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고즈넉하던 긴 밤. 휘황하게 떠오른 만월. 핏빛으로 물든 시야. 깨지는 하늘.
“……신 씨, 유신 씨! 괜찮아요?”
“아…….”
인유신은 상이 제대로 맺히지 않는 멍한 시야를 몇 번 깜빡거렸다. 흐리게 번져 있던 시야가 서서히 맑아지며,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빛과 마주친다.
예쁜 호박색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이 더없이 익숙하여, 인유신은 살짝 아랫입술을 물었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에 자꾸만 마음이 녹아든다.
“괜……. 헉!”
괜찮다고 대꾸하려던 인유신은 식겁했다. 현규하의 얼굴에 음영이 하나도 없었다.
“규하 씨, 어, 어, 얼굴이……!”
“얼굴? 아, 유신 씨는 침식 게이트에 휘말린 게 처음이겠네요. 여기는 원래 그래요.”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여 준다. 손만이 아니라 현규하의 몸 전체에도 음영이 없었다. 분명히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고, 사람의 모습이 보일 만큼의 밝기인데 음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신체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펼쳐 냈다.
‘당연한’ 모습이 ‘당연하지 않게’ 비틀렸을 때 인간의 뇌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앞에 서 있는 건 사람인데도, 유령이나 귀신을 보는 것 같은 감각이 오싹하다. 눈짓을 하거나 말을 하면 얼굴의 근육도 분명히 함께 움직이는데, 음영이 지지 않으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 꿰맞춰진 폴리곤 덩어리 같다.
슬쩍 내려다보니 자신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소름이 쫙 돋았다. 눈을 꼭 감고서 현규하에게 바짝 붙었고, 그는 만족스럽게 인유신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침식 게이트에 대해서 듣기는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으…….”
“다른 광경은 마음의 준비를 좀 한 다음에 봐요.”
그러면서 슬쩍 인유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게이트 내부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둘만의 세계를 구축한 현규하와는 달리 휘말린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마나와 방사능 수치는 정상이군.”
수치를 확인한 공태성은 휴대용 측정기를 아공간에 다시 던져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혜연 씨, 여기에 침식 게이트가 열릴 거라는 계측이 있었나?”
“있었다면 오늘 시험을 쳤겠냐. 그나마 방사능도 정상이고 호흡에 지장이 없는 공기라서 다행이네. 날씨도 좀 쌀쌀하지만 이만하면 버틸 만하고.”
두 사람이 환경을 탐색하는 사이에 최진혁은 게이트에 휘말린 40여 명의 사람들을 인솔해 왔다.
불안하게 웅성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인유신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직접 보니 신음이 나올 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음영이 없는 사람들을 제외한 세상은 온통 흑백이었다. 게다가 이 장소는 게이트에 휩쓸리기 직전까지 있던 체육 센터다.
색채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들은 게이트에 잠식되는 그 한순간에 쇠락한 멸망의 터에 서 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심었던 나무들은 고사하여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졌고, 바닥은 쩍쩍 뒤틀리고, 금이 간 건물은 붕괴했으며, 그 흔한 날벌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흑백의 세상. 이는 곧 멸망 이후의 세상이었다.
무엇보다 인유신을 오싹하게 하는 것은, 침식 게이트에 휘말린 게 처음인데도 이유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침식 게이트에 주의하라는 정보를 많이 봐서 착각하는 걸까.’
침식 게이트는 말 그대로 현실을 침식하는 게이트다. 내부에 단절된 세계의 환영을 구성하는 다른 게이트와는 달리 침식형은 현실을 집어삼키고 재조립하여, 세계의 종말을 구성한다.
방금까지 익숙하게 생활하던 일상이 침해되어 종말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공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멸망 이후의 세계란 것은 인간이 살아가지 못하는 환경일 가능성도 다분했다.
멀쩡하던 바닥이 용암으로 끓어오르기도 했고, 방사능에 노출되어 게이트를 클리어해도 피폭으로 사망하기도 했고, 수십 도가 넘는 고온의 열기나 영점 이하의 한랭한 냉기로 지배되는 세상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다소 쌀쌀한 기온에 호흡에 지장이 없는 공기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다.
“춥지는 않아요?”
“조금 쌀쌀한데 견딜 만해요.”
“그래도 감기 걸리면 슬퍼요.”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얇은 점퍼를 꺼냈다. 주니까 고맙게 받긴 했지만 의아했다. 현규하 사이즈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사이즈였다.
“이거 혹시 저 입으라고 사신 거예요?”
“저번에 던전 공략을 했을 때 유신 씨 배려를 못 한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아공간에서 그가 이것저것 꺼냈다. 겨울옷, 여름옷, 잠옷은 물론이고 게임기나 보드게임, 책이며 큐브 등등 시간 때우기 좋은 잡다한 잡동사니들이 인유신의 눈앞에 둥둥 떴다.
“나만큼 귀여운 햄스터가 그려진 팬티도 샀는데요.”
“그, 그건 안 보여 주셔도 괜찮아요!”
“음, 대신 이 햄스터 잠옷은 어때요?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애들용밖에 없길래 따로 주문해서 유신 씨랑 세트로 커플 잠옷 맞췄어요.”
그가 손에 든 건 후드에 햄스터 얼굴이 그려지고 앙증맞은 귀까지 솟아 있는 푹신푹신한 잠옷이었다. 엉덩이에는 꼬리도 달려 있다. 현규하의 햄스터는 깜찍한 윙크까지 하고 있었다.
‘어, 뭐지……. 갈아입어야 하나?’
아래위가 하나로 연결된 잠옷의 지퍼를 얼떨결에 내리기 직전, 이혜연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너네 게이트 안에 살림 차렸냐?”
“전부 주인님 거니까 아무리 탐내도 누나 안 줘요.”
맞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아무래도 현규하에게 물들면서 정상적인 사고가 잘 안 되고 있는 거 같다.
“또라이 새끼…….”
“진짜 싫다.”
공태성과 최진혁도 한마디씩 던지며 정상인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존재감을 지우던 스킬이 깨진 탓에 같이 게이트에 휘말린 일행들도 현규하를 멍하니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게이트학을 전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석박사 과정까지 수료 중인 씹덕 박승기만이 변태적으로 좋아하며 게이트 내부를 연신 촬영 중이었다.
어쨌든 게이트 안에서도 여상한 현규하의 언행은 패닉에 빠질 뻔했던 사람들이 침착함을 되찾게 해 주었다.
“또라이 새끼는 일단 치워 두고……. 식량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나?”
공태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어보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식수라고 해 봤자 두어 명이 들고 있는 생수가 전부니 빨리 클리어해야겠군. 영역은, 어디 보자. 탐색 스킬이 있는 사람은?”
“저한테 있습니다.”
오늘 시험에서 안전 관리 요원으로 참관했던 C급 헌터 하나가 손을 들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온 그녀는 잠깐 사이에 핏줄이 돋은 눈을 문지르며 설명했다.
“지하를 비롯한 체육 센터 전체와 도로 일부입니다. 게이트에 휩쓸린 건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고요.”
“영역이 좁고 번거로운 짐이 저놈들뿐이란 게 그나마 긍정적인가.”
쌀쌀한 목소리에 옹기종기 모여서 떨고 있던 이들은 흠칫했다.
“그래서, 이 급조한 팀의 리더는 누가 맡을 건가? 참고로 내가 리더라면 단기간에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겠다.”
헌터가 아닌 이들의 안전은 도외시하고 던전 클리어만 우선시하겠다는 뜻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침식 게이트는 던전 브레이크가 없는 대신, 외부에서의 진입이나 지원도 불가능했다. 게이트 내의 환경이 어떻게 급변할지 모르고, 식량과 식수마저 준비하지 못한 이상 단기간에 클리어하는 게 최선의 공략이었다.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의 시선이 현규하에게 쏠렸다.
공무 헌터가 아니었을 때도 지나가는 길에 은행 강도 같은 사건이 있으면 쓰레기를 버리는 느낌으로 치워 주기는 하는 헌터였으니까.
현규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솔플만 하는데요. 그리고 최우선은 주인님의 안전이에요.”
“또라이 새끼 지시를 받는 건 나도 싫으니 그냥 이혜연 씨, 당신이 리더 해.”
“민간인을 아주 버리겠다는 건 아니란 뜻이구만.”
“흥. 그런 귀찮은 일은 내 소관 아니야.”
임시로 리더를 맡게 된 이혜연은 전력을 확인했다.
일반인과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하급 각성자들이 약 마흔 명, 헌터들은 S급 두 명, A급 두 명, C급 한 명, D급 세 명. 어떻게 운용할지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나랑 진혁이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이 여기서 민간인을 지킬 테니까, 너희 둘이 동쪽과 서쪽을 각각 탐색하면 되겠네. 던전 보스의 위치가 파악되면 다시 팀을 나누든가 하자. 잡을 만하면 바로 해치워도 좋고.”
“누가 동쪽이고 누가 서쪽이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가위바위보로 해.”
“내가 서쪽이요. 유신 씨 고향이 개성이라서 옛날부터 서쪽 좋아했어요.”
“……?”
사람들이 ‘그게 뭔 소리야.’라는 표정을 지을 때 인유신이 조심스럽게 현규하어(語)를 통역했다.
“개성이 서울에서 서쪽이라서 그런 거 같아요.”
“그 말을 하는 규하도 규하지만 알아듣는 너도 대단하네.”
“주인님과 애완동물의 정겨운 교감이죠.”
“그쪽은 입 다무시고. 아무튼 조심히 잘 다녀와.”
이혜연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공태성은 한 손에 칼을 들고 운동장의 동쪽에 있는 주경기장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너도 규하 따라갈 거야?”
“규하 씨 옆이 제일 안전해요.”
“그래, 그건 그렇다 쳐도……. 잠옷은 넣어야 하지 않을까?”
“아.”
앗차 한 인유신이 얼굴을 조금 붉히며 햄스터 잠옷을 돌려주자, 그는 대놓고 섭섭하다는 얼굴로 아공간에 챙겨 넣었다.
“……집에 가서 입을게요.”
현규하는 시무룩하게 새끼손가락을 까닥거렸고, 인유신은 얼른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었다. 그제야 웃음이 방긋 피어났다. 음영이 지지 않는 얼굴은 여전히 기이한데도, 잘생겨 보이는 게 놀라웠다.
“아, 잠깐. 인유신.”
최진혁이 목울대 부근에 새겨진 귀속 아티팩트의 문신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문신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 끝에 푸른색을 띤 마나가 둥근 형태로 응집했다. 탁구공만 한 크기였다.
“독이다. 마나를 주입해서 던지면 터지니까 위급할 때 써라. 뭐, 현규하가 있으니 쓸 일은 없을 거 같다만.”
“감사합니다!”
인유신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꾸벅했다. 말수가 적은 남자라서 대화한 적도 별로 없는데 따로 챙겨 주니 의외이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군침까지 흘리면서 주변을 촬영 중이던 박승기도 뒤늦게 외쳤다.
“위험하면 꼭 헌터님 뒤에 숨어!”
그렇게 인유신은 현규하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흑백만으로 구성된 무채색의 죽은 세상에 색채를 지닌 음영 없는 생명체들이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각기 다른 차원을 억지로 뒤틀어서 꿰맞춘 것 같은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태양도 달도 별도 구름도 없는, 백지처럼 새하얀 하늘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