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14)

“유신 씨가 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어떻게 끝까지 훼방을 놓겠어요. 테이밍하고 싶으면 해요.”

“진짜요?!”

“대신 내가 무조건 두 번째입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 말고는 주인님 사랑 양보 못 해요.”

“당연하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게 해결된 거 같아 이혜연은 피식 웃으며 물러났다.

[햄스터의 테이밍이 완료되었습니다. 자동 설정된 이름으로 명명하시겠습니까?]

“아, 이름은 바꿀까요?”

“주인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햄스터의 이름은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8세’입니다.]

여덟 번째의 익숙함이 부드럽게 영혼을 관통하고, 영혼과 영혼을 잇는 가교가 놓였다. 손목에 그려진 박쥐 옆에 새로운 햄스터 문신이 새겨진다.

“찍!”

8세가 기쁜 울음소리를 내었다.

[이름 :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8세]

[현재 상태 : 기쁨. 안정.]

“규하 씨, 8세가 진짜 보스 몬스터이긴 한가 봐요. 이렇게 조그만데도 대부분 D등급이에요.”

“이 자식의 주먹질 한 방에 주인님이 벽을 뚫고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위험하니 격리합시다.”

“……그 정도일까요?”

이어 허공에 물감을 떨어트린 듯 색채가 번지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열리는 틈 사이로 저녁노을이 비쳐 들었다. 인유신은 나직이 감탄했다. 온화한 빛으로 서서히 물드는 무채색의 세상은,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신묘한 아름다움일 터였다.

그사이에 공태성이 기절한 최진혁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와서 휙 던졌다. 이혜연이 익숙하게 받아서 그를 어깨에 둘러멨다.

“입구가 좁으니까 사람이 너무 몰리지 않도록 줄을 서세요. 내부가 빌 때까지는 닫히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시고요.”

그녀의 인도를 따라 사람들은 안도감에 울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며 한 명씩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서 있었다. 따끈따끈한 8세를 무의식중에 살살 조물거리는 인유신의 손바닥으로 현규하가 시선을 힐긋 내렸다.

“그렇게 귀여워요?”

물론 귀엽다. 하지만…….

[현재 상태 : 살의. ??. 질투. 질투.]

대놓고 햄스터에게 질투를 드러내는 현규하도 은근히 귀여웠다.

“규하 씨가 더 귀여워요.”

“당연하죠.”

그제야 만족한 듯 어깨를 펴는 현규하의 손을 잡았다. 가장 따스하다고 느끼는 손이다. 처음으로 그를 귀엽다고 생각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서 나란히 게이트를 나갔다.

6.

게이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제일 걱정했던 건 6세였는데 다행히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현재 세계에서 그들이 갇혀 있던 건 5시간 남짓이었고, 6세도 굶지 않고 무사했다.

일반인 수십 명에 최상위 헌터들까지 휩쓸렸던 게이트다. 적잖은 소동으로 외부는 시끄러웠다.

게이트 밖에서 대기하던 의료진들에 의해 일행은 즉각 격리되어 이송되었다. 와글와글 몰려와 있던 기자들 덕분에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사진이 유포되어 현규하의 팬들을 안도하게 한 건 물론이었다.

- 나라 망한 것처럼 어그로 끌던 새끼들 보고 있냐ㅋㅋㅋㅋ

에급 둘로도 모자라서 스급까지 있었는데 게이트 깨는 건 코 파면서도 쌉가능이지ㅋㅋㅋㅋㅋ

└들리는 얘기로는 이번에 진짜 좀 어려웠다 함. 보스 찾느라 시간 다 꼴박았다던데?

└└?? 그럼 어케 깬 거임

└└└스급이 둘이나 있는데 알아서 깼겠지ㅎ 세상에서 제일 쓸모 없는게 연예인 걱정과 랭커 걱정이여

└침식 게이트에 랭커들이 넷이나 휩쓸린 것도 존나 얼탱없음ㅋㅋㅋ보스몹새끼 뒤지기 싫어서 숨었을듯ㅋㅋㅋㅋㅋ

└└우리 콩 형님은 공무 헌터들 극혐하는데 어쩌다가 누추하신 몸으로 그런 귀한 곳에ㅠㅠ

└└└또 현규하 스카우트하러 간 거 아닌가?

└└└└게이트 열리기 전에 구경하던 사람이 쓴 글 못 봤음? 공태성이 현규하가 아니라 남친 만나러 온 거라 했다던데

└└└└└아니 시발ㅋㅋㅋㅋ공태성 그 인간은 여자랑 결혼까지 했었으면서 갑자기 뭔뎈ㅋㅋㅋㅋㅋㅋ

└└└└└마성의 게이냐곸ㅋㅋㅋㅋ남친 머 하는 넘인지 졸라 궁금하넼ㅋㅋㅋㅋㅋㅋㅋ

└└└└└형ㅠㅠ외로우면 내가 있잖아ㅠㅠ

└└└└└└대충 양사 그룹 부회장에게 곧 썰릴 덧글이라는 뜻.

현규하와 사귀는 사이가 된 뒤에는 의도적으로 인터넷을 멀리하기도 했거니와, 병원에 격리되어 있느라 다행히 인유신은 또 어떤 루머가 부피를 키우고 있는지 몰랐다.

던전 보스가 햄스터로 변했고, 그 햄스터를 F급 테이머가 길들였다는 믿기 힘든 사실은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 침식 게이트에서 보스가 시간을 두고 나타났다는 사실 또한 처음 보고된 패턴이었으므로, 게이트에 휩쓸렸던 일행들은 비밀 서약서까지 썼다.

침식 게이트는 클리어한 뒤에 오히려 수습해야 할 일들이 많다. 격리된 일행은 탈수기의 야채처럼 탈탈 털리며 온갖 검사와 정화를 받아야 했다. 멸망의 원인이 전염병인 세계에서 병균이라도 묻어 온다면 이 세계 또한 무사하기 힘들 테니.

그 기간 동안 예전에 햄스터를 키운 적이 있다는 김지연이 6세를 자택에서 돌봐 주기로 했다. 일당은 현규하의 셀카였다.

6세 걱정도 해결되었고, 게이트로 인한 재해였기에 쉬는 동안 월급도 제때 나왔다. 인유신은 본의 아닌 유급 휴가를 만끽하기로 했다.

“우리가 클리어한 게이트는 생명력이 쇠잔해서 자연스럽게 멸망한 세계였으니까 위험한 병균은 없을 거예요.”

현규하의 장담까지 들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박승기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과 노닥거리는 거 말고는 하는 일도 없이 나태한 10일이 지났다.

마침내 격리가 끝나고 퇴원하는 날이었다.

“퇴원 선물이다.”

격리된 상태로도 화상으로 길드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얼굴도 별로 못 봤던 공태성이 퇴원 길에 들렀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원목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햄스터 케이지였다.

가뿐히 내려놓는 커다란 케이지를 보는 인유신의 눈동자도 커다래졌다.

“우와,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근데 저는 길드장님께 아무 선물도 준비 못 했는데…….”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먹고 말지.”

인유신은 멋쩍게 웃으며 대신 매점에서 사 왔던 포도 주스라도 따랐다. 주스를 받아 든 공태성은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등 뒤에 있는 건 빨판인가.”

“신경 꺼.”

대답은 인유신이 아니라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인유신은 민망함으로 빨개지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갑자기 생긴 동생과 합사하게 된 현규하는 24시간 내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헬스하기 싫어서 튀었을 때보다 증상이 더 노골적이었다.

“야, 안 들어가?”

새집이 생기든 말든 초콜릿이나 오독오독 갉아먹고 있던 8세가 움찔해서는 스스로 문을 열고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규하의 눈치를 보더니 쳇바퀴도 열심히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 꼴을 처음 본 공태성이 낮게 침음했다.

“……햄스터가 원래 초콜릿도 먹던가?”

“안 되는데 얘는 잘 먹더라고요. 햄스터랑 신체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닌가 봐요.”

“흉내만 낼 거라면 저 불알부터 치우라고 해.”

“햄스터는 뿡알도 귀여운 건데……. 솜털이 보송보송한데 촉감도 말랑말랑해서 중독성 있어요.”

“내가 더 귀여워요.”

“당연히 규하 씨가 더 귀엽죠.”

공태성은 그 귀엽다는 게 현규하의 불알이냐, 라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려 버린 제 뇌를 파 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끼면서 주스를 비웠다. 이 머저리 커플 사이에서 자기까지 오염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만 가마. 그리고 케이지가 내 선물이라는 얘기는 절대 남한테 하지 말도록.”

“헉. 계약직한테 주는 선물도 법에 걸리는 거였어요?”

“그게 아니라……. 루머가, 씨발.”

결국 욕을 씹어 버리고 만 공태성의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보며 인유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루머인지는 모르겠지만 뻔하겠지.

현규하가 득의양양하게 미소하며 인유신의 정수리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공태성이 추한 루머를 생성하는 사이에도 주인님과 나의 사랑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넌 좀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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