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14)
  • “자, 그러면 쉬었으니까 다시 하체 조지러 가 봅시다.”

    “체력 검사할 때랑 똑같은 종목으로 테스트해 보니까 그럭저럭 통과는 하겠던데…….”

    “운동 겸 데이트잖아요. 우리는 시험 준비가 아니라 데이트를 하는 거예요.”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궤변에 밀려 옆구리에 달랑달랑 들려 체력단련실로 돌아갔다. 체력 검사를 3일 앞둔 어느 날이었다.

    각성 능력 측정에서 D급 이상으로 판별되면 즉시 헌터 라이선스가 발급된다. 라이선스 발급 시험은 그 이하 등급의 각성자들을 위한 관문이었다.

    특출한 능력이 없는 각성자들이 구할 수 있는 헌터 업계의 일자리는 던전에서 보조 역할을 하며, 결정석과 마수의 시체 등을 옮기는 인부였다. 시험은 던전 내에서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위한 자격 증명인 셈이다.

    체력 검사는 체육 센터에서 치러졌다. 원칙적으로 관계자 외에는 입회할 수 없는 시험이지만…….

    “유신아! 파이팅!”

    이능부를 비롯한 길드의 직원은 아주 훌륭한 관계자다.

    각성 능력을 측정하는 센터에도 헌터를 스카우트하기 위한 이능부와 길드의 직원들이 들락거린다. 헌터 라이선스 시험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등급 낮은 헌터를 굳이 스카우트할 필요가 없었기에 지금까지는 형식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규정을 빌미로 현규하는 당당하게 들어왔고, 그 뒤를 이혜연이 따라왔다. 어쨌든 이 체력 검사 또한 이능부 소관인 것이다.

    인유신은 휴대폰에 전광판 어플을 띄워서 응원하는 이혜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민망해서 목덜미까지 빨개지긴 했지만, 여기까지 응원하러 와 준 건 은근히 기뻤다.

    〈체력 검사가 일요일이야? 으음……. 모르겠다! 교회 하루 빠지지, 뭐! 나쁜 일로 빠지는 것도 아니고 응원하러 가는 거니까 예수님도 너그럽게 넘겨 주시겠지.〉

    〈교회요? 혹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귀화하셨던 거예요?〉

    〈어. 우리 할아버지가 미군이셨거든. 성씨가 리여서 귀화하신 뒤에도 그냥 이씨가 됐어.〉

    이슬람이 그렇듯이 기독교를 믿는 소수의 신자들은 대다수가 한국 전쟁 때 귀화한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성당이나 교회, 이슬람 사원 등은 거의 볼 수 없었을 터다.

    인유신은 기독교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신자에게는 중요한 하루일 텐데 예배까지 빠지면서 와 주었으니 몹시도 고마운 일이다.

    “평소처럼만 해, 인마!”

    박승기는 바빠서 오지 못한 권성길의 몫까지 응원하는 이혜연과 나란히 있었다. 오늘도 ‘현규하 애인에게 약 치기’라는 치트 키를 쓰고 랩실에서 탈주했다. 두 인싸는 안면 튼 지 몇 분 만에 벌써 친해진 분위기였다.

    옆에는 최진혁의 모습도 있었다. 현규하 못지않게 모임에 어울리는 걸 질색할 것처럼 보이는데 은근히 출석률이 높다.

    ‘사교성이 없는 건 규하 씨뿐일까.’

    현규하는 그들 모두에게서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표정이 어딘가 좀 불안해 보였다. 손가락으로 팔뚝까지 톡톡 연신 두드린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슬쩍 상태창을 띄워 본 인유신은 흠칫했다.

    [현재 상태 : 살의. ??. 불만. 분리 불안. 초조. 접촉 욕구. 응원봉.]

    ……뭐가 이렇게 많아졌지? 거기다가 응원봉은 또 뭐고?

    심지어 접촉 욕구는 처음 보는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인유신에게 눈길이 쏠릴까 봐 존재감을 지우는 스킬은 착실히 쓰고 있었다.

    ‘이번에 꼭 합격해야겠어……. 이 시험을 두 번 쳤다가는 규하 씨가 못 버티겠다…….’

    인유신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악력기를 힘차게 쥐었다.

    딱 대라ㅋㅋㅋ내가 다 찢고 옴ㅋㅋㅋㅋ

    인유신은 탈의실의 옷장에 누군가가 남겨 놓은 낙서를 보며 실소했다.

    실외 운동장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마지막으로 시험은 전부 끝났다. 절대 평가인 커트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넘었지만 어쨌든 합격이었다. 시험을 찢고 온 기분은 뿌듯하다.

    “야. 아까 얘기 들어 보니까 밖에 이혜연이랑 최진혁만 온 게 아니라던데?”

    “우리 같은 하꼬 헌터 시험에 웬일이래.”

    “이러다가 나도 스카우트되는 거 아니야?”

    “지랄.”

    수군거리는 다른 각성자들의 수다에 찔끔한 인유신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갔다.

    만나기로 약속한 운동장 구석에 가자마자 시야가 까맣게 덮이더니, 익숙한 체온이 그를 와락 품었다.

    “보고 싶었어요.”

    인유신은 내도록 얼굴에 감돌던 불안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 현규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잘 참았어요.”

    “사실은 유신 씨가 시험 치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응원해 주려고 응원봉을 종류별로 서른 개 샀거든요. 꺼내니까 누나가 그런 걸 보면 정신 사나워서 시험을 망친대요.”

    “……진짜 잘 참았어요.”

    상식인인 이혜연이 같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현란하게 빛나는 응원봉들이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상황에서 체력 검사에 집중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주인님도 합격해서 잘됐어요. 발급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던전 데이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수리에 얼굴을 묻은 현규하가 즐겁게 미소했다.

    “유신아! 합격 축하해!”

    “오올, 인유신 헌터님이네.”

    “보기보다 제법이군.”

    뒤늦게 다가온 세 사람도 저마다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합격 기념으로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는 이혜연의 말에 박승기가 누님 찬양을 외치고 있을 때였다.

    “그쪽이 인유신인가?”

    낯선 목소리였다. 인유신이 돌아보기도 전에 현규하가 그를 감싸듯이 앞을 가로막았다. 존재감을 지우는 스킬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다가온 남자는 그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똑바로 현규하를 응시했다.

    현규하의 옆구리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인유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이는 서른 중후반. 완강한 느낌으로 뻗은 턱선과 예리한 눈매는 강인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성급한 느낌이 들었다. 각이 지고 탄탄한 몸매는 넓은 벽을 보는 것 같았다.

    흔한 외모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현규하만큼은 아니지만 잘생겼다. 심지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헌터에 큰 관심이 없던 인유신이 알고 있는 헌터라면 유명인이라는 뜻이다.

    ‘나르샤의 공태성 길드장님이잖아?’

    다른 말로는 만년 랭킹 2위.

    휴일인데도 포마드로 머리를 빗어 넘기고 정장을 갖춰 입은 공태성은 깐깐한 엘리트 사업가의 느낌을 두르고 있었다.

    ‘아까 나 부른 거 맞지? 인사를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에 현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안 가. 귀찮아.”

    공태성이 반듯한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헛소리지?”

    “왜놈 칼, 필요 없어. 나르샤 길드, 안 가. 말 섞는 거, 귀찮아. 한마디 요약. 꺼져.”

    “그 엿 같은 말본새는 언제 고칠 거냐?”

    “유신 씨 찾는 거 보니까 어차피 나르샤 길드에 꼬시려고 온 거 아닌가?”

    “비슷하긴 한데 목적은 다르다. 이번에는 네 뒤에 목줄 쥐고 숨어 있는 주인님과 인사나 하자고 찾아온 거야.”

    “애완동물 앞에서 주인에게 눈독을 들이다니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씨발! 사람 말을 좀 들어!”

    침착하게 대꾸하는 듯했던 공태성은 기어이 욕을 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인유신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까지 현규하의 사교성이 바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가 존댓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썼던 건 나름대로 싸가지를 챙긴 거였다……!

    인유신은 조금 뿌듯해졌다.

    “넌 또 왜 고양이가 5개월 만에 빵야 훈련에 성공한 집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냐. 누님, 팝콘 드실래요?”

    “쟤들은 참 사이가 안 좋다니까. 나는 아무래도 태성이가 규하를 길드로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자기 나와바, 가 아니라 영역에서 몰래 슥샥 해치워서 1위 해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이혜연 씨, 지금 다 들리는데?”

    “아무튼 유신이 얼굴 보러 온 거라며? 얼굴 봤으니까 오늘은 그냥 가고 나중에 정식으로 이능부 방문하든가 해. 오늘은 시험 때문에 계속 떨어져 있어서 규하가 좀 예민하다고.”

    이 타이밍에 인사는 해야 할 거 같아서 인유신은 옆으로 한 걸음 나갔다.

    “인유신입니다. 혹시 저를 스카우트하러 오신 거라면 나르샤 길드에는 가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인사를 끝맺기가 무섭게 현규하가 다시 인유신을 사이코키네시스로 들어서 등 뒤에 쏙 숨겼다. 그 모습에 공태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최민혁까지 나서서 손을 내저었다.

    “콩태성, 용건 끝났으면 얼른 가라. 우리는 고기 구워 먹으러 가야 돼.”

    “공!”

    “공태성이라고 했다만?”

    “하아, 씨발. 이능부 인간들과 말을 섞으러 오는 게 아니었는데.”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응시하는 공태성의 눈빛을 받은 인유신은 무심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탐색당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 기분은 결코 유쾌한 게 아니었다.

    “공태성.”

    그리고 현규하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인유신의 흔들림을 감지한다. 그의 낯이 차갑게 식으며 나직이 깔린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유신 씨에게 스킬을 걸려는 시도라도 한다면 넌 죽어.”

    “날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나온 거지?”

    코웃음을 친 공태성이 한 걸음 물러나 아공간에서 무기를 꺼낼 자세를 취했다. 이혜연마저 팝콘을 박승기에 돌려주며 긴장했다. 인유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른 현규하를 만류하려던 순간.

    “……!”

    현규하는 급히 역장으로 인유신을 감쌌다. 그다음으로 이변을 눈치챈 사람은 공태성이었다. 이어 이혜연과 최민혁이 당혹한 시선을 올렸다.

    청명하게 맑던 하늘이 깨졌다.

    깨진 하늘의 틈으로 먹물을 쏟아부은 것만 같은 어둠이 진득하게 번지며 흘러내렸다. 운동장 구석에 모여 있던 일행들도, 명성 높은 헌터들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뒷정리를 하던 사람들도, 모두 흘러내리는 어둠에 삼켜졌다. 찰나였다.

    꾸덕꾸덕 흐르는 어둠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세상을 재조립한다.

    재조립되는 세상의 격변에 휘말리는, 영혼이 뒤섞이는 듯한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 인유신은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침식 게이트.

    그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