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다시 오물거리기 시작하는 8세를 내려다보는 인유신의 시선엔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침식 게이트 내부에는 음식물들이 전부 맛이 제거되잖아요. 거기에서 살던 마수였으니까 다양한 맛을 즐기는 게 아닐까요?”
“일단 거기 마수들은 생명체가 아니라서 식사를 한다는 개념이 없긴 하지만, 뭐, 주인님 말이 맞겠죠.”
“거참,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기운을 차린 8세는 구내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을 때 접시에 덜어 준 냉면까지 호로록 먹음으로써 조상필의 눈을 빛나게 했다.
연구원의 훈련장은 얼마든지 써도 된다는 허가까지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친김에 김 과장에게 전화해서 전략능력연구원 방문은 외근으로 전부 처리하기로 한 현규하는 흡족해했다.
“남은 건 라이선스의 마지막 단계인 던전 연수뿐이군요. 이번 주였죠? 연수 때 쓸모 있기를 바라지도 않으니까 던전에서 기절만 안 했으면 좋겠네요.”
“찌익…….”
“에이, 명색이 게이트 출신인데 그 안에서는 쌩쌩하겠죠. 근데 규하 씨.”
“네.”
“연수가 1박 2일인데 그동안 규하 씨는 어떻게 해요? 게이트 안으로 전화 통화가 가능한 것도 아닌데…….”
헌터 라이선스 취득의 마지막 단계인 던전 연수는 합격자들이 자조적으로 던전 소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애초에 E급 이하의 각성자들에게 전투 능력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공무 헌터의 인솔하에 던전이 어떤 곳이라는 걸 배우는 일종의 체험 학습에 가까웠다.
연수 기간 동안 혼자 남게 될 현규하가 걱정되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시원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내 사유 던전에서 둘이서 데이트 겸 연수를 하면 되잖아요. 우리 집에서 주인님과 같이 밤을 보낸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단둘이 외박까지 할 만큼 진도를 빼고 있어서 부끄럽네요.”
“그런 게 가능해요?”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나도 공무 헌터인데.”
인유신은 멍하니 수긍했다. 하긴 연수에서 점수를 매기는 것도 아닌데 절차만 이수하면 누구와 어디서 하든 무슨 상관일까. 이런 뻔뻔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현규하에게 물들고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은 착각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뜻대로만 되는 법은 없었다.
* * *
현규하의 사유 던전은 철원을 지난 평강의 논지 근처에 있었다. 현재는 문을 닫은 공장에 열린 지속 게이트여서 그냥 공장터를 전부 샀다고 했다.
“오늘 게이트 닫으면 땅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봤어요. 싹 밀어서 부지 전체를 케이지처럼 꾸민 뒤에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 놀이터로 줄까요?”
너른 공장터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햄스터란 무척 혹하는 공상이긴 했지만……. 그 말을 하는 현규하의 표정이 몹시 뚱했기에 인유신은 그의 손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기분 푸세요.”
“네에…….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국어책 읽듯이 중얼거린 현규하는 이내 한숨을 폭 쉬며 인유신을 끌어안았다.
“주인님과 단둘이 데이트를 할 수 없다니 공직 생활이란 너무나 가혹해요.”
인유신은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발단은 조상필을 방문했던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청사로 돌아오자마자 지원담당관을 직통으로 찾아간 현규하는 자신만의 논리를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의 기세에 휩쓸린 담당관은 곧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전례에 없는 일이지만……. 원칙적으로 어긋난 내용은 아니로군요.〉
〈그렇죠?〉
〈현 헌터에게는 여러 특혜가 있으니까요. 이 정도쯤은 내 재량으로 처리가……. 아, 잠깐만.〉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담당관은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현규하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현 헌터.〉
〈안 해요.〉
〈얘기라도 들어 주면 안 될까요?〉
〈들어도 안 할 건데요.〉
〈크흠, 큼. 사실은 말이죠. 이번 주에 연수가 있긴 한데 연수 용도로 쓸 만한 소규모의 국영 던전들은 전부 내부가 안정되어 있어요.〉
보스나 히든 보스를 사냥하는 목적의 던전이라면 길게 열어 두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던전은 내부의 마나를 계측해서 던전 브레이크가 아슬아슬할 때까지 파밍하며 뽑아먹다가 클리어하는 게 보통이었다.
던전 연수는 클리어까지 연수 과정에 있으므로 가능한 한 던전 브레이크가 가까운 던전을 고르는 게 원칙이다. 다만 이번 연수에는 타이밍이 맞지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제일 소규모의 던전으로 연수할 예정이긴 한데, 어차피 현 헌터의 던전을 클리어할 거라면 거기서 다른 합격자들의 연수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안 돼요.〉
현규하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즉시 거절했다.
〈당연히 공짜로 던전을 쓰겠다는 건 아니고 대가는 지불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난 느긋하게 유신 씨와 1박 2일 캠핑이나 하려는 건데요. 입구 근처가 눈 쌓인 겨울 숲이라서 분위기가 좋거든요.〉
마수가 득실거리는 던전에서 캠핑을 하겠다는 한가하고 정신 나간 소리를 늘어놓는 인간은 전 세계에 몇 명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극히 희귀한 인종의 하나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게 담당관의 비극이었다.
다른 공무 헌터였다면 조건을 딜하든 상사에게 압박을 넣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규하는 이능부 장관까지 비위를 맞추며 설설 기는 절대 갑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보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담당관은 얼마 전에 읽은, 현규하가 모 길드의 건물을 통째로 뽑아서 거꾸로 꽂아 버렸다는 기사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길드 건물의 운명이 바로 이능부 청사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멀쩡한 던전을 닫아야 하는 게 몹시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담당관이 알겠다는 대답을 하려는 때, 현규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마침 심부름 때문에 파티션 근처를 지나가던 오하나였다.
〈안녕하세요, 헌터님! 안 그래도 찾아뵈려던 참인데 잘됐네요! 용무 끝나시면 복도에서 잠깐 시간만 내 주실 수 있나요?〉
〈왜요?〉
〈이능부 SNS에 올릴 셀카 한 장만 찍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저번 게이트 사건 이후에 공식적인 행보가 없으시니까 헌터님을 염려하는 팬들이 많거든요.〉
〈싫어요.〉
브이로그도 선선히 찍어 주던 현규하였으니 별걱정 없이 부탁했던 오하나는 놀랐다.
〈헉. 안 되나요?〉
〈이제 눈치 볼 필요도 없는데 귀찮은 거 하기 싫어요.〉
〈아하……. 에고,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전에 무슨 눈치를 봤다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안 된다니 별수 없다. 오하나는 난감함을 감추며 꾸벅 사과했다. SNS의 댓글창을 죄다 닫아 버릴 수도 없고 어쩐다.
난처함이 깃든 그녀의 표정에 미간까지 찌푸리면서 한순간 맹렬하게 갈등한 현규하는 묵직한 한숨과 함께 결정했다.
〈폰 줘요. 여기서 찍어도 되죠?〉
〈아! 정말요?〉
〈안면도 있는 그쪽 부탁을 거절했다는 거 유신 씨가 알게 되면 마음 쓸 거 같네요.〉
〈제가 보정도 확실히 하겠습니다! 필터도 좋으신 거로 고르세요!〉
〈그딴 거 안 해도 잘생겼어요.〉
셀카를 찍은 현규하는 담당관도 내려다보았다.
〈유신 씨는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건 반길 테니까……. 아까 말한 그거도 그냥 할게요.〉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사무실 사람들로 인해 현규하의 컨트롤 타워가 인유신이라는 소문이 헌터업무담당과만이 아니라 이능부 전체에 술렁술렁 번졌다.
사정을 들은 인유신은 열심히 현규하를 칭찬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쥐도 춤추게 하는 법이었고, 현규하도 꽤 기분이 풀렸다. 계속 속상한 척하는 건 약해진 틈을 노리려는 엄살이라는 걸 인유신은 미처 몰랐다.
그 덕분에 현규하는 그를 마음껏 끌어안고 얼굴도 부비적거렸고, 토닥토닥도 받았다. 1박 2일의 오붓한 캠핑을 포기한 대가로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훗.”
8세에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내는 건 덤이었다. 저 쥐새끼가 아무리 귀여운 척을 해도 자신을 이기지는 못한다.
‘저 밉살스러운 자식은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19년 전의 동일한 침식 게이트에서는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와 만난 뒤, 평범하게 보스가 등장해서 클리어했었다. 인유신이 그의 ¦°ø¾Îð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데이트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정수리에 쪽 하고 입 맞춘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인유신을 위한 새로운 선물이었다. 아마 그에게 가장 유용한 선물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목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에 얼굴을 숙인 인유신은 의아해졌다. 까만색 가죽으로 된 재질인데 크로스 백과 비슷하지만 훨씬 작았다.
“이게 뭐예요? 파우치?”
“매번 앞주머니가 있는 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아! 8세 이동장이요?”
그렇게 보니 딱 8세가 들어가서 안착하기 좋은 사이즈였다. 입구를 열어 주니 8세도 앞주머니에서 쪼르르 기어 나와 안으로 들어갔다.
“뀨우.”
마음에 드는지 8세가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내 재킷이랑 같은 마수의 가죽을 써서 만든 커플템이에요. 튼튼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방수 기능이 좋다 보니 피가 튀어도 묻어나지 않아서 편하거든요.”
“아, 그래서 맨날 그 재킷 입고 다니시는 거였네요.”
마수의 피라는 생각만 하고 싶지만 아마 사람의 피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14살의 현규하가 심장 안에서 동당거리면서 뛰는 것만 같다.
인유신은 슬쩍 말문을 돌렸다.
“다른 분들도 오실 때가 됐죠?”
“참, 중요한 게 아니라서 말한다는 걸 깜빡했는데 오늘은 나르샤만 오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나르샤만 와도 되는 거예요?”
“최진혁이 뭔가 했다고 하던데요.”
보스를 사냥하고 던전을 닫는 게 최종 목표인 만큼 던전 연수를 할 때는 길드들의 협조를 얻는다. 이번에도 다섯 개 길드와 공조하기로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르샤 길드 단독으로 줄었다니 의외였다.
현규하가 있으니 클리어에 문제가 없긴 하겠지만 말이다.
소소한 의문은 남은 일행이 도착하면 해결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 버스들이 줄지어 야트막한 흙길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흔적만 남은 주차장에 주차한 버스에서 제일 먼저 내린 사람은 박승기였다.
“일찍 왔네? 헌터님, 오늘도 잘 부탁드림다!”
현규하는 고개만 까딱해서 인사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재수 없는 반응이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남친의 친구라고 딴에는 예의를 챙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박승기는 개의치 않았다.
단둘만의 오붓한 1박 2일 캠핑이 무산된 현규하는 이렇게 된 김에 어렸을 때 사진이라도 얻자는 의지를 다졌다. 박승기는 당연히 연수든 소풍이든 던전을 방문하는 일이라면 대환영이었다.
“하루 자고 오는 건데 무슨 캐리어가 그렇게 커?”
“샘플 담아 갈 통들 넣어서 그래. 이것도 줄이고 줄인 거야. 교수님이 촬영 제대로 하라고 연구실 드론까지 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