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14)
  • 그게 현규하에게 정말 옳은 방향일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소극적인 자살에 앞서, 정말 죽음을 방조하는 게 제 진심인지 스스로를 들여다볼 한 호흡의 여유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떻게 할지 떠올려야 하니 조금 더 골치 아파해 볼게요.”

    현규하가 인유신의 머리 밑으로 팔을 넣어 베게 하며 품에 당겨 안았다. 두근, 두근, 두근. 삶의 증거인 완만한 박동 소리가 인유신의 심장 소리에 겹친다.

    “당신을 위해 죽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안 할 테니까 안심해요. 오늘 테스트도 하고 여기서도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을 텐데 얼른 자요.”

    “규하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길이 아이를 재우는 것처럼 상냥하다. 인유신은 완만하게 이어지는 그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 속으로 스르르 빠졌다.

    * * *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깼을 때, 변함없는 하얀 하늘이 그를 비추고 있었고, 현규하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설마.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인유신은 불안하게 수런거리는 가슴 위를 누르면서 침착하게 심호흡했다. 아직 그와 영혼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

    “현규하를 찾는 거라면 그놈은 잠이 안 온다고 운동장 밖으로 나갔다.”

    나직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해서 고개를 돌리니 비뚜름하게 팔짱을 낀 공태성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행들을 2미터가 넘는 높이의 하얀 불길이 둘러싸고 있었다.

    “벌써 길드장님의 교대 시간이에요?”

    “곤히 자더군. 뭐라도 먹겠나?”

    색이 없는 빵을 한 입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니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배는 주렸다. 이런 곳에서 입맛에 안 맞는다고 고집부리다가 굶어 죽는 것처럼 가치 없는 죽음도 없겠지.

    인유신은 아까 먹다 남긴 빵 봉지를 가져와서 억지로 꼭꼭 씹어 삼켰다. 여전히 끔찍할 정도로, 아무 맛이 나지 않는 기괴한 식감이었다.

    그 옆에서 공태성도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속 재료는 차이가 있지만 맛은 똑같이 없을 것이다.

    “침식 게이트의 마수는 요리해서 먹을 수도 없지. 식량과 식수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보스는 아직도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거예요?”

    “최진혁이 아까 한 바퀴 돌고 왔다만, 이 정도로 뒤져 봐도 보이지 않는다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나타날 가능성도 있지. 최악의 가정은 공략 방법이 없는 게이트란 거고.”

    어깨를 으쓱하고 남은 샌드위치를 전부 입에 털어 넣은 공태성이 손의 부스러기를 툭툭 털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도 냉정을 회복한 그의 정신은 현규하와는 다른 의미로 단단해 보였다.

    인유신도 억지로 꾸역꾸역 삼킨 뒤 물을 조금 마셔 입가심했다. 너무 세게 쥐었다가는 물통째로 먼지로 화할 수도 있기에 조심조심 입을 대야 했다.

    “용건이 있는데 소화도 시킬 겸 잠깐 걷지 않겠나?”

    “여기를 비우셔도 돼요?”

    “어지간한 마수는 저 불길이 처리해 줄 거다.”

    확실히 그건 그랬다. 인유신은 머리 위의 높이까지 이글거리는 불길을 살짝 바라보았다.

    공태성이 앞장서자 불길은 딱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만 갈라졌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하지만 불길을 넘는 마수의 접근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섰다.

    인유신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별로 접점도 없던 사람이다. 자신에게 할 말이 뭘까.

    “꼬맹아.”

    갑자기 꼬마 소리를 들은 22살 청년은 반사적으로 욱했지만 그와의 나이 차이를 떠올리고는 곧 수긍했다. 공태성이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띠동갑은 넘을 테니까 꼬마 맞다.

    “구구절절 말을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니, 용건부터 말하마. 현규하를 떠나 나에게 오지 않겠나?”

    “……?”

    “재력이든 권력이든 그 녀석에게 뒤지지 않으니 지금 네가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부족하진 않을 거야.”

    “……?”

    인유신이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당혹감으로 얼굴이 빨개지는 건 1초면 충분했다.

    “지금이야 이혼하셨지만 헌터님은 예전에 여자랑 겨, 결혼도 하지 않으셨어요?”

    “음? 내가 이혼한 게 무슨 상관이지?”

    “설마 이혼 사유가……. 아, 아니! 설명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저를 조, 좋게 봐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는 이성애, 아, 아니!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해하는데 20초의 시간이 필요했던 인유신과는 달리 공태성은 2초 만에 알아들었다. 그리고 2초 동안 어이없어했다가 왈칵 언성을 높였다.

    “누가 너처럼 핏기도 가시지 않은 애새끼한테!”

    “그, 그럼 위장 결혼한 게이는 맞다는 거예요? 어떻게 재벌 3세와 위장 결혼을! 후환이 무섭지 않으셨어요?”

    “아니야!”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피력한 공태성은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씨발. 진짜 왜 현규하 같은 새끼와 만나고 다니는 줄 알겠군. 둘이 아주 똑같아.”

    어쩐지 그 한마디로 공태성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욕을 들은 거 같은 기분이었다.

    겨우 진정한 공태성이 이를 갈듯이 뱉어 냈다.

    “현규하가 너와 만나는 목적이 있을 게 아닌가. 목적을 위해 너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테고. 그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이상의 대우를 해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나르샤 길드에 저를 스카우트하시려고요?”

    “스카우트라는 형식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대우해 주지.”

    애인 있는 남자에게 플러팅하는 게이라는 오해는 풀렸지만 들을수록 아리송했다. 그렇지만 랭킹 2위에, S급 헌터에, 대형 길드의 길드장에게 대놓고 뭔 생각이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소심하게 쿠션을 깔았다.

    “말씀하시는 게 꼭 길드장으로서가 아니라, 공태성 헌터님 개인으로서 제가 필요하다는 뜻 같은데요……. 왜 필요하신지는 모르겠지만요.”

    “맞다.”

    “그런데 아까 제가 그랬듯이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오해하기 쉬운 상황 같아서요. 규하 씨만큼 길드장님도 유명하시잖아요. 규하 씨랑 제가 한 번 깨졌다가 다시 만나고 있다는 것도 목격자들 때문에 하루 만에 인터넷에 소문이 날 정도인데…….”

    현규하와 치정 관계로 대립한다는 루머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감당할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인유신은 힐끗거렸고,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지 공태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게다가 이건 길드장님이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요……. 저는 무슨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사귀는 게 맞아요.”

    “……현규하와 정말 연애질을 한다고? 그 인성 파탄자 새끼와?”

    “규하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이전까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꼼지락거리던 목소리가, 이 한마디를 할 때만큼은 또렷했다. 현규하는 입에 필터가 없고, 제멋대로에다가, 나쁜 평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서 저와 만나는 사람이 인성 파탄자라는 욕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처음으로 나온 단호한 반응에, 공태성은 한쪽 눈썹을 꿈틀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방금 발언은 사과하지. 하지만 현규하는 인간 불신으로 워낙 유명한 놈이니 다른 의도 없이 사귀고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심정도 이해해 준다면 좋겠군. 강석우 박사를 알고 있나?”

    “아니요.”

    “게이트학자다. 네 친구라는 녀석이 게이트학 전공이라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공태성은 명함을 꺼내 뒷면에 강석우의 이름을 적은 뒤 건넸다. 명함까지 거절할 수는 없어서 얌전히 받았다.

    “현규하가 너에게 금전적 대가를 주지 않는 게 사실이더라도, 내가 충분히 대우해 줄 수 있으니 마음이 바뀌거나 궁금한 게 생기면 연락하도록.”

    “길드장님 같은 분이 저를 왜 필요로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뭐 특별한 각성 능력도 없는데…….”

    “널 빼내면 현규하를 엿 먹일 수 있을 테니까.”

    “…….”

    진의를 얼버무리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부정하기 힘든 이유였다. 인유신은 슬쩍 말문을 돌렸다.

    “강석우 박사님은 어떤 분이시길래요?”

    “현규하를 자식처럼 키워 준 양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서 명함에 적힌 이름을 다시 훑었다. 다행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두 여읜 현규하였지만 의지가 되어 주는 사람은 있었던 모양이다.

    공태성이 느린 어조로 말을 뒤이었다.

    “그리고 14년 전, 현규하에게 죽었다.”

    사람 하나만 들락거릴 수 있도록 틈을 터 놓은 하얀색 불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규하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다.

    서로 보이지 않을 때 늘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현규하였는데, 이번에는 입장이 바뀐 거 같다.

    주머니에 든 독의 정수를 만지작거리던 인유신은 결심했다.

    ‘일단 찾으러 가 보자. 최 팀장님에게 받은 독의 정수도 있으니까 마수랑 맞닥뜨려도 도망칠 틈은 벌 수 있을 거야.’

    인유신은 밖을 둘러보러 나간 이혜연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가려고?”

    “네.”

    “같이 가 줄까?”

    “방금 마수들 처리하고 오셨잖아요. 금방 갔다 올게요.”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화장실을 아예 안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헌터들은 마수의 리젠 타이밍을 계산해서 운동장 한쪽의 간이 화장실까지 가는 길은 틈틈이 정리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슬쩍 옆으로 빠졌다.

    헌터들이 전부 운동장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현규하의 행적을 찾는 건 쉬웠다.

    침식 게이트 내의 마수는 사냥당해도 사체가 남지 않는다. 마수의 잔해는 서서히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러니 인유신은 운동장 외부에 있는, 아직 흡수되지 않은 마수의 잔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관중석에 앉아 한참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지 근방에 유독 마수의 잔해가 많았다. 잔해는 다시 이어졌다. 관중석의 계단을 따라. 1층의 복도를 지나. 주차장을 지나. 밖으로. 밖으로. 흑암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의 단면으로.

    완전한 어둠과 마주 서 있는 현규하의 등이 보였다.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낸 현규하의 손아귀가 핏빛으로 빛나는 동시에 그가 발을 성큼 내디뎠다.

    “규……!”

    규하 씨, 하고 부르기도 전에 훤칠한 뒷모습은 암흑 너머로 사라졌다.

    “규하 씨!”

    뒤늦게 부르며 쫓아갔지만 현규하의 모습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저 암흑으로 빨려 들어간 걸까. 당황하여 흑암의 단면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색채가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인유신은 흑암을 만질 수조차 없었다. 이 경계는 단순히 흑과 백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 세계의 단절이었다.

    ‘어, 어떡하지? 누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나?’

    당혹감에 젖어 허둥지둥하며 등을 돌린 인유신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마수가 생성되어 있었다.

    “으악!”

    독의 정수를 꺼내 던졌다. 정수가 깨지며 인체에 무해한 독무가 자욱하게 번지고, 마수는 비정형의 육신을 괴롭게 뒤틀며 녹아내렸다.

    요행히 한 마리는 퇴치했지만, 그 너머에 또 한 마리의 개체가 독무가 닿지 않는 자동차 위에서 날카로운 촉수를 뻗었다. 반사적으로 굴러서 촉수에 꿰이는 신세는 면했지만, 뺨에 상처가 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등이 흑암의 단면에 턱 부딪혔다.

    피부를 길게 그은 촉수로 인해 피가 흐르고.

    한 방울의 피가 세계의 경계에 튀고.

    흑암이 인유신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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