인유신마저도 그에게 리더십을 기대하지 않았다.
“애들처럼 모여 있지 말고 여기로 오십시오.”
자연스럽게 리더를 맡게 된 최진혁은 손짓해서 뒤쪽 버스에서 내린 각성자들까지 줄 세웠다.
“저기, 현규하 헌터님.”
각성자들 중의 하나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누군가 했더니 일전 침식 게이트에서 소란을 피웠던 남자였다. 남자는 몹시도 송구해하는 기색으로 허리를 숙였다.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저희를 지켜 주신 은혜도 모르고 제가 순간 정신이 나가서 이성을 잃었습니다.”
정작 사과를 받은 현규하는 시큰둥했다.
“네에, 네에. 억지로 사과 안 해도 마수들 사이에 내던질 일은 없을 테니까 들어가요.”
정말 그걸 염려했었는지 남자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줄로 돌아가 섰다. 인유신은 입술을 조금 모았다.
“규하 씨는 이유 없이 막 죽이고 그러는 사람 아닌데…….”
그러니 그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14년 전의 사건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현규하가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버스 뒤의 SUV들은 나르샤 길드 소속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 오랜만이네.”
안면이 있는 공무 헌터들과 인사를 나누는 길드원들 옆으로 승용차 한 대가 더 주차됐다. 그리고 곧 인유신은 오늘 나르샤 길드만 협조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 도착한 차에서 터덜터덜 나오는 사람은 오하나보다 더 멘탈이 나간 표정의 공태성이었다.
“앗, 길드장님이 직접 오셨네요?”
“길드장씩이나 되어서 이런 재미없는 임무에 왜 끼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놈 있으면 나르샤만 있어도 되긴 하겠네요.”
침식 게이트에 갇혀 있던 3일 동안 어느 정도 친해지기도 했고, 8세에게 케이지까지 선물해 준 사람이다. 하염없이 한숨만 푹푹 쉬는 해쓱한 안색을 보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공태성과 차에서 같이 내린 남자가 최진혁에게 먼저 인사하더니 곧 인유신과 현규하도 돌아보았다.
“인유신 님이시죠? 길드장님의 비서인 한준수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는 왜인지 부쩍 친근해하는 기색으로 인사했다. 거기에 용기를 얻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길드장님이 어디 편찮으세요?”
“아아, 그건 아니고요.”
쓴웃음을 지은 한준수가 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실은 주말에 아가씨와 호캉스를 가기로 하셨는데, 아가씨가 남친과 놀러 갈 거라면서 길드장님을 차셨거든요.”
“실례지만 따님의 나이가……?”
“5살.”
외동딸의 남친에게 밀린 공태성의 멘탈이 탈탈 털린 틈에 냅다 약정서에 서명을 받은 최진혁이 끼어들었다. 인유신은 탄식했다.
“확실히 충격받으실 만하네요…….”
“마침 잘됐지. 현규하는 캠핑 계획이 틀어져서 보나 마나 건성으로 사냥할 게 뻔한데, 콩이 있으면 편해. 불 지르는 건 대량 학살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이 둘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내일 다시 오기로 한 차들이 떠나자 최진혁은 확성기를 들고 어수선한 주변을 정리했다. 인유신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곧 게이트를 넘게 된다. 그 기척을 눈치챘는지 현규하가 시선을 내렸다.
“긴장돼요?”
“조금요.”
“앞으로 던전에서 데이트 많이 할 거니까 익숙해질 거예요.”
현규하가 엄지로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훑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지며 긴장감이 나른하게 이완되었다.
“먼저 이번 연수에서 도와주시게 된 나르샤 길드분들을 소개합니다. 공태성 길드장님은 다들 아시겠죠. 어쩌다 보니 S급 헌터가 둘이나 되는 역대급 호사스러운 연수를 하게 되셨군요. 괜히 어쭙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S급 헌터들이 태워 주는 최고급 프리미엄 버스에 얌전히 탑승하도록 하십시다.”
던전에 첫발을 딛기 직전이라 긴장한 각성자들은 최진혁의 무표정한 농담에 어색하게 웃었다.
“미리 알려 드렸다시피 게이트 내부의 환경은 한겨울입니다. 공장 안에 임시 탈의실을 만들어 놓았으니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세요.”
인유신도 겨울옷을 꺼냈다. 집에 있는 패딩이 짧은 것뿐이라는 걸 보게 된 현규하에게 붙잡혀서 쇼핑한 롱 패딩이다.
“8세야. 넌 괜찮겠어? 파우치 안에 핫팩 넣어 줄까?”
“찌익.”
“비정형 마수니까 추위를 타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이 맞는다는 것처럼 8세가 끄덕거렸다. 최상위 랭커답게 기온 변화에 내성이 있는 현규하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이었다.
초여름에 겨울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은 금세 땀을 뻘뻘 흘렸다.
“현규하, 준비해.”
“알았어요.”
최진혁의 눈짓에 현규하는 게이트 입구를 가린 결계에 마나 패턴을 주입했다. 풍경이 흔들리며 허공에 투명한 일그러짐이 드러났다. 인유신이 경험하는 세 번째 게이트였다.
인유신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 39시간 06분 57초]
“우와.”
현규하의 말대로 던전은 눈이 발목까지 쌓인 하얀 자작나무 숲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살이 따가운 여름의 초입이었는데, 발을 한 걸음 내디딘 순간 그는 해 으스름이 찾아온 한겨울의 숲에 서 있었다.
현규하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별이 뜬 한밤중만큼은 아니지만 해 질 녘도 캠핑하기 나쁘지 않죠?”
“자작나무 사이로 노을이 비치는 것도 진짜 예뻐요.”
“리셋까지 남은 시간도 넉넉해서 바로 던전 보스 잡고 편하게 캠핑할 수 있었는데 말이죠.”
하얗게 응결된 두 사람의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눈밭이다. 처음으로 흔적을 남기며 뽀드득뽀드득 노을빛에 물든 눈을 밟는 소리가 즐거웠다.
헌터들의 인솔하에 각성자들도 차례대로 던전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보는 던전의 풍경과 메시지를 신기해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별자리가 보이면 위치를 대충 때려 맞출 수 있는 건데, 크으. 아깝다.”
제일 신난 건 박승기였다. 바로 드론을 띄우며 주변을 탐색했다.
“근데 헌터님, 생각만큼 춥지는 않네요. 유럽일까요?”
“몇 세기쯤이에요?”
던전의 배경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박승기와 인유신뿐이었다. 다른 헌터들과 각성자들은 마수들이 출몰하지 않는 입구 근처에 전진 기지부터 설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배경에 관심이 있는 헌터라는 이유로도 별종 소리를 듣는 현규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유신 씨 보여 주기에는 좀 그래서 원래는 나 혼자 후딱 클리어하려고 했는데.”
“헉. 왜요?”
“환영에서 시체 구경만 엄청 하게 될 거라서요.”
안 그래도 겨울 날씨인데 툭 던지는 무심한 말에 조금 더 추워졌다. 역사의 흐름 속에 이미 지나간 환영일 뿐이라지만, 잔인한 광경을 목격하는 게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니까.
첫 번째 던전에서는 살육이 펼쳐지는 환영을 거리낌 없이 보게 했던 현규하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서, 인유신은 갈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행들이 머물 텐트와 간단한 방어 결계가 설치되었다. 최진혁이 다시 확성기를 들었다.
“시험에도 나온 내용이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아시겠지만, 리셋 시간이 종료된 던전은 말 그대로 내부가 ‘리셋’됩니다. 리셋되는 타이밍에 던전 내부에 머무르면 죽는 건 둘째 쳐도 시체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니 주의하십시오.”
리셋 시간이 되면 던전은 내부에 남은 인간과 마수의 흔적 등이 전부 사라지며 최초의 상태로 복구된다. 이 리셋이 반복됨에 따라 응축되는 마나 수치가 던전 브레이크 발생의 원인 중 하나다.
“또 던전에 존재하는 마수의 개체가 열 마리 이하로 떨어지면 각성자들에게 알림창이 뜰 겁니다.”
드론의 화면을 보면서 박승기가 속닥거렸다.
“각성자들은 좋겠다. 인유신, 너도 알림창 뜨지?”
“어, 신기하더라.”
“여러분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마수를 사냥하게 되더라도 수가 많이 줄었다 싶으면 적당한 선에서 중지하도록 하세요. 던전의 마수가 전부 제거되면 보스가 나타납니다. 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국영 던전에서 사전 협의 없이 보스를 출몰시키거나 사냥하여 던전을 닫게 되면,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나라에 뱉어 내야 한다는 겁니다. 세금만 뜯어 가는 나라에 벌금까지 내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공무원이 할 소리인지 모르겠다. 근처에 서서 촬영하던 오하나도 같은 생각인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부분은 꼭 편집해야겠네…….”
“대형급 이상의 던전을 단신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괴물들이 S급이고, 이 자리에는 S급이 두 분이나 계십니다. 이 던전은 초소형이니까 저쪽의 잘나신 분들이라면 뜨거운 물 부어 놓은 컵라면이 붇기 전에 클리어가 가능할 겁니다. 그렇죠, 길드장님?”
게이트에 진입하면서 조금 멘탈이 돌아온 공태성이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최진혁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다가, 편안하게 던전 관광이나 하다가 돌아가십시오.”
경험에서 기인한 듯한 당부를 마지막으로, 일행은 자작나무 숲을 지나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새가 날아가는 기척이나 짐승의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의 정적이 어수선하게 깨졌다.
“유신 씨도 가려고요?”
“클리어까지 경험하는 게 연수의 목적이니까 빠지면 안 될 거 같아요.”
“그래, 잘 생각했어. 돈 주고도 못 하는 경험이라니까.”
한마디를 툭 던진 박승기는 게이트에 갇혔던 3일 동안 교분을 쌓은 최진혁과 공태성에게 가서 또 뭐라고 말을 걸었다. 어디에 떨어트려 놓아도 생존할 거 같은 놈이었다.
덕분에 듣는 귀가 없어진 인유신은 현규하에게 조심스럽게 물을 수 있었다.
“아까 최 팀장님 얘기를 듣다가 생각난 건데요, 이 던전의 보스를 사냥한 뒤에 또 히든 보스가 나타나면 어쩌죠?”
“잡으면 되죠.”
“그야 그렇지만 규하 씨가 찾는다고 하셨던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 있었잖아요. 저번의 �¹Æ…….”
무심코 말을 잇던 인유신은 흠칫했다. 머릿속으로 ‘화요일의 성인, 스픈타 마르치’라는 생각을 하고 혓바닥 위에서 언어를 만들었는데, 입 밖으로 나간 순간 발음이 깨졌다.
당황한 인유신의 머리칼을 현규하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