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14)
  • “오랜만에 한잔했더니 취해서 그런가 봐요.”

    거짓말이 통했을까. 잘 모르겠다.

    인유신은 현규하의 얼굴을 살펴보거나 상태창을 살피지 않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콩 하고 묻었다. 짧게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머리 위로 느껴지고, 심장의 박동이 한 차례 깊이 울렸다.

    14년 전에 현규하는 겨우 14살이었다. 지금은 흔들리거나 다치는 모습이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지만 14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도 그러했을까.

    14살의 현규하. 부모처럼 따랐다던 강석우와 양사 그룹 남자들의 잇따른 사망. 인유신은 낮은 한숨을 삼켰다. 그 사이의 연결 고리를 들여다볼 수도 없었고, 들여다볼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당신이 먼저 다가와 주다니 매일매일 술만 마셨으면 좋겠네요.”

    목덜미를 사르르 쓸며 흐르는 실없는 농담에 안도한다.

    “규하 씨는 저녁 뭐 먹었어요?”

    “와인이랑 치즈 조금요. 잘 봐달라는 뇌물로 와인을 들고 갔는데 바로 따서 같이 마시자고 하더라고요.”

    “우와.”

    “그 감탄사의 의미가 뭐죠?”

    “규하 씨가 잘 봐달라는 생각도 한다는 게 놀라워서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나도 사회생활은 합니다.”

    인유신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겁나던 사람과 언제 이렇게 편안한 농담을 주고받게 되었을까.

    “잠깐 걸을까요?”

    바이크를 끄는 현규하의 옆에서 나란히 같이 걸었다. 후문은 곧 번화한 대학로로 이어졌지만 예의 스크롤을 사용했는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자식이 일반 보스몹도 아니고 침식 게이트의 보스인 게 마음에 걸려서요. 오늘 만난 사람이 국내에서 마수와 테이밍 연구로는 한 손에 꼽히는 박사님이거든요. 등급이 낮긴 하지만 본인이 테이머이기도 하고요. 가서 이런저런 얘기라도 나눠 볼래요? 안 그래도 침식 게이트의 보스를 테이밍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심을 갖고 있더라고요.”

    “제가요? 괜찮을까요?”

    “내가 오늘 기름칠을 잘해 놔서 유신 씨만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바로 약속 잡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 국립연구원이니까 과장님과 잘 쇼부 치면 비번일 때가 아니라 업무 시간 중에 합법적으로 갔다 올 수도 있죠.”

    “어쩐지 헌무과 온 뒤로 놀면서 월급 받아먹는 거 같은 기분도 들어요.”

    생각해 보면, 그동안은 헬스를 하거나 현규하의 외근을 따라다니는 거 말고는 뭔가 업무라고 할 만한 걸 한 적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보직을 옮기면서 인수인계도 급하게 받긴 했는데 별 의미가 없던 거 같다.

    “내 세금으로 주인님 월급을 충당했다니 뿌듯하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될까요?”

    그동안 테이밍할 수 있었던 게 햄스터뿐이어서 다른 테이머들이 길들인 마수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아는 게 없었다. 소개해 주는 박사를 만나면 분명히 좋은 조언을 들을 수 있을 테지만, 한 가지 망설임이 대답을 주저하게 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결정해도 상관없어요. 박사님 명함 줄 테니까 나중에 만나고 싶으면 따로 가도 되고요.”

    현규하가 명함을 하나 주었다. 전략능력연구원의 조상필 박사였다.

    당장 명함을 보관할 곳이 없어서 휴대폰 케이스 안에 넣다가 갑자기 전화가 걸려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했다. 사무실에서 걸려 온 전화였기에 얼른 받았다.

    - 유신 씨, 퇴근했는데 미안해요. 혹시 현 팀장님과 같이 있나요? 팀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셔서요.

    “바꿔 드릴까요?”

    - 부탁할게요.

    현규하는 퇴근했는데 무슨 전화냐며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전화 바꿨는데요. 네, 네……. 그건 그렇고 나 퇴근했어요. 그럼 이만.”

    목소리를 들으니 급한 용무 같았는데 현규하는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고는 성의 없이 통화를 톡 끊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대요?”

    “경찰이 이능부에 지원 요청을 했는데 근무 중인 팀들은 게이트 탐색 중이어서 지원 갈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대요. 추가 근무 수당은 준다는데 그 푼돈 받자고 주인님과 데이트 도중에 뛰쳐나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하…….”

    인유신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경찰이 요청할 정도라면 꼭 필요한 일이긴 할 텐데, 도움도 안 되는 자신이 시간 외 근무로 도와줄 수 있냐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잠자코 입을 다물었는데, 인유신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현규하가 제 휴대폰으로 다시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거기 위치 어디예요? 주소 찍어서 문자로 보내 줘요.”

    통화를 종료한 현규하는 눈을 깜빡거리는 인유신에게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도와줬으면 하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요.”

    순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멍하니 열었다. 이럴 때는 고맙다는 말을 하면 되는 걸까. 겨우 의식 속에서 대답을 건져 냈을 때는 이미 현규하가 헬멧을 꺼내어 그에게 씌워 주고 있었다. 얼굴이 쉽게 가려져서 다행이었다.

    D등급 이상의 각성자들이 전부 헌터로서 일하는 건 아니다. 경호원이나 경찰, 군인 등 양지의 직업군도 있지만 손쉬운 돈벌이에 유혹되어 범죄의 길로 빠지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경찰에도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지원팀이 있지만 가끔 버거운 문제가 생기면 이능부에 지원 요청을 하곤 했다. 방금 지원 요청이 온 장소는 조폭들 간의 패싸움이 벌어진 축구장인데, 어느 정도 등급이 높은 각성자가 섞여 있다는 정보였다.

    도착한 현장은 난장판이었다. 사람을 들이받아 피가 튄 트럭은 총알구멍으로 벌집이 되어 있었고, 바닥은 푹푹 파였으며 인조 잔디는 온통 시커멓게 탔다. 경찰 특수 부대와 조폭들 사이에서 총소리와 비명이 그치지 않았다.

    “조폭들 사이에 각성자가 일곱 명쯤 있는 거 같네요.”

    원소계나 주술을 사용하는 각성자도 섞여 있는지 제법 현란하게 번쩍거리는 광경에 그만 얼이 빠진 인유신과는 달리 현규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사이코키네티시스트도 하나 있고요.”

    날아오는 벽돌 하나를 그가 가볍게 잡아 냈다.

    “하지만 내가 더 세요.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현규하 헌터, 지원 감사합니다! 우선 축구 골대 근처의 각성자부터 제압을 부탁합니다!”

    그들을 발견한 형사 하나가 급히 달려왔으나 현규하는 무시하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그냥, 힘을 가하여 주차장 전체를 눌렀다. 조폭이든 경찰이든 가리지 않고.

    “컥!”

    “으허억!”

    곳곳에서 억눌린 비명이 올라오고, 한순간에 현란한 번쩍거림과 총소리가 사라졌다. 인유신은 이름 모를 주술사의 신장대가 우지끈 부러지는 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익숙해지긴 했지만 몇 번을 봐도 차원이 다른 강함이다.

    아까 현규하를 허겁지겁 불렀던 형사도 바닥에 털푸덕 짓눌린 채 타임을 외치는 것처럼 손짓을 허우적거렸다.

    “현 헌터! 조폭들만 무장 해제 해 주면 됩니다……!”

    “아, 세세하게 구분하기 귀찮은데. 그냥 이대로 체포할 사람들만 더 부르면 안 돼요?”

    “제발요!”

    “특수 부대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누가 경찰인데요?”

    “방탄조끼 입은 사람들요!”

    명료한 정의였다. 현규하는 귀찮아하면서도 축구장 위를 슬슬 날아다니며 조폭과 경찰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에게서는 안도의 숨이, 조폭들에게서는 쌍욕이 뒤따랐다. 물론 후자는 금방 비명 소리로 치환되었다.

    중력의 압박에서 해방된 경찰들은 뻐근한 몸을 주무르며 조폭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처박혀서 욕설, 또는 비명만 지르는 놈들의 손에 수갑만 채우면 되는 쉬운 작업이었다.

    ‘규하 씨는 마수를 사냥할 때만이 아니라 공무 헌터로서도 유능하고 멋있는 거 같아.’

    현규하라면 쪼그리고 앉아서 호미로 땅을 파고 있어도 멋지긴 하겠지만.

    조폭의 패싸움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한가로운 생각을 하는 사이, 방탄조끼를 입고 있어서 현규하가 풀어 준 사람 하나가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널브러진 진압 방패를 사이코키네시스로 들어 힘껏 내던졌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탓에 방패는 매서운 기세로 허공을 사납게 갈랐다.

    “씹새끼! 그냥 뒈져 버려!”

    방탄 역할만이 아니라 각성자들의 능력까지 방어하기 위해 특수 제련한 금속 방패다. 묵직한 진압 방패는 방어구인 동시에 효율적인 흉기였다.

    하지만 현규하를 겨냥하고 내던진 방패는 남자의 미숙한 능력으로 인해 궤도가 비틀렸다.

    상공에 떠 있는 현규하가 아니라, 멀찍이 떨어진 바이크에 앉아서 현장을 구경하고 있던 인유신에게로, 금속으로 된 방패가 날아갔다.

    인유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뿐이었다.

    텅!

    빈틈없이 보호하는 역장을 방패는 꿰뚫지 못하고 오히려 튕겨 나갔다. 역장에 부딪히는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찔했다.

    “유신 씨!”

    비명 같은 외침은 그가 아니라 오히려 현규하에게서 들렸다. 순식간에 곁으로 돌아온 현규하가 다급히 물었다.

    “괘,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목소리만이 아니라 눈동자까지 가늘게 떨리며 정신없이 그를 살폈다. 역장으로 보호받고 있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인유신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조금 놀라긴 했는데…….”

    깜짝 놀라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인유신에게 끼친 영향이란 그 정도였다.

    정말 그뿐.

    그것만으로도, 현규하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에 모든 표정이 지워진 서늘한 낯이 후방의 남자를 향했다.

    공격이 빗나갔다는 것을 알고 허겁지겁 도망치던 남자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어느 틈엔지 현규하가 다가와 있었다. 비명을 지를 자유도 얻지 못한 남자는 당혹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혓바닥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방에서 억누르는 압박감이 호흡할 자유마저 박탈한다. 살가죽이 팽팽하게 짓눌리고, 뼈마디가 우드득 뒤틀린다.

    그렇게 조여드는 압박감이 전신의 뼈를 부스러트리기 전.

    “규하 씨!”

    한마디의 목소리가 무형의 살기를 흩트렸다.

    “저 괜찮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인유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지나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보세요.”

    등을 돌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안전을 거듭하여 확인시켜 주기 위해 손까지 쥐었다가 폈다 했다. 짧은 침묵이 둘 사이의 공간을 가르고, 현규하가 고개를 빙글 돌렸다.

    “네에.”

    평소처럼 해사하게 웃는 낯은 사라졌던 표정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태연하다.

    “끄아아아!”

    그렇지만 그가 힘을 거두자마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부러진 다리뼈는 발을 딛고 선다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부상에 형사들은 당혹해하면서도 각성자 전용 수갑을 일단 채웠다.

    경찰들이 조폭들을 경찰차와 앰뷸런스에 하나둘씩 실어 보내고 있을 때 현규하도 나머지 현장을 정리하고 인유신의 앞으로 내려왔다.

    “놀란 건 어때요? 병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요만큼밖에 안 놀랐어요.”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서 ‘요만큼’ 하고 표시하니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미소한다. 방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저 웃음은, 자신의 안위에 아주 약간의 흔들림만 있어도 가차 없이 상대를 짓뭉개어 죽일 웃음이다. 자신이 말리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도 아까의 남자는 전신의 뼈가 으스러져 죽었을 것이다.

    ……현규하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너무나.

    “규하 씨, 아까 말씀하셨던 박사님을 뵈러 갈게요.”

    인유신은 현규하가 자신에게 얽매이는 영역이 커지는 게 무서웠다.

    테이밍을 연구한다는 조상필 박사는, 현재의 그에게 가장 필요한 해답을 구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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