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14)

* * *

이곳이 어디지.

인유신은 신음하며 이마를 눌렀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 특유의 어지럼증을 100배쯤 중첩한 듯한 느낌이 골을 울렸다. 토기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눈을 뜬 인유신은 크게 놀랐다.

온통 어둠이었다.

오른쪽도 왼쪽도 위도 아래도 분별되지 않는 절대적 흑암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과연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이 맞나. 눈을 뜬 게 맞나. 죽어 버린 뇌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둠이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만져지지 않는다. 어둠의 감각이 없다. 어둠에 내가 있나. 내가 어둠인가.

상실된 오감이 어둠에 짓뭉개지기 전.

【너무 놀라지 말려무나.】

나직한 여자의 음성과 함께 서서히 감각이 돌아왔다. 연신 헤매는 손가락이 보이고,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발이 보이고, 이윽고 어둠이 보였다.

흑백의 세계처럼 음영 없는 광원이 존재하는 기이한 어둠 속에서,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작은 아가야. 너를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단다.】

어둠과 동화된 긴 옷을 입은 여자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내 머릿속에서 속닥거리던 기시감이 번연히 튀어 올랐다.

그는 이 여자를, 아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여자를…….

【아아, 그때는 이 옷이 아니었지.】

여자가 살짝 주억거림과 동시에 어둠과 동화되었던 옷이 절반은 보석처럼 빛나는 화려한 예복으로, 절반은 너덜너덜하게 꿴 누더기로 화했다.

인유신은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그는 이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 기억이 어린아이의 미숙한 인지에서 쉽게 마모되어 지워질 만큼 아주 오래전에.

여자가 처음처럼 인사했다.

【작은 아가야. 이쪽 세계의 시간으로는 19년 만이로구나.】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운명을 관장하는 세 위(位, 신을 세는 단위)의 신 우르시토아레의 하나란다.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라 불러 주렴.】

“시, 신이라고요?”

허신에 불과하지만 인유신은 신의 파편을 목격한 적이 있다.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그 허신에게는 인간이 비할 바가 안 되는 위압감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 여자,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에게는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존재하는데도 호수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존재감이 투명하다.

‘내가 그 어둠 때문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더욱 혼란에 빠진 인유신의 머리 쪽으로 손을 내민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눈가를 가늘게 접었다.

【작은 아가야, 너는 허신을 만난 적이 있구나. 가여운 아타베이라. 이 몸 또한 진신의 신체가 아니니 네가 오해하는 건 당연하단다. 나는 인간의 세계에 현현한 게 아니라, 너의 오랜 기억에 있는 그림자가 투영되었을 뿐인 존재란다.】

“제 기억이요……?”

【그렇지. 너는 이 공간에서 나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지 않니?】

만났다. 만났던 적이 있다.

게이트. 흑백. 어둠. 어둠. 어둠. 그 너머를 지나. 고귀한 왕의 옷과 초라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자를. 무서워서 오들거리는 손으로 소년의 손을 꼬옥 잡고서. 소년. 그 소년.

“아!”

인유신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저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저보다 키가 훨씬 크고 까만 옷을 입은 남자분인데요……! 머리는 금갈색이고요.”

【왕의 아들을 찾는 것이니?】

“예? 왕의 아들이요?”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가만히 허공의 한편을 눈짓했다. 그와는 대조적인 정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마치 닦아 내듯 어둠이 투명하게 열리고, 현규하의 모습이 보였다.

“규하 씨!”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뿐이었다. TV에 비치는 영상처럼 현규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도 현규하에게 닿지 못했다.

【규하(奎霞), 라.】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이름을 되짚으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저 아이의 어미가 붙인 이름이었지. 아득하게 멀리 있는 별. 닿지 못하는 머나먼 세계를 향한 그리움. 아이에게는 참으로 잔인한 이름이로구나.】

“……규하 씨를 아세요?”

조심스레 질문하는 인유신의 뇌리로 ‘왕의 아들’이라던 그녀의 한마디가 감돌았다. 동시에 떠오른다. ‘뱀파이어 특질’의 이미지가 강렬하여 가려져 있던 현규하의 또 다른 히든 특성이.

왕의 사생아.

일전에 그 특성에 대해 물었을 때는 아버지가 왕이라는 농담 같은 대답만 들었었다. 그래서 더 묻지 못했었다.

【그럼, 알다마다. 나는 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걸? 어미의 태에 아이가 잉태되던 순간, 우리 세계의 모든 신들은 그곳을 보았지.】

요정의 허밍처럼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쓸쓸하게 읊조렸다.

【종말하는 세계를 지탱하는 최후의 주춧돌. 그는 우리 세계 ‘이아드’의 마지막 왕의 유일한 자식이란다.】

규하 씨.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현규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앞도 뒤도, 분별되지 않는 여전한 흑암일 따름이다.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을 리도 없는데…….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하다 하다 이제 환청까지 듣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현규하는 조소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좌표를 띄워 보았다. 인유신의 위치는 보이지 않았다.

‘뭐, 여기에 들어오면 연결이 끊기는 것도 당연하겠지.’

게이트 밖의 전파가 게이트 안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 흑암 역시 세계를 나누는 경계다.

‘이아드……. 역시 여기에서는 발음이 안 깨지는군.’

고요히 멸망한 세계의 단편. 준비되지 않은 게이트의 우두머리. 전부 19년 전의 그가 겪었던 게이트다.

그러니 이 흑암 또한 ®ÀÇ, 즉 이아드의 피가 깃든 그나 펜던트가 없다면 진입할 수 없는 경계선이었다. 인유신의 진입은 불가하다. 애초에 혼자 마수들 틈을 지나 여기까지 올 수도 없을 테고.

현규하는 눈을 얼마간 감았다가 떴다. 시야가 밝아지고, 눈앞에는 개와 인간이 반반씩 섞인 괴이한 형상의 생물체가 킬킬 웃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키르륵……! 와앙, 왕의 아드을……! 기다렸, 어.”

“입 닥쳐.”

현규하는 뒤틀린 두 개의 구강으로 어눌하게 웅얼거리는 그에게 싸늘하게 일갈했다.

“생긴 꼴을 보니 커프크니로군. 최초의 인간 정도는 되어야 경계선을 넘을 수 있겠지.”

창세신 둠네제울과 악신 네쿠라툴이 함께 만든 최초의 인간, 커프크니는 알아본 게 기쁘다는 듯 다섯 개의 눈알을 굴리면서 끼루룩 웃었다.

“입 닥치라고 했지.”

현규하는 그대로 총을 꺼내 쐈다. 탕. 탕. 탕. 붉은 피와 살점이 튀었다. 총성의 반향까지 어둠에 먹힌 뒤, 연이어 총알에 격중당한 커프크니는 멀쩡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카륵! 인간의 무기로, 안 죽……는다!”

“그건 알아. 그래 봬도 오래 묵어서 반신에 가까운 존재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다섯 개의 눈알에 당혹감이 서렸다. 총구는 이제 커프크니가 아니라 현규하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정말 짜증 나. 남의 인생을 멋대로 휘두르는 거로도 부족해서 또 왜 튀어나온 건데? 짜증 나고, 귀찮고, 싫증 나고, 지긋지긋하고, 진저리나서 전부 손 놓고 그냥 뒈져 버리고 싶어. 죽으면 적어도 마음은 편하겠지.”

“캭! 죽으면 안, 왕의 아들!”

“용건은 그게 전부인가?”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트리거를 당겼다. 타앙!

한 줄기의 초연이 흩어지고, 가까스로 그의 손을 붙잡아 총구를 틀어 자신을 쏘게 한 커프크니가 피에 젖은 입을 다급히 움직였다.

“왕! 기다리고 있다……! 캬릇! 왕의 아들이 오기를!”

“20년 동안 열쇠를 반 정도 모았으니 앞으로 20년 더 기다리라고 해.”

“그 전에 이아드는 멸망한다. 키르르.”

“내 알 바 아니야.”

“킷! 이게 도움이 된다, 했다.”

커프크니가 손을 내밀었다. 현규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것과 같은 색을 띤 하나의 눈알이었다.

“누구 눈알이지? 아버지가 멀쩡한 자기 눈깔을 뽑아냈을 리는 없을 거 같고, 고모인가?”

“키르륵. 죽은 왕의 눈이다.”

“고모 눈알이라는 거군.”

현규하가 냉소하며 호박색 눈알을 받았다.

“살아생전 모습은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시체 조각들로만 계속 인사하고 보게 되네요, 고모.”

그대로 눈알을 으스러트려 터트렸다. 눈알은 한 줄기 핏물로 화해 펜던트에 빨려들듯 사라졌다. 호박색의 광채를 발한 펜던트는 이윽고 종래의 핏빛으로 출렁거렸다. 이전보다 핏빛이 짙어진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현규하는 무심하게 아공간에 펜던트를 던져 넣었다.

“용건은 이게 끝인가.”

대답은 들을 필요 없었다.

신인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조차 세계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인식에 달하기 위해 존재의 손상을 감내해야 했다.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커프크니의 육신은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커프크니는 단 하나, 왕의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영원한 소멸을 감수하고 세계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그 소멸 역시 현규하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너, 내 짝에 대해 아는 거 있나? 지금까지 전혀 짚이는 게 없었는데 얼마 전에 갑자기 나타났어. 대체 나에게 뭐지?”

“왕은, 우리는…… 기다린다! 캬르르! 왕의 아들을!”

커프크니는 끝까지 제 할 말만을 하고 소멸했다. 되돌아온 흑암 가운데에서 현규하는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옅은 색조의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 가늘게 빛나는 듯하다가, 이내 스러졌다.

못내 혼란스럽다. 왕. 왕의 아들. 멸망하는 세계. 그게 전부 무엇인지. 어째서 현규하가 연관되어 있는지.

【어렵다는 표정이로구나.】

그의 심정을 안다는 것처럼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정적인 고요한 시선을 누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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