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게이트로 인해 파생되는 현상을 더 이상 낯설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익숙해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여보!”
“수현아! 엄마, 여기에 있어!”
마수의 출현이었다.
[(이능부) 13시 27분 현재, 서울 중구 연서동 응덕오거리에 돌발 게이트가 발생하였으니 인근 주민들은 신속히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행동 요령 참조 링크. 대피소 확인 링크.]
도심지 한복판에 열린 게이트는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마수 출몰 시 행동 요령은 학교와 직장에서 필수적으로 이수하지만, 막상 현실로 마주했을 때 냉정한 대처가 가능한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다행히 행인 중에 두 명의 헌터가 있어 일반 시민들이 지하 대피소로 피난하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이쪽을 보라고!”
헌터 하나가 아공간에서 꺼낸 방패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능력을 발동했다. 마나의 파동이 번지고, 마수들에게 어그로가 끌렸다.
부러진 가로수 옆에 넘어진 학생을 노리던 마수가 개미핥기처럼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세 개의 다리를 움직였다. 겹눈처럼 빼곡하게 박힌 눈알에 화살이 연이어 격중했다.
고통 섞인 비명을 울부짖는 마수를 짓밟으며 다른 마수가 도약했다.
쾅!
첫 타격은 간신히 방패로 막고, 화살이 명중했으나 이어 또 다른 마수가 들이닥쳤다.
“젠장! 우리 둘만으로는 안 돼!”
“곧 지원군이 올 겁니다!”
“그게 언젠데!”
헌터는 욕을 하면서도 방패로 밀어붙이고 튕겨 냈다.
“선배! 위예요, 위!”
뒤에 있던 다른 헌터가 활을 재장전하는 사이 비행형 마수가 날아올랐다. 방패는 몸통으로 두들겨 대는 전방의 마수를 막느라 쓰지 못한다.
“씨발!”
헌터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그렇게 해 봤자 마수의 치악력으로 머리뼈까지 빠개지리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익룡처럼 길고 뾰족한 마수의 부리가 크게 열리고.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뭐야?”
헌터는 당혹하여 고개를 들었다. 어그로가 끌려서 몰려들던 마수들도, 어그로가 끌리지 않아 활보하던 마수들도 모두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이건 무, 무슨 능력이지?”
“어, 그게……. 사이코키네시스인 거 같은데요.”
“말이 되냐? 사이코키네시스를 이렇게 깔끔하게?”
돌아보며 핀잔을 주던 헌터는 후배가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자, 자신도 따라서 얼굴을 올렸다.
거기에는 말이 안 되는 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현규하가 성의 없이 손을 휘적휘적 내젓자 사이코키네시스에 붙잡혀 있던 마수들의 머리가 360도로 회전했다. 가죽이 찢어지고 살과 뼈가 비틀리는 기괴한 소리가 사방에서 연이어 울렸다.
다른 때였다면 소름이 끼쳤을 소리에도 두 헌터는 멍하니 허공만 올려다보았다. 꿈이 아닌가……?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헌터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와 씨……. 저걸 해내네.”
“1분도 안 걸렸지? 최단 기록 아니야?”
“최단 기록이 어디 한두 개겠냐…….”
돌발 게이트에 급히 투입된 이능부의 공무 헌터, 정민재와 김호준은 감탄만 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급의 차이가 나니 질투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까지 올 필요가 없었던 거 아냐?’
정민재는 다소 허탈한 심정으로 타고 온 SUV를 곁눈질했다. 차 안에는 밖에 무슨 소동이 일어나도 현규하가 정리하는 게 아주 당연하다는 것처럼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에서 히든 보스가 최초로 게이트 밖으로 나온 건 1953년 인도의 와랑갈…….”
헌터 라이선스를 따기 위한 필기시험을 열심히 공부 중인 인유신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외근을 하지 않는 현규하다. 이능부 장관이 와서 애걸해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사무직원인 인유신을 대동하는 걸 김 과장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현장으로 매번 세트로 묶여 오는 거에 불안해할 법도 한데, 끄떡도 하지 않는 강단이 정민재는 놀라웠다.
‘역시 현 팀장님과 사귀려면 보통 심장으로는 안 되겠지.’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삽시간에 현장 정리를 끝낸 현규하가 하늘에서 내려와 SUV의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차창이 스르르 내려가자 얼굴부터 냉큼 밀어 넣는다.
“나 어땠어요?”
순간 칭찬을 바라는 대형견처럼 현규하의 엉덩이에서 꼬리가 맹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착시가 보여 정민재는 눈을 거칠게 문질렀다.
“민재야, 가자.”
언제 어디서나 애정 행각을 거리끼지 않는 저 둘에게 먼저 익숙해진 김호준이 어깨를 툭 쳤다.
“어, 어……. 그래.”
정민재도 얼른 그의 뒤를 따라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규하처럼 단번에 마수를 몰살해 버리는 능력은 없었지만, 헌터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 * *
공부와 운동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공부를 고를 인유신이다. 학창 시절에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필기시험은 문제없이 합격했고, 이제 체력 검사만이 남았다.
“규하 씨! 이거 봐요, 저 배에 복근 조금 보여요!”
오늘도 체력단련실에서 땀을 빼던 인유신은 자랑스럽게 상의를 들어 올렸다가, 다가오는 현규하의 눈빛에서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 급히 옷을 내렸다.
“다시 까 봐요.”
“왜, 왜요.”
“주인님 복근을 만져 보고 싶어서요.”
“그거 성희롱…….”
“유신 씨의 근육에 내 지분이 98퍼센트인데요.”
“제 몸인데 제 지분은 2퍼센트뿐이에요?”
“단백질 보충제, 삼시세끼, 트레이닝, 협박.”
“…….”
트레이닝 과정이 협박으로 점철되었었다는 자각은 있었나 보다……. 길게 말했다가 말려들어 갈 거 같았던 인유신은 재빨리 탈의실로 도망쳤다.
물론 현규하는 잠긴 문의 손잡이를 돌려서 힘으로 뜯고 들어왔다.
“어떻게 손힘만으로 뜯었어요?!”
“사랑이 있으면 불가능한 건 없습니다.”
“그거 세금으로 사는 비품인데요……!”
“부순 만큼 세금 더 낼게요.”
부순 문짝을 몸으로 막아서 인유신이 탈출할 구멍을 막은 현규하가 손짓했다.
“아마 주인님은 체력 테스트를 통과하면 바로 운동을 때려치울 거 같으니까.”
뜨끔했다.
“이 순간이 어쩌면 주인님 인생 최고의 근육일지도 몰라요. 바디 프로필 찍을래요?”
“근데 바프 사진은 노출이 많아서 좀…….”
“그래서 찍자는 건데요.”
“……!”
“농담입니다.”
인유신의 눈동자에 다시금 경계의 빛이 서리고, 현규하는 피식 웃으며 그를 허공에 띄웠다. 그냥 안아 올리면 반항이라도 시도해 보겠는데 맘대로 공중 부양을 시키니 할 수 있는 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뿐이다.
탈의실 의자에 앉은 현규하는 그도 바로 옆에 앉혔다. 어깨를 감싸 안는 팔은 자연스럽다. 목덜미를 스치듯이 어루만지는 손끝에 솜털이 보스스 떨리고, 목울대가 가늘게 꿈틀거렸다.
“흐음.”
뻣뻣한 허리를 당겨 안고서, 정수리에 뺨을 묻은 현규하가 만족감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목소리와 함께 떨어진 숨결이 머리칼을 사락사락 간질이는 느낌에 손가락까지 바짝 힘이 들어간다.
한국대 축제 날 이후 현규하가 그를 쫓는 빈도가 더욱 잦아졌다. 이혜연의 표현에 따르면 치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버려졌다고 오해했던 불안감을 온전히 삭이지 못한 거 같지.’
그래서 인유신은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오늘도 얌전히 안겨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스킨십이라 긴장될 뿐, 불쾌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아저씨들은 술 취하면 형님 동생 하면서 서로 끌어안고 손잡고 스킨십 쩔게 하던데 그걸 20년쯤 일찍 경험하는 것뿐이니까……!’
그런 생각들을 애써 머릿속에 넣어 봐도 단단한 팔과 가슴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감각을 지워 내기 어렵다. 가까이 접하는 타인의 온기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유신 씨.”
문득 현규하가 얼굴을 숙였다. 시선이 천천히 다가온다. 느릿한 숨결이 피부를 쓸고, 손끝이 인유신의 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목 안이 갑자기 뻣뻣하게 마르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데, 현규하가 손가락을 가볍게 털었다.
“속눈썹 묻었어요.”
용건은 그게 다라는 듯 현규하는 다시 얼굴에서 손을 뗐지만 곤두선 감각이 이상하게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대화라도 해서 신경을 분산해야 할 거 같았다.
“저랑 헤어지고 나면 2시간마다 전화하는 거로 정말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헤어지기 전에 주인님으로 충전을 잔뜩 해 둬야 해요.”
의심할 구석도 없는 천연덕스러운 대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