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요.”
현규하가 바닥이 갈라지며 돌출된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질 뻔한 인유신을 부축했다. 발에 차인 보도블록 조각이 크레바스처럼 깊이 갈라진 틈으로 떨어졌다. 틈이 얼마나 깊은지, 톡톡 구르며 떨어지던 타일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옆구리에 그를 낀 현규하는 갈라진 바닥을 훌쩍 도약하여 단번에 본관 입구에 도착했다.
인유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트색이었던 건물의 외벽을 만져 보았다. 거칠게 삭은 표면의 일부가 바스러졌다. 살구색의 손만 남겨 두고 배경을 흑백으로 편집한 것만 같은 이질적인 풍경이 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본관 입구의 유리문은 산산이 깨져 있었고, 계단도 절반이 허물어졌다. 매끈하던 계단 난간도 페인트가 벗겨져 검붉은 녹물이 흘렀다.
“부실 공사는 안 했는지 비교적 튼튼해 보이는군요. 무너질 염려는 없겠습니다.”
만에 하나 건물이 붕괴하더라도 현규하가 있다면 안전할 터다. 인유신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채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태양이 뜨지 않은 실외와, 광원 하나 없는 실내는 똑같은 밝기였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못하는 발이 적막한 복도를 뚜벅뚜벅 걷는다. 엘리베이터는 반쯤 열린 채 1층에 정지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버튼을 눌러 봤지만 반응은 전혀 없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려던 순간에 게이트가 침식한 걸까요?”
“문이 닫히려던 순간일 수도 있고요.”
중앙 계단 옆에 건물 안내도가 붙어 있었다. 필름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손상되었지만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이었다.
혹시 몰라서 인유신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이 현규하가 안내도를 손등으로 툭 쳤다.
“지하를 먼저 보고, 올라오면서 훑으면 되겠네요.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머리칼을 헤집는 손끝이 부드러웠다.
다행스럽게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날듯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주변을 둘러보며 난간에서 허리를 굽힌 현규하가 혀를 찼다.
“지하는 망했네요.”
인유신도 살살 따라가 옆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잉크를 쏟은 것처럼 새까만 물이 계단 아래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침수됐나 봐요. 근데 의외로 물은 시커멓긴 하지만 되게 깨끗하게 보이는데요?”
심지어 1급수처럼 투명하게 맑았다.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게 물이다. 급하면 이 물이라도 길어서 마시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현규하가 고개를 저었다.
“마시면 안 돼요. 겉으로는 평범한 물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오염되거나 변이했을지 모르거든요. 보스 몹이 지하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둘러보죠.”
지하에는 주차장과 기계실이 있었다. 인유신을 안은 현규하가 허공에 몸을 띄운 채로 침수된 지하로 내려가 주변을 신중히 탐색하며 설명을 마저 했다.
“세상이 멸망하는 원인은 뭐라고 생각해요?”
“핵전쟁? 환경 오염? 아니면 공룡이 멸종했을 때처럼 운석이 부딪혔거나…….”
“유신 씨 말처럼 여러 경우가 있을 수 있죠. 빙하기가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좀비가 나타났을 수도 있고, 미쳐 버린 대마법사의 만행일 수도 있고, 신이 홍수로 휩쓸어 버렸을 수도 있고.”
“게이트 안의 세계가 어떤 이유로 멸망했는지 모르니까 물을 마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똑똑하네요.”
왠지 자기가 흐뭇한 미소를 지은 현규하가 기계실을 나와 주차장을 천천히 날았다.
“다른 게이트처럼 장기적인 채산성이라도 있으면 멸망의 원인을 밝히려는 연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침식형은 일회성 던전이니까요. 운이 좋으면 즉사하겠지만 운이 나쁘면 마수 비슷한 거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즉사가 운이 좋은 거네요…….”
“보호 장비 없이 들어왔으니까 클리어한 뒤에도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공기 중에 좀비 바이러스는 없는 거 같네요.”
그러며 현규하는 눈가를 사르르 접었다.
“주인님이 좀비가 되어도 기꺼이 물리겠습니다. 오히려 좋아요.”
“……좀비 안 되게 조심할게요.”
깊은 산속의 호수처럼 잔잔하게 고인 물에 흐릿한 파동이 번지는 것과 동시에 현규하가 팔을 뻗었다.
저 멀리 검게 피어오르는 듯하던 아지랑이가 위에서 짓누르는 공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펑 하고 터졌다. 새까만 물은 아지랑이의 잔해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다시 고요해졌다.
“저거 마수예요?”
“대충 마수라고 뭉뚱그리긴 하지만 좀 달라요. 결정석이 없거든요. 육체라고 할 만한 것도 변변찮고.”
그렇게 열 마리가 넘는 마수를 더 처치한 뒤에도 던전 보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하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왔다. 넓은 지하를 둘러보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건물 안의 풍경은 전혀 변함없이 삭막하게 그들을 맞았다.
중앙에 있는 안내 데스크를 먼저 둘러보았다. 전력을 쓰는 컴퓨터는 꺼져 있었지만, 배터리를 사용하는 노트북은 여전히 기동 중이었다.
살짝 노트북의 키보드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업무용 프로그램의 흑백 입력창에 글자가 입력되는가 싶더니, 이내 건드린 자판 중 하나가 바스스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내구성이 많이 약해졌군요.”
“이런 멸망도 있어요?”
“…….”
현규하는 몇몇 숨기는 비밀을 제외하면 대체로 그에게 친절하고, 또 상세한 설명을 해 준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답이 늦었다.
의아하여 고개를 든 인유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졌다.
표정이 걷힌 음영 없는 얼굴에 억눌린 살의가 끓어오르다가, 인유신과 마주한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살의의 잔해는 우아한 선을 그리는 입가를 비트는 냉소로 남았다.
“생기가 쇠락하여 서서히 잦아드는 멸망도 있죠. 동물은 새끼를 수태하지 못하고, 식물은 열매와 낟알이 영글지 못하게 될 겁니다. 대지는 버석하게 메마르고, 태양조차 온전한 빛을 내리쬐지 못하는 잿빛 하늘의 아래에서 느릿느릿 종국으로 흐르는, 절망이 아닌 체념이 지배하는 온건하고 고요한 멸망이에요.”
멸망이에요.
그 말을 하며 현규하는 검지로 키보드를 주욱 훑었다. 손가락이 스친 자판의 반 이상이 먼지로 변했다.
“그럼 다른 곳을 둘러볼까요.”
먼저 등을 돌리며 앞서 걸어가는 현규하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목 안에 걸린 한마디가 간질간질하게 혓바닥을 긁었지만, 끝내 뱉어 내지 못했다.
규하 씨는 그 멸망을 꼭 직접 겪은 것처럼 얘기를 하네요.
딱 대라ㅋㅋㅋ내가 다 찢고 옴ㅋㅋㅋㅋ
옷장의 낙서를 다시 보니 기분이 묘했다. 처음 이 낙서를 볼 때만 해도 게이트에 휩쓸릴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인유신은 최진혁에게 받은 독의 정수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탈의실을 마지막으로 나와 2층으로 올라가며 현규하는 두 마리의 마수를 연이어 터트렸다. 저게 벌써 몇 마리째의 마수인지 모르겠다.
“밖에 있는 일행들은 괜찮을까요?”
이혜연과 최진혁은 A급 헌터이니 평소라면 생존에 문제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적은 인원으로 수십 명의 일반인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한다.
“별 쓸모는 없겠지만 하급 헌터나 각성자도 있으니까 그럭저럭 버티기는 할 겁니다. 빨리 던전 보스를 찾는 게 도와주는 거죠.”
현규하가 낮게 혀를 차며 목뒤를 문질렀다.
“수영장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실내에 있는 게 아쉽군요. 실외 수영장에 대피했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텐데. 혜연 누나는 물, 특히 바다에서는 무적이거든요.”
“어, 그럼 규하 씨보다도 세요?”
“으음…….”
어째서인지 현규하는 그 질문에 몹시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길 수는 있겠지만 한국인으로서 이겨서는 안 되는 문제라고 해야 할까…….”
그냥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유치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한국인 운운하면서 거창한 스케일이 되었다. 인유신은 대답이 궁금해서 한 발자국 앞서가던 그에게 얼른 따라붙었다.
“그 누나의 귀속 아티팩트 이름이 뭔지 들었어요?”
“아니요?”
“죽음을 고하지 말지어다.”
고풍스러운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인유신은 그의 말을 곱씹어 보고 흠칫했다. 바다에서 무적이라는 것과 죽음을 숨기라는 말을 조합하면……. 그게, 그러니까…….
“어……. 그건, 설마……. 그, 어어…….”
“이해하죠?”
인유신은 맹렬히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그 아티팩트를 전개한 이혜연과 싸워서 이기는 건 왠지 한국인으로서 진짜 좀 그렇다.
“그래서 그 누나랑은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아요. 일부러 지고 싶지는 않은데 이겨도 기분이 찜찜할 테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일본군 쪽 아티팩트는 아니죠?”
“조선군 맞아요. 어깨에 미니미 거북선 문신도 있으니까 반소매 입은 날에 보여 달라고 해 봐요.”
미니미 거북선이라니. 어감까지 깜찍하다.
“참, 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중학교 다닐 때였나, 그때 누님이 다른 나라에서 못 잡았던 해양 마수를 잡았다는 뉴스가 엄청 크게 나지 않았어요? 남중국이었죠?”
“맞아요. 역시 주인님은 기억력도 좋네요.”
별거 아닌 일로 인유신을 칭찬하며 또 머리를 쓰다듬을 기회를 얻은 현규하가 미소했다.
“정확히는 북중국이었어요. 르자오 인근 해역의 게이트가 폭주하면서 해양 마수들도 대거 쏟아져 나왔는데 보스를 못 잡았거든요. S급 헌터들을 동원했는데도 답이 안 나와서 몰래 롄윈 앞바다로 밀어서 치워 버렸어요.”
산둥성 르자오는 북중국의 영토이며, 국경을 마주한 장쑤성 롄윈은 남중국의 영토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남중국 정부, 즉 중화민국은 강도 높게 비난했지만 북쪽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증거가 없다면서 모르쇠를 잡았다. 하나의 나라에서 갈라졌으니 각기 북중국과 남중국이라 부르지만, 남중국은 영토도 국력도 북중국에 비해 약소하다.
국제 사회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에 따라 진상 규명은 어영부영 마무리되었고, 남중국은 피해를 고스란히 덮어쓸 위기에 처했다.
남중국 정부의 SOS를 받은 한국 정부는 이혜연을 파견했다. 일주일 후, 그녀는 사냥한 보스 몬스터의 결정석을 왕관처럼 들고 이능부의 홍보 포스터를 찍었다.
즉, 중국이 못 잡아서 남의 나라에 겨우 갖다 버리고 튄 마수를 이혜연이 가뿐히 박살을 냈다는 게 아닌가.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뽕 중 뽕은 역시 국뽕이었다.
지금도 눈앞에서 마수가 압력에 터지고 있는 위험한 게이트 안에서도 느긋한 대화를 하며 현규하와 나란히 걸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인 탓일까.
톡 튀어나온 가시처럼 가슴을 깔끄럽게 할퀴는 기시감이 못내 지워지지 않고 아른거렸다.
기괴한 흑백의 세상.
앞서 걷기도 하고 나란히 걷기도 하지만, 결코 인유신을 앞세우지는 않는 현규하.
그리고 붉게 물든, 그…….
“유신 씨, 이쪽 계단은 조금 위험할 거 같네요. 안아서 올라갈 테니까 이리 와요.”
“아, 네!”
인유신은 이물감처럼 거북하게 아른거리는 기시감을 뭉개며 얼른 다가갔다.
본관 건물을 다 둘러보고 운동장을 둘러싼 관중석까지 샅샅이 훑었는데도 던전 보스는 보이지 않았다. 성과라면 매점을 발견했다는 거였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고여 있던 한기가 흘러나왔다. 인유신은 얼른 냉장고 문을 닫았다.
“밀봉된 과자나 라면 같은 건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비상식으로는 가능할 텐데 대신 맛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예 맛 자체가 느껴지지 않아서 종이나 모래를 씹는 느낌이라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