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진짜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네요.”
“그래서 침식 게이트는 아예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게 최고의 공략이에요. 마수들 수준이야 고만고만하지만 환경이 최대의 적이거든요. 클리어 보상도 생존했다는 것 하나뿐이죠.”
매점을 나와 국궁장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현규하의 손에 정리된 마수는 많았지만 던전 보스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나르샤 길드장님 쪽에 있나 봐요.”
“기왕이면 공태성이 잘난 척하면서 저 혼자 보스 잡았으면 좋겠군요. 여기 보스는 정신 공격을 하는 게 귀찮은 데다가 물컹물컹해서 나랑 상성이 별로 안 맞아요.”
하긴 일정 부분 동물의 형태를 띤 다른 마수들과는 달리, 침식 게이트에서 출몰하는 비정형의 마수들은 슬라임이나 액체 괴물에 가깝긴 했다.
운동장으로 나오니 곳곳에 마수의 잔해가 보였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듯했다. 때마침 공태성도 탐색을 끝냈는지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다가 문득 칼을 크게 휘둘렀다. 칼날에서 하얀색의 불꽃이 화르륵 피어오르며 뒤에서 습격하던 마수를 불살랐다.
“우와.”
“…….”
무심코 감탄하자 현규하가 빤히 쳐다보았다. 인유신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검기 발사가 더 멋있어요.”
“당연하죠.”
“아무튼 길드장님이 발견하셨을 테니까 던전에서 나갈 수 있겠네요.”
음영 없는 흑백의 세상을 불사르는 백색의 불꽃은 신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성대도 입도 없는 비정형의 검은 마수는 단말마도 없이 고요히 백색 불꽃에 살라 먹혔다. 하얀 허공에서 하얀 불꽃의 파편이 하얗게 춤을 춘다.
근처의 마수들을 정리하는 공태성의 칼끝에서 불꽃이 노닐었다. 염제라는 별명이 이유 없이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절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그런 인유신을 보던 현규하의 시선이 가느스름해지더니, 그의 어깨를 짚었다.
“유신 씨.”
“네?”
“불은 푸른색일 때가 가장 온도가 높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흰색은 그 아래의 온도예요.”
“……?”
“저놈은 각성 능력까지 콩 라인이라는 뜻이죠.”
“아…….”
그제야 현규하의 말을 이해한 인유신은 마지막 마수를 태우고 걸어오는 공태성을 곁눈질했다. 들었을까. 듣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 같은데 표정을 보니 이미 들은 듯했다.
“내가 파이로키네시스를 각성했다면 당연히 푸른색 불이었을 겁니다.”
“그으렇, 겠죠…….”
불로 마수가 아니라 현규하를 태워 버리고 싶어 하는 공태성의 표정에 인유신의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여기에서 싸우면 안 될 텐데…….
다행히 성격은 다혈질이어도 상식인인 공태성은 노려보는 거로 끝냈다. 노려보는 와중에 그의 눈길이 스친 얼굴이 왠지 따끔거리는 거 같다.
“던전 상태를 보니 보스를 발견하고도 꽁무니를 뺀 모양인데, 주둥이만 살아서 잘도 나불거리는군.”
인유신은 생각을 정정했다. 약간은 덜 상식인이었다. 먼저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건 사람이 현규하니 할 말은 없지만.
“남 말하네. 불로 태우지도 못하고 보스를 놓친 주제에 뭐라는 거야?”
“보스는 없었다.”
“서쪽에도 없었는데.”
“…….”
서쪽에도 없으며 동쪽에도 없는 던전의 보스.
순간, 고요한 정적이 쿵 내려왔다.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다가오던 이혜연의 당혹한 음성이 운동장을 울렸다.
“지금 그러니까……. 던전 보스가 어디에도 없다는 거야?”
“말도 안 돼! 보스가 없는 던전이라고? 그런 건 들어 본 적이 없어!”
공태성의 경악성에 최진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보스가 없어서 침식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
“…….”
신나게 마수의 잔해를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하던 박승기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럼 어떻게 보스가 없는 던전을 클리어해서 나가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이혜연이 혼란에 빠진 얼굴로 이마를 눌렀다.
“경우의 수를 전부 열어 두고 생각해 보자고. 혹시 센터 구조도 같은 거 가지고 있는 사람 없어?”
“제가 아까 탐색할 때 사진을 찍어 놨어요.”
인유신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 화면에 체육 센터 전체의 안내도 사진을 띄운 이혜연은 현규하와 공태성에게 질문하며 하나씩 체크했다.
“전부 둘러본 건 맞다는 거네……. 이렇게 하자. 너희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 교차 검증이 필요할 거 같거든?”
“알았다. 현규하가 탐색했던 서쪽을 다시 보고 오지.”
“…….”
현규하도 아무 말 없이 공태성과 같이 다시 일어나 주경기장으로 걸어갔다.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인유신을 동행한 두 번째 탐색 또한 서쪽 구역을 둘러보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길을 걸으며 탐색하고, 마수가 나오면 중압으로 터트려 죽였다.
하지만 현규하의 모습은 종전과 달랐다. 보스가 없는 게이트라는 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갑자기 말수가 확 줄었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일까.’
현규하는 인유신을 안전하게 보호한다. 그것은 거의 절대에 가까운 명제지만, 이곳처럼 클리어할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 던전에서도 그 명제가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
가슴이 시큰하게 아프다.
게이트가 열린 건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문제지만 하필이면 게이트가 열린 장소와 시각에 현규하가 머무른 이유는…….
“아야.”
갑자기 현규하가 걸음을 멈췄다.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서 걷던 인유신은 그의 등에 얼굴을 콩 부딪치며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옆구리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본 인유신은 신음을 삼켰다. 옥상 풋살장의 안전 펜스 너머로 체육 센터 밖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흑백의 색채조차 없는 완전한 흑암이었다.
하얀 하늘을 칼로 잘라 지배하는 것처럼, 빛까지 빨아들이는 듯한 새까만 어둠이 그곳에 있었다. 반절은 게이트 내부에, 반절은 암흑에 먹혀 두 동강이 난 도로의 자동차와 가로수가 섬뜩하다.
저 어둠이 흑백의 색채조차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 버릴 것만 같은 한기에 인유신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규하 씨.”
입술을 떼자마자, 때로는 부르기도 전에 돌아보던 현규하의 시선이 그를 향하지 않는다. 음영이 없어 더욱 붉어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는 흑백 세계 너머의 어둠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한이 다시금 날카롭게 긁고 지나간다.
완전한 흑암보다, 저 흑암을 홀린 것처럼 응시하는 현규하의 삭막한 표정이 더욱 무섭다.
“……규하 씨.”
두 번째 부름에야 겨우 돌아본 눈동자는 마치 인유신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허공을 배회하다, 느리게 떨어졌다.
“왜 그래요?”
“옥상에도 없는 거 같으니까 우리 내려가요.”
저 흑암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현규하의 걸음이 천천히 떼어지고, 새까만 암흑 앞에서 등을 돌렸다.
‘내가 당신을 불안하게 했나요?’
평소였다면 으레 들려왔을, 농담인 듯 진심인 듯 장난기가 섞인 모호한 목소리도 없이.
말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현규하의 기척을 느끼며 인유신은 실감했다. 그를 알게 되었을 무렵처럼 무섭지도 않고, 시시덕거리며 농담도 주고받고, 서로의 집도 알고, 놀러 가서 하룻밤 자기도 했다. 어쩌면 친구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규하가 사소한 언행 하나를 거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을 감싸는 공기가 달라졌다. 그와 자신을 엮은 인연의 줄은 절대적인 동시에 터무니없이 얄팍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현규하가 마음만 먹으면 그와의 관계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니 아예 만나지도 않았던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교류하여 쌓은 진심이 아닌, 테이밍으로 인한 강제적 결합일 뿐이니까.
동쪽 구역에 던전의 보스는 없었다. 공태성이 다시 둘러본 서쪽 구역도 매한가지였다. 헌터들도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니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 없었다. S급 헌터들과 동행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일행들에게 금세 짙은 불안감이 번졌다.
공태성이 초조감이 묻어나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보이는 곳에 없으면 하늘 높이 솟았다는 건가?”
“하늘에 애드벌룬이라도 떠 있으면 정말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긴 하겠는데…….”
하늘은 여전히 하얗게 비어 있다.
“태성아. 너 6년 전에 독일인가 미국에서 침식 게이트에 휩쓸렸던 적이 있었잖아. 며칠 걸렸다고 들었는데 그때는 어땠냐?”
공태성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으나 그 흔들림은 일행의 누구도 포착하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흩어졌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침식 게이트였지. 다만 면적이 도시 전체였던지라 보스를 수색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빠져나오는 게 늦었을 뿐이다. 이번 경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
“으음, 찾기 어려웠을 뿐이라면 여기와는 확실히 다르네.”
인유신은 여전히 침묵하는 현규하를 곁눈질하며 조심스럽게 한 손을 올렸다.
“출입이 금지된 구역 같은 건 없을까요? 아까 안내도를 찍을 때 보니까 5년 전에 리뉴얼 공사를 했다고 하던데 공사하면서 밀폐된 공간이 있다거나…….”
썩 자신 있는 의견은 아니어서 말은 점점 기어들어 갔으나 일행들은 주의 깊게 들었다.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 유신이 의견처럼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다. 그런데 공사 도면이나 옛날 구조도 같은 걸 어떻게 구하지?”
“본관 건물에 노트북도 몇 개 있었어요. 혹시 파일을 보관하고 있던 사람은 없을까요?”
“그 노트북들이라면 나도 본 기억이 있다. 찾아오마.”
공태성이 노트북을 전부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도 현규하는 바깥쪽을 보며 앉아 있었다. 인유신은 관중석에 가로막힌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어둠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노트북들의 배터리는 넉넉했다. 살짝만 힘을 줘도 먼지처럼 스러지는 키보드를 조심조심 터치하며 폴더를 뒤진 끝에 리뉴얼 전의 구조도와 대략적인 설계도를 찾아냈다.
그렇지만 던전 보스가 은신해 있을 만한 비밀스러운 공간은 없었다.
“죄송해요.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요.”
“아니야, 네 말에 일리는 있어. 지상에도 하늘에도 없으니 땅 밑에 있겠지. 예를 들어……. 이 밑으로 지하철 노선이 지나간다거나? 대피소가 있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