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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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씻고 나오니 현규하가 햄스터 그림 잠옷을 들고 있었다.

    “집에 옷이 내 거밖에 없으니까 입으면 불편할 거 같아서 잠깐 유신 씨 집에 들러서 잠옷 가져왔어요.”

    “맞다. 6세 밥 주는 걸 깜빡했는데 저도 집에 갔다 올게요.”

    “사료 통이 비어 있길래 내가 챙겨 주고 왔어요. 동생이 누나 밥시중 드는 건 당연하죠. 근데 텃세를 좀 부리는 거 같아. 휴지 심 뒤에서 계속 노려보더라고요.”

    “애가 겁도 많고 경계심이 있는 편이라서요.”

    인유신도 테이밍 능력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핸들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집에 어떻게 들어가셨어요?”

    “창문이 열려 있길래요.”

    “아하.”

    아침에 튀느라 경황이 없어서 창문을 안 잠그고 나온 모양이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현규하가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왔다.

    “……저 옷 갈아입을 건데요.”

    “알아요.”

    “잠깐만 나가 주시면 안 될까요?”

    “뒤돌아보고 있을게요. 옷 갈아입는 기척이라도 들려야 안심할 거 같아.”

    그러며 냉큼 등을 돌려 벽을 보고 섰다. 인유신은 머리를 한 번 긁적거리고는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뭐, 같은 남자끼리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빠르게 후딱 갈아입었다. 다 갈아입었다고 말하기도 전에 등을 돌린 현규하가 비스듬히 눈가를 접었다.

    “햄스터 잠옷 입은 주인님을 드디어 가까이에서 보네요.”

    가까이……? 뭔가 단어가 살짝 이상했지만 인유신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현규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신경 쇠약에 걸릴 것이다.

    저녁으로 피자도 먹고, 씻고 하다 보니 어느덧 잘 시간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 온 건 처음이라 바로 자긴 아쉬웠다.

    ‘근데 뭐 하고 놀지?’

    인유신은 ‘지인의 집에서 노는 방법’ 따위를 검색해 보다가 옆을 슬쩍 보았다. 소파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현규하는 인유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규하 씨는 집에 손님들 오면 뭐 하고 노세요?”

    “내가 집에 초대할 친구가 있을 거 같나요.”

    “……아니요.”

    “심심하면 지금이라도 TV 살까요?”

    “앗, 그건 좀.”

    휴대폰의 작은 화면이지만 드라마라도 볼까 싶어서 앱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유심히 응시하던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맞다. 태블릿 있었지.

    “그게 OTT란 거죠? 여기 설치해 봐요.”

    “아, 규하 씨는 따로 보는 거 없어요?”

    “얘기만 들었어요.”

    현규하의 태블릿에는 딱 기본 앱만 깔려 있었다. 서류나 메일 같은 걸 확인하는 용도가 아니면 쓰지 않는 모양이다.

    OTT 어플을 깔고 자신의 아이디로 로그인하려는데, 현규하가 태블릿을 가져가더니 새로 회원 가입을 했다.

    “이런 거 여러 명이 볼 수도 있다면서요? 내 아이디 줄 테니까 유신 씨도 그냥 이거로 봐요.”

    그렇게 태블릿을 허공에 띄운 채로 같이 영화를 보게 되었으나, 정작 인유신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근데 규하 씨.”

    “네에.”

    대답은 옆자리가 아니라 위에서 들려왔다. 정확히는 머리 위.

    인유신을 다리 사이에 앉게 한 현규하는 뒤에서 어미 새가 알을 품듯이 꼭 끌어안고 있었다. 품으로 쏙 안긴 인유신은 당연히 불편했다.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이 그를 품은 남자에게 온통 쏠린다.

    사람의 몸이 아니라 벽에 기댄 것처럼 단단한 흉부, 전신을 감싸듯이 덮으며 밀착한 체온, 정수리와 머리칼을 따라 흐르는 숨결, 비슷한 속도로 겹쳐 느슨하게 울리는 한 쌍의 심장 박동.

    손을 약간 움직이니 팔뚝을 감싸고 있던 팔을 스르르 내려 허리를 안았고, 머리칼을 살짝 긁으니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얼굴을 붙였다.

    ‘커다란 개한테 안겨 있는 거 같아.’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곧 한숨을 쉬었다. 정말 대형견한테 안겨 있는 거라면 긴장할 필요도 없겠지.

    ‘아니, 아니야. 그냥 불편해서 예민해진 것뿐이야. 만원 지하철에 끼였을 때도 누구랑 닿아 있는지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잖아.’

    현규하에게 불편하니까 그냥 옆으로 나란히 앉으면 안 되겠냐고 말하려던 인유신은 상태창을 보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현재 상태 : 살의. 분리 불안.]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는 만원 지하철이다. 만원 지하철이다. 만원 지하철이다……. 인유신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되뇌며 귓불을 가늘게 간질이는 숨결이라든가, 배를 감싼 손끝이라든가,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으로 느껴지는 시선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열나요? 얼굴이 좀 붉은데.”

    “괘, 괜찮은데요.”

    인유신은 이마의 열을 짚으려는 현규하의 손을 피해 어깨를 움츠렸다.

    “야식이라도 먹을래요?”

    지금은 떡볶이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안 먹어도 된다고 대답하려 시선을 돌리다, 옆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현규하와 눈이 마주쳤다.

    “으응?”

    사르르 접으며 미소를 머금는 눈빛과 마주한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그의 외모에 상당히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보다.

    자신의 숨결에 그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밀착한 거리에서, 느릿하게 깜빡거리는 보석 같은 눈동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의 눈을 마주 보자니 한순간 이 거실마저 현실이 아닌 몽환의 세계로 물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나랑 같은 인종이 맞을까.

    나른하게 풀린 눈빛으로 그가 속삭였다.

    “갑자기 왜요,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규하 씨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잘생겨서…….”

    적당한 말로 무마하면 될 텐데 머리까지 아득해서 진심이 나오고 말았다. 말하고 난 뒤에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현규하가 들은 후였다.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만져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작게 웃은 그가 인유신의 손을 잡아 제 얼굴에 가까이했다. 멍하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따로 다듬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날렵하게 뻗은 눈썹, 손끝을 간질이는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콧대, 보드라운 입술 선까지 어루만지다, 여린 숨결에 흠칫하여 손가락을 움츠렸다.

    “느낌이 어때요?”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게…….”

    이번에도 역시 멍하게 이실직고해 버린 인유신을 내려다보며 현규하가 기쁜 듯이 그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살짝 맞대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지는 살갗인데, 오히려 제 볼에 열기가 올랐다.

    “유신 씨의 옆에서 계속 평범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얼굴부터 안 평범하신데…….”

    “주인님도 안 평범해요.”

    세상에 자신만큼 평범한 20대가 어디 있나 싶었지만, 그렇게 반박할 용기는 곱게 휘어지는 미소에 녹아 사라졌다. 현규하만의 좋은 향기가 부드럽게 감돌았다.

    결국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소파는 넓었고 인유신은 체구가 작다. 뒹굴거리면서도 잘 만한 넓이라서 안심했다.

    “저는 소파에서 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를 가볍게 들어 올려 안은 현규하가 거침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는 더 넓어요.”

    “넓은 침대에서 규하 씨 혼자 편하게 주무세요!”

    넓어 봤자 혼자 자는 침대 아닌가. 또 바짝 안겨 있다가는 잠을 아예 자지도 못할 거 같다는 위기감 속에 인유신은 다급해졌지만 현규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침대로 풀썩 안착한 인유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침대가 정말 넓네요?”

    라지킹 사이즈였다. 혼자 사는 남자가 뭐 하러 넓은 침대를 샀는지 모르겠다.

    “이 넓은 침대에서 아무 짓도 안 하고 정말 딱 손만 잡고 잘게요.”

    “…….”

    “애완쥐 못 믿어요?”

    “…….”

    충격받은 듯 애처로운 눈망울을 뜨고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자니, 있던 믿음까지 쏙 사라졌다. 하지만 분리 불안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창을 보고 있자니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오늘 많이 놀랐을 테니까 하루 정도는 그냥 맞춰 주자…….’

    늘 맞추고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은 아마 착각일 터이다.

    “진짜 손만 잡고 자는 거죠?”

    “내가 주인님한테 숨기는 건 있어도 해가 되는 나쁜 거짓말은 한 적이 없잖아요.”

    그건 그랬다. 거짓말을 할 때도 ‘앞으로 당신에게 나쁜 거짓말을 할 거예요.’라고 선포부터 먼저 할 거 같다.

    인유신이 베개를 탁탁 털고 누우니 현규하가 냉큼 옆에 누웠다. 이불이 자동으로 스르르 올라와 두 사람의 몸을 덮고, 불이 달칵 꺼졌다.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뻗어 온 팔이 인유신의 손을 쥐더니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오지랖 넓은 부부가 침대는 큰 게 좋다면서 우길 때는 귀찮기만 했는데 정말 큰 거 사길 잘했네요.”

    “성길 형님이랑 혜연 누님이 고르신 침대였어요?”

    “네. 인테리어는 전부 유 변이랑 그 부부의 합작품이에요.”

    붙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던 현규하가 깍지를 끼었다. 무심코 붙잡히지 않은 쪽의 손을 꼭 쥐고 말았다. 손바닥의 살결을 느슨히 매만지는 그의 엄지로부터 신경을 돌리기 위해 인유신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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