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214)

마지막까지 현규하와 살벌한 분위기를 돋우고 병원을 나온 공태성은 길드원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대충 응대하고 차에 탄 그는 길드 본사 건물로 오는 길에도, 사무실에 도착한 뒤에도, 내내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겨우 혼자 있을 짬을 낸 건 2시간은 지나서였다.

공태성은 게이트 내부나 병원에 있을 때는 현규하에게 들통나지 않도록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던 고래를 불러냈다.

“슬리핑 뷰티.”

『…….』

“이봐.”

『…….』

거듭 불러서야 간신히 거대한 고래가 꿈지럭거리며 나타났다. 고래는 잠에 찌든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며 입을 쩌억 벌렸다. 인간의 행동에 비유하자면, 하품이었다.

『왜 불렀어?』

“현규하의 애인을 본 감상은 어떻지? 그놈과 동류여서 대신 쓸 수 있을 듯한가? 네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일부러 몇 번이나 대화할 틈을 냈다만.”

『뭐?! 왕자님 애인? 그럼 왕자님도 여기에 있는 거야? 어디? 어디?』

깜짝 놀란 고래가 커다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공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네놈, 설마…….”

뒤늦게 공태성의 흉흉한 표정을 목격한 고래의 동공이 커다랗게 흠칫하더니, 그의 눈치를 살피고는 데헷 하고 최대한 귀엽게 웃었다.

『웬일로 날 부르지도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게 너무 편해서 계속 자고 있었어.』

“야 이, 씨발! 쓸모없는 물고기 새끼야!”

“잘못했소꼬망!”

욱한 공태성은 고래의 눈알로 커피 잔을 내던졌고, 신과 인간으로부터 나란히 도움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은 고래는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사과만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길드장님! 무슨 일이세요? 안에서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침입입니까?”

“아무 일 없어.”

“하지만 어딘가 북쪽 사투리 같은 억양의 목소리가…….”

“없다니까!”

깨진 커피 잔까지 목격한 한준수는 또 혼자 지랄했냐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다시 나갔고, 공태성의 혈압은 더 치솟았다.

‘게이트에 처박히기까지 하면서 대체 난 열흘 넘게 뭘 한 거지?’

그에게 남은 건 남친 있는 게이에게 집적거리는 이혼남이라는 루머뿐이었다. 저 쓸모없는 고래만 믿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엄청난 회의감이 밀려왔다.

공태성이 극심한 현타를 겪고 있는 사이, 인유신과 현규하도 슬슬 퇴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밖에 기자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날아서 가요. 김지연 씨 집에 들러서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 픽업해 오면 되는 거죠?”

“참, 8세 케이지는 어떻게 들고 갈까요?”

“내 아공간에 넣을게요. 그 자식은 그냥 주인님 주머니에 들어가면 되겠는데요.”

헥헥거리면서 쳇바퀴를 계속 돌리고 있던 8세는 말이 끝나자마자 케이지에서 튀어나와 호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그러고는 얼굴을 빼꼼 밖으로 내민다. 손으로 감싸니 따스한 체온은 느껴지지만 콩닥거리며 심장이 뛰는 기척은 없었다.

햄스터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확실히 보편적인 생명체는 아니었다. 체온 또한 거짓일까. 인유신은 비정형의 형체에 결정석도 없으며 시체조차 남지 않던 침식 게이트의 마수들을 떠올렸다.

‘뭐, 사람도 쥐라고 테이밍하게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겉모습만이라도 설치류인 게 어딘가 싶다.

케이지를 정리한 현규하가 왼쪽 다리를 축으로 몸을 빙글 돌려 인유신을 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기 전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

인유신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뭔데요?”

“저놈도 새집이 생겼으니 당연히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에게 새집을 장만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갑자기 동생이 생겨서 합사해야 하는 것에도 질투가 날 텐데 혼자 옛날 집에서 살아야 하니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공태성보다 생각하는 게 늦다니 분하네요.”

“그으……. 규하 씨.”

“네?”

햄스터는 두 마리 이상 같은 케이지에 살게 하면 안 되지만, 다른 케이지에서 사는 건 괜찮고, 각각 다른 케이지에 사는 건 합사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입 속에서 흐트러뜨렸다. 어차피 현규하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잘해 줘야지.’

8세를 테이밍해도 된다고 양보해 줬으니 그만큼 보답해 주고 싶었다. 늘 현규하에게 받기만 하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케이지는 어디에서 사면 되나요? 백화점?”

“전 그냥 인터넷에서 샀어요.”

그러자 냉큼 태블릿을 내민다. 인유신은 톡톡 화면을 터치하며 아이 쇼핑을 하다가 현규하가 고른 케이지들 중 하나로 선택했다. 6세는 그만큼 큰 케이지가 필요하지 않은 품종이었지만 케이지는 거거익선이랬으니 바꿔 줘도 나쁘지는 않겠지.

쇼핑도 끝났고, 주머니 속에서 고르륵거리는 8세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병실을 나오려던 때였다.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어! 저 합격 문자 왔어요!”

체력 검사에 통과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합격했다는 공식적인 결과가 나오니 새삼 즐거웠다. 신나게 합격 문자를 보여 주자 현규하도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그럼 나도 노력한 유신 씨에게 합격 축하 선물을 줘야죠. 손 내밀어 볼래요?”

“손이요?”

뭘까 싶어서 손바닥을 살짝 내미니 그가 손등이 보이게 뒤집었다. 이어 쏙 들어오는 매끄러운 감촉이 왼손 약지에 느껴졌다. 인유신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건…….”

“햄스터 반지예요. 귀엽죠?”

그의 말대로 햄스터가 손가락을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의 귀여운 반지였다. 단순한 만듦새인데도 은빛의 투명한 광택이 고급스러웠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진짜 귀여워요. 이런 반지는 어디에서 사셨어요?”

“핸드메이드 커플링이요.”

그 말을 하며 현규하는 자신의 손가락도 까닥까닥 흔들었다. 어느 틈엔지 그의 왼손 약지에도 똑같은 햄스터 반지가 있었다.

“설마 규하 씨가 직접 만들었어요?”

“원데이 클래스, 위드 권성길.”

“와아…….”

직접 만든 반지라고 하니 더욱 눈이 갔다. 듣고 보니 햄스터 얼굴 모양의 좌우 균형이 맞지 않고 다소 투박한 부분이 눈에 뜨인다. 기다란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세심하게 반지를 만들었을 현규하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말은 원데이인데 사실 하루 만에 만든 건 아니에요. 아다만티움이 은과는 녹는점이 다르다 보니까 틀을 다듬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시간 날 때마다 가서 틈틈이 만들었어요. 다행히 체력 검사를 하기 전에 끝낼 수 있었지만요.”

“은이 아니었어요?”

그 말을 듣고 감정해 보니 정말 아다만티움이었다.

[각성자 현규하가 제작한 아다만티움 반지]

“너무 튀지 않게 도은했어요.”

“정말 제가 받아도 되는 걸까요?”

현규하의 정성은 물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정말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위장용으로는 너무 과한 선물이 아닌가 싶은 기분도 못내 가시지 않았다.

주저하는 그의 망설임을 아는 것처럼 현규하가 다정하게 인유신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1회용 호신 용품이라고 생각해요. 위험할 때 반지에 마나를 주입하면서 시동어인 ‘파계(破界)’를 말하면 돼요. 그럼 내가 어디에 있든, 설령 며칠 전과 같은 침식 게이트 밖에 있더라도 세계의 경계를 부수어서 당신을 찾아올 수 있어요. 내 마나를 저장시켜 뒀으니까 유신 씨의 마나량이 적어도 괜찮을 겁니다.”

호신용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오히려 부담감이 덜어졌다.

“고맙습니다. 소중하게 낄게요.”

“손가락 사이즈에 맞게 반지의 길이는 자동으로 변형되지만 기왕이면 왼손 약지에 끼면 좋겠네요.”

“반지에 걸려 있는 스킬이 일종의 텔레포트인 거예요? 시동어가 파계라니 특이해서요.”

“음, 엄밀한 의미에서 텔레포트와는 다른데…….”

어째서인지, 현규하는 그 대답을 하며 더 고민하는 눈치였다. 인유신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설명 굳이 안 해 주셔도 돼요.”

사양했는데도 불구하고 현규하의 낯에는 여전히 난감해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턱을 매만지면서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는 얕은 한숨을 쉬며 입가를 누그러트렸다.

“분명히 곤란해요. 곤란한데도, 당신에게는 말하고 싶어져서 더욱 곤란하네요.”

인유신의 손을 올린 현규하가 약지의 반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새털처럼 떨어지는 입맞춤은 지금껏 몇 번이나 겪었다. 퍽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처럼 낯설게 느껴지고, 손끝이 움츠러든다.

“그 파계는, 어머니가 각성한 고유 능력입니다. 실종되기 전에 나에게 정수로 넘겨준 것을 유신 씨의 반지에 심었어요.”

* * *

고유 능력을 타인이 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먼저 고유 능력을 카피하여 스크롤로 제작하는 것이다. 장점은 카피한 스킬을 개량하고 연구할 수 있다는 점이며, 단점은 스크롤이 고액이며 원본에 비해 다운그레이드된 위력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현재로서는 카피되는 능력 또한 제한적이었다.

다음으로는 고유 능력을 정수로 추출하는 방법이 있다. 원본과 흡사한 위력을 지니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정수로 추출한다는 뜻은 즉, 각성자 본인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는 의미였다.

현소라는 자신의 능력을 추출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주었고, 그 아들은 흡수하지 않고 20년 동안 간직하고 있기만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다시 주었다.

인유신은 이 반지를 받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야, 지금 제사 지내냐? 짜장면 붇는다. 얼른 먹어.”

“어? 어어…….”

왼손 약지에서 무게를 느낄 때마다 그 무게감이 답을 헤아릴 수 없는 상념의 늪으로 발을 당긴다. 인유신은 어깨를 가볍게 털어 내며 짜장면을 비볐다.

게이트에서 무사 귀환하고 온갖 촬영 영상과 샘플까지 챙겨 온 박승기는 랩실의 아이돌이 되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퇴근길에 한국대에 잠깐 들른 인유신은 아이돌의 친구이자 현규하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얼떨결에 휩쓸려서 교수가 쏜다는 저녁 식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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