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고……. 힘들긴 한데 친구가 몸 좋아졌다고 하니까 기분은 좀 좋았거든요. 운동하는 게 해가 되지는 않잖아요.”
“이번 시험을 놓치면 반년 뒤에나 있는데, 그때까지 유신 씨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마음 때문에 내가 너무 조급해했나 봅니다. 이제 채근 안 할게요.”
“그럼 던전은 어쩌시려고요?”
“안 가면 되죠.”
현규하는 쉽게 대꾸했지만 듣는 인유신은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기껏 이능부와 계약해 놓고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사무실에서 연애만 한다……?
밖에서 뭐라고 씹어 대든 현규하는 무시할 테고, 태업을 해도 닦달하거나 직위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능부에서는 압박을 잘못했다가는 현규하가 인유신을 데리고 계약을 해지할지도 모른다며 여기고 있을 테니 세게 나가지도 못할 테고. 아마 중간 관리직이나 쪼아 대겠지.
죄 없이 중간에 끼어서 온갖 고초를 겪을 김 과장을 생각하니 근심이 커졌다.
‘소개해 주실 때 보니까 좋은 분 같던데……. 주무관님께 얘기 들어 보니까 홍 팀장님과는 달리 과에서 평판도 좋다고 하고…….’
남편이 입원 중이라 한동안 외벌이로 고생하고 있다는 근황도 접했다. 그에 비하면 운동이 힘들어서 징징거린 자신의 처지는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운동할게요.”
“진짜요?”
“반년 동안 월급 루팡이 되지 않으려면 합격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그치만 조금은 살살 해 주세요.”
“물론이죠. 다시는 주인님이 날 버릴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만 할게요.”
현규하의 목소리에 화색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렇게 좋은 걸까. 하지만 그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건 인유신의 짐작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필기시험에 손을 쓰는 것보다 체력 검사에 손을 쓰는 게 더 쉬우니까요.”
“……규하 씨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감독관을 협박해서 미달인 성적표를 슬쩍 합격으로 고치는 수작, 현규하라면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근데 유신 씨.”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채로, 현규하가 그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오늘은 나랑 계속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떡볶이 사 줄게요.”
“떡볶이 말고 피자요.”
“콜.”
등 뒤로 배시시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예쁜 미소였다.
인유신을 안은 채 현규하는 서울 상공을 가로질렀다.
“저희 집에 안 가시고요?”
“유신 씨 집도 좋지만 거긴 매트리스가 1인용이잖아요.”
이건 자고 가라는 뜻일까. 박승기가 기숙사생인지라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잔 적이 없는 인유신은 조금 설렜다.
그리고 도착한 현규하의 오피스텔에서, 거듭 놀랐다.
처음은 넓은 창으로 보이는 근사한 한강의 경치 때문이었고, 그다음으로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내부 인테리어 탓이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해도 거주 공간에는 그 주인의 흔적이 묻어나기 마련이었다. 인유신도 최저 임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는 있지만 햄스터도 기르고, 다육 식물도 키운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놔둔 책들도 있었다.
현규하의 오피스텔에는 그게 없었다.
기본적으로 내장된 인테리어는 아주 깔끔하고 고급스러웠지만, 그뿐이었다. 모델 하우스처럼 정비된 공간 안에 ‘현규하’라는 개인의 흔적은 어디에도 묻어나지 않았다.
헌터의 집이라면 적어도 예비로 쓰는 무구 몇 개는 있을 텐데 말이다.
“어……. TV는 안 보시나 봐요? 하긴, 요새는 TV 없는 집도 많으니까.”
당혹스러워서 무심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현규하가 휴대폰을 터치했다.
“뭐 하세요?”
“TV 사려고요. 바로 배달하라고 할게요. TV 화면은 크면 클수록 좋죠?”
“아, 아뇨! 저도 보는 건 아니고!”
인유신은 얼른 현규하의 손을 붙잡았다.
“그냥 집에 놀 만한 게 없길래 평소에 규하 씨가 뭐 하고 시간 보내나 궁금했을 뿐이에요.”
“아무 생각 안 하고 그냥 누워 있는데요.”
“……아무 생각도 없이요?”
“네.”
현규하는 턱을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하다가 말을 수정했다.
“요새는 아니에요. 유신 씨 생각을 하거든요. 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당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들도 가끔 떠올라요. 아, 이제 이런 얘기 안 하기로 했지.”
그 말을 하며 현규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다시 놓치는 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인유신은 축제 부스에서 느꼈던 그의 손과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의 차이를 생각했다. 시체처럼 온기가 없던 손은 자신의 곁에 머무른다는 것만으로도 온화한 활력이 감돈다.
“규하 씨는 취미 같은 거 없어요?”
“글쎄요……. 취미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가지는 거니까?”
손을 꼭 쥔 채, 현규하가 그를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가죽 특유의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는 소파는 그곳에 앉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던 것처럼 깔끔했다.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이런 얘기를 처음 하는 것처럼 현규하는 고민하며 느리게 말을 이어 갔다.
“만약에 100미터 달리기를 한다고 쳐요. 100미터 달리기는 오래달리기와는 달라서 전력 질주를 해야 하잖아요. 달리고 싶지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게 상품으로 걸려 있어서 꼭 1등을 해야 해요.”
“강제로 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쉽게 표현하자면 그렇죠. 전속력으로 골인 지점까지 질주하도록 트랙에 억지로 내몰린 상황이라고 보면 돼요. 근데 말이야…….”
현규하가 양손의 검지를 하나씩 들고 움직였다. 왼손가락은 달리는 사람이었고, 오른손가락은 골인 지점이었다.
“이만큼 10미터를 달리면 골인 지점은 9미터 멀어져요. 20미터를 달리면 18미터 멀어져요. 결과적으로 가까워지기는 하지만 계속 계속 멀어지는 거죠. 다른 건 하나도 못 하고 달리기만 하니까 그냥 포기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1등을 해서 상품을 반드시 따야 하거든.”
“…….”
“이게 나예요.”
현규하가 왼손의 검지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였지만 인유신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 짓을 20년쯤 하다 보니까 달리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생각나는 것도 없어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꺼낼 수 있는 말은 겨우 그것이었다. 그가 걸어온 지난 삶의 표피만을 간신히 들여다보고 건네는 얄팍한 걱정.
“힘들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아무리 달려도 골인 지점에 도착하지 못하니 무기력해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소극적인 자살은 방조했었죠. 차도로 일부러 뛰어들지는 않아도 나한테 덤벼드는 자동차는 굳이 피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 감각이에요.”
인유신의 표정을 본 현규하가 웃음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이젠 자살을 방조하고 싶다는 생각 안 해요. 당신이 있으니까.”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며 사르르 미소하는 눈동자에는 한 점의 그늘도 없다. 그의 눈동자에 자신이 담길 때면 늘 그랬듯이.
하여 인유신은 그의 지독한 권태를 알았다.
【———!】
격을 잃고 실추한 신의 파편이 울부짖는다. 이지를 상실한 신은 아무리 뻗어 봤자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개구리의 팔을 뻗는다. 발돋움한다. 뛰어오른다. 절규한다. 거듭되는 무의한 공격에 그림자의 파편은 지쳐 간다.
남자는 그저 한없이 무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치킨 게임이다. 파편의 체력이 다하느냐, 남자의 마나가 다하느냐. 먼저 한계에 달하는 쪽의 죽음.
마나를 끊임없이 소모하며 유지하는 이능에 끝내 과부화된 회색 뇌세포가 비명을 지른다.
아아.
먼저 종극에 달한 건 내 쪽인가.
상공을 자유로이 노닐던 육체가 실이 툭 끊어진 것처럼 낙하한다. 거꾸로 뒤집힌 시야가 섬전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지칠 대로 지친 파편이 울부짖는다.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피막으로 덮인 손이 날아온다. 남자는 어둑한 그림자로 검게 뒤덮이는 시야를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것은 굉장히.
자유로운 감각이었다.
“유신 씨, 일어나요. 자기 전에 양치는 해야죠.”
“……으음.”
“키스로 깨워도 된다는 뜻이라고 이해하겠습니다.”
비몽사몽 졸던 와중에도 그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정말 현규하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힉!”
“이 잘생긴 얼굴을 보고 비명부터 지르다니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규하 씨도 눈 떴는데 제 얼굴이 앞에 있으면 놀랄 거잖아요!”
“주인님의 은총에 황송해서 키스로 갚아 줄 건데요.”
“안 갚으셔도 돼요.”
인유신은 재빨리 엉덩이를 뒤로 움직여서 현규하를 피했다. 헬스장에 감금되었던 보람은 있는지 민첩함이 예전보다는 나아진 거 같긴 하다. 그래 봤자 스탯은 여전히 F였지만.
조금 진정한 뒤에 숨을 돌리며 현규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현규하는 반사적으로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가 알고 있는 현규하가 맞다. 인유신은 손을 뻗어 현규하의 새끼손가락 끝을 살짝 붙잡았다.
파편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현규하가 아니다.
그의 존재감을 재차 확인한다.
“저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계속하셔도 되고, 저한테도 그 말 해도 돼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그게 좋을 거 같아요.”
“…….”
“대신 던전 갈 때 저 꼭 데리고 가세요.”
인유신은 알았다. 허신 아타베이라와 마주했을 때 자신이 없었다면, 이 남자는 분명히 그곳에서 소극적 자살을 꾀하며 죽었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바라는 거예요.”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규하는 가벼이 대꾸하며 새끼손가락과 닿은 인유신의 손을 잡아 새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