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연이 검지로 운동장 바닥을 가리켰다. 미간을 찌푸리며 공태성이 말을 받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또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게 문제로군.”
“동생이 이 센터에 테니스를 치러 다녔던 적이 있어서 예전에 알아봤었는데, 지하 대피소는 없다.”
스멀스멀 형상을 갖춰 가는 마수에게 독 비수를 던지며 최진혁이 가정 하나를 부정했다.
“대피소가 아니라면 지하철 노선이 뚫려 있을 가능성으로 기우는데……. 진혁아, 그건 모르지?”
“거기까지는 몰라.”
“뭐가 있든 파 봐야겠군.”
마수 세 마리를 동시에 불태운 공태성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일행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부외자처럼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현규하가 뒤늦게 눈길을 느끼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만약 노선이 뚫려 있다면 철로의 너비를 고려했을 때 확실히 운동장은 지나갈 거야.”
이혜연의 의견에 일단 운동장부터 파기로 했다. 갈라진 지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흙을 퍼 나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현규하는 별말 하지 않고 갈라진 틈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 파고 나면 칭찬해 주세요, 라고 꼬리 흔들 줄 알았는데 웬일로 조용하네.”
그사이에 두 사람의 관계를 꽤 파악하게 된 이혜연이 짓궂게 말했다. 긴장을 풀라는 의도라는 걸 알고 있는 인유신은 어색하게 미소했다.
현규하가 땅을 파는 와중에도 다른 헌터들은 주변을 경계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흙은 구멍 아래에서 척척 올라와 옆에 쌓인다. 인유신은 불안하게 웅성거리는 일행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쌓여 가는 흙을 바라보았다.
“인유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느라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깨를 툭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같이 산 게 10년이 넘는데 네 표정을 내가 모르겠냐?”
박승기가 투덜거리며 옆에 털썩 앉았다.
“계속 영상 찍던 건 어쩌고?”
“배터리 다 닳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보조배터리도 갖고 오는 건데 아까워 죽겠네.”
구시렁거리며 흙바닥을 짚는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색채를 잃은 인조 잔디가 뭉개졌다.
“네가 또 무슨 생각으로 삽질하는지 맞춰 볼까?”
“…….”
“게이트에 잡혀 들어온 게 너 때문이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인유신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사실이잖아. 날 응원하러 온 게 아니었으면 너도 규하 씨도, 혜연 누님도 최 팀장님도 전부 휘말리지 않았을 거야.”
“야. 나는 빼 주라. 게이트학자가, 아니 나는 아직 학사 학위밖에 없지만 아무튼 게이트 안에서 죽는다는 건 오히려 업계 포상이라고. 행복사라 이 말이야.”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단호한 손짓으로 박승기가 인유신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정말 아프게 때렸다.
“넌 다 좋은데 삽질하는 게 문제야. 네 말대로라면 이 시험을 치게 된 이유 자체가 현규하 때문인데, 근본적인 원인은 저 사람한테 있는 거 아니야? 더 파고들면 이번 체력 검사 장소를 여기 체육 센터로 정한 담당자 잘못도 있겠네.”
“…….”
“사람들이 휩쓸린 게 네 탓이라는 건 바로 그런 말이라고.”
인유신은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침묵했다. 변함없이 울적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 박승기는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것도 너 때문 아니야.”
그리고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다.
땅을 깊이 파는 현규하를 보는 인유신의 눈은, 차라리 그 깊은 구멍으로 몸을 내던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100미터 깊이로 두 곳의 구멍을 더 파 봤지만, 지하철 노선도, 던전 보스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다시 머리를 맞댔으나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매점은 있다고 했지? 우선 식량과 식수부터 확보하자.”
이혜연의 그 말은, 게이트에 장시간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매점에서 밀봉된 식량과 식수를 챙겨 오고, 센터에서 수업에 이용하는 매트 등을 가져와 운동장에 깔았다.
그 과정에도 마수들의 습격을 처리해야 했다. 지금은 괜찮지만 헌터들의 마나와 체력도 언젠가는 바닥이 날 것이다.
매트와 담요의 수도 부족하고 헌터들의 휴식도 필요하다. 일행은 각각 현규하, 공태성, 이혜연, 최진혁을 중심으로 한 네 팀으로 나누어 교대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밤낮이 없는 하늘은 변함없는 광도였기에 눈을 감아도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식사는 했어요?”
나긋한 목소리에 이끌려 눈을 떠 보니, 팔을 괴고 옆으로 누운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인유신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빵을 한 입 먹어 봤는데 식감은 변함없는데도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게 이상해서 더 먹지는 못했어요. 아직 견딜 만하니까 사치스러운 얘기를 하는 거 같기도 하지만요. 규하 씨는요?”
“입맛이 없어서 물이나 좀 마셨어요. 춥지는 않죠? 옷 더 꺼내 줄까요?”
“괜찮아요.”
주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낮게 속닥거리던 대화는 애매하게 끊어졌다.
잠은 오지 않는데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유신은 잠자코 시선만을 옆으로 움직였다. 드러누운 채 하늘을 응시하는 현규하의 옆모습은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저희가 게이트에 휘말렸다는 건 밖에서도 알고 있겠죠?”
“한두 명도 아니고 대낮에 수십 명이 사라졌으니 목격자도 많을 거예요. S급도 둘이나 휘말렸는데 나가지 못하고 몰살당하면 난리가 나겠네요.”
얇은 조소가 입꼬리에 가늘게 맺혔다.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 거론하는 어조는 장난처럼 가볍다. 농담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조소에서, 인유신은 오히려 그의 내면의 한편을 엿본 것 같았다.
그에게는 정말 가벼운 것이다. 죽음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여기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은 꼭 던전 밖으로 보내 줄 테니까요.〉
그렇게 말했었던 현규하를, 인유신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던전 보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드러난 이후 현규하는 침묵한다. 자신의 죽음은 쉽게 포기해도 인유신을 살릴 궁리는 하던 현규하는 이제 그의 생존도 언급하지 않는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바라보는 광경은 소극적인 자살인가. 적극적인 자살인가.
인유신은 제 불안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차분히 숨을 골랐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세요?”
눈동자만이 옆으로 움직여 인유신을 향했다. 보석을 녹인 것처럼 선명한 앰버색의 홍채에 비치는 제 얼굴이 비교적 평소와 비슷해 보여 인유신은 안도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어서요.”
“음, 역시 주인님은 못 속이겠네.”
현규하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에요. 지난번 던전에서는 유신 씨가 도와준 덕분에 찾으려던 것도 일찍 발견할 수 있어서 조금 의욕이 살아나려던 참인데……. 또 나를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놀려고 하니까 짜증이 확 나는 거 있죠.”
“…….”
“그냥 다 때려치우고 머리에 총알이라도 박을까 계속 고민하던 참이에요.”
가볍다, 역시. 그에게 죽음은.
바람이 불지 않는 흑백의 세계에서 무게감이 없는 그의 말이 허위허위 아래로 추락했다. 인유신은 추락한 말의 파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요.”
다시 몸을 옆으로 돌려 인유신을 바라보는 현규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내가 죽으면 아마 이 게이트도 정상으로 돌아와서 어딘가에 보스가 나타날 테니까요. 공태성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혜연 누나나 최진혁도 있으니까 어렵잖게 클리어할 수 있을 거예요. 유신 씨는 안전하게 돌아가면 돼.”
“……그럼, 규하 씨는요?”
“시체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요. 죽은 뒤에 시체를 태우든 묻든 게이트 안에 버리든 무슨 상관이람. 오히려 내가 죽는다면 테이밍도 해제될 거고, 당신도 귀찮은 스토커의 수작질을 받아 줄 필요도 없고, 딱 좋아. 생각해 보니 자살이 테이밍을 해제할 가장 빠른 방법이었네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최선의 방법을 찾았다는 듯 진심으로 유쾌하게 속삭임을 이어 가는 현규하의 손을 꼭 잡았다. 평소보다 아릿하게 높은 체온이 손바닥을 쑤셨다.
“규하 씨는 정말,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인유신은 현규하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온전히 모른다. 삶과 죽음을 그와 논하는 건 표피만을 긁어 대는 어쭙잖은 말장난에 불과할 터였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에 묻는다.
“저는 사람의 생명은 평등하지 않고 차등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만 해도 별것도 아니었고 남은 인생도 비슷하게 별것도 아닌, 흔해빠진 그저 그런 인생을 살다 죽겠죠. 승기처럼 머리가 좋아서 학문적인 영역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각성 능력도 겨우 햄스터를 잘 키우는 것뿐이고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현규하의 얼굴에 번졌다. 인유신은 14년간 가슴에 담고만 있던 지독한 회한으로 인한 오랜 숙고를 느릿느릿 털어놓았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아비규환이었던 당시의 혼란과는 다르지만, 생명의 위협이라는 위험만은 동일한 시간.
〈왜 너 같은 게! 하필 네가 살아서!〉
인유신은, 지금도 그때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혹시 저 같은 걸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살할 생각이시라면, 그러지 마세요. 저는 규하 씨가 자살의 명분으로 삼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만약 이 게이트가 누군가의 목숨을 희생해야 클리어되는 장소라면, 인유신은 주저하지 않고 자살하였을 자신을 안다. 이것은 고귀한 이타심이나 거룩한 희생정신이 아니다.
생명에는 차등이 있으므로, 보잘것없는 평범한 사람의 목숨 하나로 헌터 여럿을 갈음하여 살릴 수 있다면, 그때 죽지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온 이유가 비로소 증명되는 게 아니겠는가. 돌아가신 그분들의 죽음에도 의미가 부여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게이트는 생명을 추로 하여 움직이는 장소가 아니기에.
“……내 자살을 막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규하 씨가 얼마나 힘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제가 죽지 말라고 붙잡는 건 한편으로는 잔인한 행동 같기도 해요.”
인유신은 그를 대신하여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구차한 삶의 종막에서 조금이라도 가치를 더 끌어내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현규하가 쓴웃음을 흘렸다.
“자살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럼 죽으라고 등이 떠밀리다니 굉장히 신선하고 짜릿한 경험이네요.”
“그,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알아요. 당신이 나를 붙잡지 못하겠다는 의미라는 건.”
인유신으로는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현규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유신이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기색을 드러내면 그의 영혼에 얽매여 있는 테이밍의 제약이 행동을 뒤틀 것이다.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