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214)

【복잡할 필요가 없는 얘기란다. 숱한 세계의 만상 가운데 멸망을 앞둔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지탱하는 최후의 왕이 있으며, 저 아이가 그 왕의 유일한 자식이라는 것이야.】

“규하 씨가 어째서요……?”

【네가 살고 있는 이 ‘철의 시대’는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신도 왕도 없는 오롯한 인간만의 세계이니 이해하기 어렵긴 하겠다.】

“우리나라에는 왕이 없지만 다른 나라는 입헌 군주국이 아직도 있긴 한데요…….”

【인간의 통치자라는 의미의 왕이 아니란다. 인간의 언어로는 통용되는 단어가 없어서 명확히 표현하기가 어렵다만……. 그렇지. 이 세계를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해 보려무나. 집을 짓고 지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겠니?】

“대들보나 주춧돌 같은 거요?”

【그것이란다. 신들에 의해 세계라는 집을 유지하고 지탱하라는 정명을 부여받은 자, 그게 바로 내가 말하는 ‘왕’이지. ‘왕’은 나와 같은 신들이 인간들을 굽어살핀다는 증명이자 은총이란다. 너희 세계에도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인간의 지배자가 하늘에 빌거나 청하는 일이 있지 않았니?】

인간의 인지가 과학이라는 영역에 닿지 않았을 과거에는 분명히 그랬다.

【그건 비록 너희 세계의 신이 떠나갔을지언정, 한때나마 신에게 정명을 부여받은 ‘왕’이 자연재해를 다스리거나 예견할 정도의 기적을 보였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이를테면 인간들의 공통 기억인 대홍수와 관련된 설화도 한 가지 예시겠구나.】

알 듯 말 듯 한 얘기였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홍수 설화가 있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현규하가 그런 존재의 아들이라니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작은 아가야.】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파도 없는 바다처럼 깊고 고요한 시선으로 인유신을 품었다.

【나는 운명을 선견하는 신. 저 아이는 본래 사냥꾼으로서의 운명밖에 없었지만 19년 전 너와 명운이 엮이면서 새로운 미래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단다.】

그게 무엇이냐고 미처 묻기도 전에 의식이 흐려졌다. 꺼지듯이 고요히 잦아드는 의식의 건너편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지금의 너에게는 혼란스럽기만 할 테니 이 기억은 내가 다시 받아 가마. 대신 약소한 선물을 하나 줄 테니 가져가겠니? 그리고…….】

언뜻 희미한 웃음이 스치는 듯하였다.

【길을 잃은 잠꾸러기 고래 하나가 너의 주변에 있구나. 곁에 두어도 큰 도움은 안 될 테지만 집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보살펴 주렴.】

“……신 씨, 유신 씨.”

가장 먼저 느낀 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다정한 손짓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걱정이 스민 목소리.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니 온화한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그를 쫓아오는 짙은 호박색 눈동자.

목구멍 안이 갑자기 메말랐다.

〈현규하를 자식처럼 키워 준 양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지. 그리고 14년 전, 현규하에게 죽었다.〉

공태성의 한마디가 심장 안에서 덜그럭거린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 올라오는 감정은.

“살아 있으셨네요.”

현규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주인님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숨어서 죽지는 않을게요. 그보다 왜 여기에서 자고 있었어요? 내가 모르는 몽유병이라도 있었나?”

그 말에 흠칫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운동장이 아니었다. 심지어 센터 밖에 있는 도로였다. 경계선에 걸려 두 동강이 난 자동차 앞.

혼자 도로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에 기겁한 인유신은 얼른 현규하에게 답삭 붙었다.

“제, 제가 왜 여기에 있죠?!”

“그걸 방금 내가 물었는데요.”

“어, 어……. 그러니까 아까 규하 씨를 찾으러 나왔다가, 음, 마수랑 만나서 최 팀장님한테 받았던 독의 정수를 깼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아아, 그래서 여기 독연이 깔려 있었나 보네요.”

서서히 소멸 중인 마수의 잔해가 더러 보였다. 독연 덕분에 마수의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했던 모양이다. 왜 의식을 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최진혁이 당신에게 해가 되는 독을 주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말이죠.”

“저한테 저도 모르는 독극물 알레르기가 있었던 걸까요?”

“그런 알레르기가 있으면 최진혁에게 독물을 좀 얻어서 주인님 재울 때 써야겠네요.”

“……!”

경계심이 돋워진 인유신은 재빨리 현규하와 거리를 두었다. 그래 봤자 다섯 손가락으로 그의 재킷을 꼭 쥐고 있다가 세 손가락으로 쥐게 된 정도지만.

“잠깐만요.”

문득 현규하가 엄지로 인유신의 뺨을 훑었다. 핏방울이 손끝에 묻어났다.

“어, 피 났어요? 넘어지다가 생채기가 났나 봐요.”

“이 정도 상처는 침 바르면 나아요.”

그렇긴 했다. 따갑지도 않고 피도 별로 안 나는 거 같아서 그냥 손등으로 한 번 슥 문지르고 잊으려 했던 인유신의 얼굴로 묵직한 기척이 드리웠다.

어쩐지 현규하의 얼굴이 가까워진다는 멍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려는 것처럼 그가 허리를 깊이 숙이고.

할짝.

“히으아악!”

자리에서 펄쩍 뛸 것처럼 기절초풍하여 파르르 경련하는 인유신에게 작게 웃으면서 현규하가 손을 내저었다. 옆에서 막 형성되던 마수 한 마리가 퍽 하고 터졌다.

“상처 낫게 해 주려고요.”

“제, 제, 제 침 바르면 되는데요!”

“상처가 손도 아니고 뺨에 났는데 어떻게 유신 씨 침을 발라요. 혀가 뺨까지 닿는 거 아니잖아요.”

어라? 그런가? 그렇네?

당황하여 순간 그의 궤변에 넘어갈 뻔한 인유신은 급히 정신머리를 주워 왔다.

“손가락에 침 발라서 상처에 문지르면 되잖아요!”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 유신 씨 눈에는 안 보이잖아요.”

“…….”

……어라?

듣다 보니 점점 설득되어서 혼란에 빠진 그를 보며 현규하는 능청스러운 말과는 달리 온유한 미소로 눈가를 적셨다.

당신 정말, 나에게 뭘까.

* * *

침식 게이트에 갇힌 지 71시간 46분.

“다음번에는 보조배터리도 여러 개 챙겨 와야겠어요.”

“다음에는 침식 게이트에 안 갇혔으면 좋겠는데요…….”

“뭐, 그래도 24시간 내내 데이트하는 거 같고 좋잖아요? 불순물들이 주변에 많긴 해도.”

어둠 너머에 다녀온 현규하는 예전처럼 여유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야 구분하지 못할 테지만 인유신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이 게임도 해 봐요.”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보드게임 박스를 꺼냈다. 이번에도 역시 밀봉을 뜯지 않은 새 박스였다. 전파도 통하지 않고 배터리를 충전할 수 없는 이곳에서 보드게임은 킬링타임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온갖 종류의 보드게임이 쏟아졌으나 정작 현규하는 하나도 해 본 게 없었다. 그냥 인기순으로 쓸어서 사 왔다고 했다. 인유신도 보드게임은 보육원에서 조금 해 봤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규칙을 읽고 있을 때 인유신의 휴대폰까지 빌려서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열심히 촬영한 박승기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거기에 이혜연과 최진혁도 합세했다.

의외로 보드게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공태성이었다. 최진혁이 귀찮아하는 그를 강제로 끌고 와서 앉혔다.

〈예전에 이 자식이 데이트할 때 보드게임 많이 했거든.〉

〈헉. 최 팀장님과 데이트요?〉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라. 콩과 이혼한 전처 말이야.〉

재벌 3세와의 데이트가 의외로 소박했다.

그렇게 시작한 보드게임은 멤버가 조금씩 바뀌면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눈치를 보던 다른 사람들도 보드게임을 빌려 갔다.

사람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보드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은 어느 정도 불안감을 달래 주었다.

S급이 둘이나 있으니 곧 게이트에서 나갈 수 있으리란 믿음은 점차 흐려졌다. 던전의 보스는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지쳐 갔다.

네 명의 상위 헌터들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게이트 내부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몇 날 며칠 동안 헌팅을 이어 가기도 하는 헌터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일반인은 오죽하겠는가.

다른 게이트처럼 마수를 피해 빠져나갈 수 있는 던전도 아니니 정신의 소모와 피로도는 더 컸다. 식수와 식량마저 부족한 상황이다.

보드게임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도 한계는 있었다. 끝내 인내하지 못한 남자 한 명이 언성을 높였다. 인유신과 같이 체력 검사를 받았던 E급 각성자였다.

“언제까지 이런 맛대가리 없는 빵 쪼가리를 먹어야 하는 건데!”

남자는 짜증을 내며 빵 봉지를 내던졌다. 바닥에 부딪힌 빵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금세 먼지로 화하여 사라졌다.

“제대로 찾기나 하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있어 봤자 짐만 되니까 귀찮아서 다 죽기를 기다렸다가 네놈들만 유유자적하게 돌아가려는 거 아니냐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헌터들이 구태여 일반인들을 다 죽이고 탈출할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사흘 가까이 보스도 없는 게이트에 고립되어 있다는 상황은 남자에게서 이성을 앗아 간 지 오래였다.

남자만이 아니라 불안하게 웅크리고 있던 다른 일반인들 사이에도 웅성거림이 오갔다.

“저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는 걸 보니 아직 살 만하네. 손가락 하나 까딱도 안 하고 있는데 밥도 주고 물도 주니까 호강에 겨워서 저 지랄하는 거야. 저런 인간들은 그냥 굶겨야 해.”

같이 보드게임의 룰을 읽던 박승기가 작게 구시렁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혜연이 난감한 어조로 남자에게 손짓했다.

“진정하세요.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땅속이나 물속의 수색도 계속하고 있고, 어쩌면 이 게이트는 특정한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클리어 조건의 하나일 수도 있…….”

“그딴 걸 어떻게 믿어! 네놈들이 우릴 죽일 작정이 아닌지 어떻게 알아!”

“저희가 왜 당신들을 죽이려고 합니까?”

“우리 입에 들어가는 식량이 아까워졌겠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며 남자는 소리를 쳤다. 이곳의 마수들이 소리에 반응했다면 이 일대로 전부 몰려오고도 남을 소란이었다.

인유신이 옆에 앉은 현규하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현규하가 눈을 반개하며 나른히 미소했다.

“불렀어요?”

“저 사람 안 말려도 될까요? 누님이 난감해하시는 거 같아서…….”

“놔둬요. 혜연 누나는 호인이긴 해도 호구는 아니에요.”

햄버거를 다 먹어 치우고 입가에 묻은 무색의 소스를 닦은 공태성도 참견했다.

“아무리 이능부의 공무 헌터들이 허섭스레기들이라도 이혜연이 호구였다면 감당할 수 있었을 리가.”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최진혁도 별반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에 연결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인유신 혼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구경만 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 남자부터 말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혼자 성내던 남자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걸어갔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