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214)

“예?”

“이 포션을 마시면 따로 휴식기 가질 필요 없이 근육이 회복됩니다. 단기간에 몸 만드는 데는 이만한 게 없죠. 운동선수도 복용하는 합법 약물이에요. 정말 정말 비싸지만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으아아아악.”

단백질 보충제.

날마다 체력단련실에 감금돼서 고문당하고 있는데 편들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헌터들은 현규하에게 일대일로 트레이닝을 받는 인유신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믿었던 이혜연마저 배신했다.

“근육은 다다익선이야, 유신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남 좋은 일은 절대 안 하는 규하가 직접 건강까지 챙겨 주는 기회가 흔치 않거든? 저놈 또 언제 마음 바뀔지 모르니 지금 뽕 뽑아 놔. 그래야지 나중에 혼자서도 운동 잘하지.”

그 말을 하는 이혜연은 옆에서 바벨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체구는 아담하지만 그녀는 강체술사다. 3 대 700 따위는 눈 감고도 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만이 아니다. 여기의 헌터들은 대기 시간에 쉬지도 않고 굳이 체력단련실로 와서 굳이 쇠질을 했다.

“사람 살려…….”

헬스에 미친 놈들 사이에 끼여서 근육에 압사당하는 공포에 인유신은 울고 싶었다.

“울지 마요. 근 손실 납니다.”

“흐어어엉.”

* * *

생수와 술밖에 없던 냉장고가 근래 꽤 다채로워졌다. 녹색 채소, 토마토, 버섯, 저지방 우유, 아몬드, 잡곡밥, 연어, 닭가슴살 등등. 전부 인유신을 위한 식사 메뉴다.

현규하는 닭가슴살 스테이크를 굽고, 현미밥, 고구마, 아보카도와 과일샐러드를 도시락에 착착 넣었다. 간식으로 무가당 요거트와 호두도 챙겼다.

오늘은 비번인 금요일이었으므로 인유신과 함께 체력단련실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끊임없이 땀과 대화를 나누고, 직접 싸 온 도시락을 먹는다. 훌륭한 데이트였다.

“유신 씨, 데리러 왔어요.”

옥탑방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즐겁게 웃으며 현관을 두드렸는데 잠잠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규하는 바로 손잡이에 그의 마나를 주입하여 문을 열었다.

“찌익. 찍!”

덜컹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6세가 짜증을 냈다. 하지만 현규하에게는 그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인유신이 없다. 사라졌다, 그의 앞에서.

툭. 손에서 스르르 떨어진 도시락이 바닥에 나뒹굴고.

한순간에 모든 감정이 걷힌 눈동자가, 무연히 추락했다.

“아니, 인유신! 못 본 사이에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승기야아……. 으허어엉. 내 얼굴 반쪽 됐지?”

“존나 건강해졌네. 너 요새 뭐 운동해? 어깨도 좀 넓어진 거 같고 옷에 핏이 딱 섰는데?”

“아, 진짜?”

몸매가 좋아졌다는 말에 솔깃해졌다. 안 그래도 샤워할 때 보니 말랑말랑하던 배에 아주 사아아알짝 복근의 흔적이 드러난 참이었다.

역시 모든 해답은 근육인가.

‘헉. 이게 아니야……!’

체력단련실에서 고문당하며 세뇌된 근육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만 쉴게요ㅠ 전화 꼬박꼬박 받을 테니까 서울 멸망시키지 마세요ㅠㅠ]

슬슬 현규하가 옥탑방의 문을 두드릴 시간이었다. 그가 놀라지 않도록 문자부터 보낸 뒤에 박승기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떡볶이와 파전과 순대와 어묵과 막걸리를 정신없이 입에 욱여넣으며.

“과자도 마음대로 못 먹게 하고, 이야, 너희 과 떡볶이 맛집이네, 보충제는 토할 것처럼 맛이 없는데 닭가슴살까지 물리고, 파전에 오징어도 많이 들어가서 진짜 맛있다.”

“야. 썰을 풀든지 처먹든지 둘 중의 하나만 해.”

“네가 식단까지 관리당하는 고통을 알아?”

랩실 노예와 헬스장 탈주 노비는 게이트학과의 축제 부스 구석 자리에서 경쟁적으로 떡볶이를 먹었다.

집에서 도망쳐 봤자 만날 사람은 박승기뿐인데, 학교로 찾아왔더니 마침 오늘이 축제였다. 벌써 대학교 축제 시즌인데 체력단련실에 감금당해 있느라 세월이 가는 것도 몰랐다.

“근데 교수님이 너 용케 밖으로 보내 주셨네?”

“현규하 애인이니까 미리 잘 보여서 약 좀 쳐 놔야 한다고 널 팔았어.”

“…….”

인유신이 노려보는 틈에 박승기는 하나 남은 삶은 계란을 얼른 입에 넣었다.

“승기 형, 오늘 밖으로 못 나올 거 같다더니 웬일이에요?”

랩실에서 갈리는 와중에도 조교 일도 하고, 교수의 술 상무 노릇도 하며 두루두루 발이 넓은 박승기에게 인사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부대끼며 자랐으니 인유신에게는 만만한 놈이다. 하지만 박승기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전액 장학금을 받아 가며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자신을 팔아먹긴 해도.

‘나도 대학을 갔으면 지금쯤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겠지?’

어쩌면 그에게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스 밖은 학생들과 놀러 온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건너편에서는 학교 방송부에서 축제의 현장을 생중계한다고 촬영 중인데, 재치 있는 입담의 인터뷰이가 있는지 웃음소리가 터졌다.

땀내 나는 근육들로부터 도망치니 아무리 시끄러워도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내일부터는 규하 씨가 또 식단 관리할 거니까 오늘은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이고, 혀에 좋고 근육에 안 좋고, MSG 팍팍 친 거로 근 손실 될 때까지 다 먹을 거야. 막걸리도! 소주도! 콜라도!’

불현듯 부스 밖의 소란이 커졌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마저 언뜻 들렸다. 박승기의 옆에 앉아 있던 학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예인이라도 왔나?”

“아직 낮인데? 무대는 5시부터 아니야?”

“뭐, 일찍 왔나 보죠.”

그러거나 말거나 인유신은 떡볶이 국물을 듬뿍 적신 납작만두를 흡입했다. 아까 오다 보니 어묵탕을 파는 부스도 있었다. 그 옆에는 콘치즈.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인유신은 행복한 공상에 담뿍 취해 있느라,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 걸 깨닫지 못했다.

“야, 야.”

박승기가 낮은 목소리로 채근하며 다급히 발로 툭툭 그를 쳤다.

“뭔데.”

의아하게 고개를 든 그의 손에서 젓가락이 덜그럭 떨어졌다.

부스 앞에, 현규하가 서 있었다.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몹시 놀라웠지만 그런 의문을 해결하고자 할 때가 아니었다. 인유신은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나며 허겁지겁 입술의 떡볶이 국물을 닦았다. 그래 봤자 테이블에 떡볶이의 잔해가 널려 있긴 하지만.

“오늘! 딱 오늘까지만 떡볶이 먹고 내일부터 열심히 또 운동하려고 했어요! 진짜요!”

“…….”

“내일부터 다시, 아니 이것만 다 먹고…….”

“…….”

“아니, 아니! 지금 당장 헬스장에 갈게요!”

“…….”

현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제풀에 찔려서 자진 납세를 하고 휴대폰과 가방을 챙기던 인유신은 뒤늦게 흠칫했다.

‘……규하 씨가 왜 조용하지?’

평소라면 이쯤에서 쪽팔린 소리를 할 타이밍인데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게다가 왠지 주변까지 조용했다. 수군거리는 말소리와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가 뒤섞여서 들려야 하는데 말이다.

탈주했다가 붙잡힌 게 찔려서 얼굴도 못 보고 있던 인유신은 힐끔 시선을 올렸다.

“……!”

그리고 너무 놀라서 딸꾹질을 할 뻔했다.

부스 앞에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는 현규하의 얼굴에는, 정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모든 감정이 거세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볼 때면 짓궂은 웃음이 감돌던 눈동자는 버석버석하게 메말랐고, 혈색이 없는 창백한 낯은 절망처럼 식어 있었다. 종종 현규하를 보며 걱정했던 지독한 권태감마저도, 오히려 반가운 것이었다.

즐거웠던 축제의 분위기마저 바스러진 재색으로 이염된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워하고 기뻐하던 좌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길한 감각을 삼켰다.

그 사이로, 현규하가 걸어왔다.

뚜벅뚜벅. 조용히 내디디며 다가오는 워커 소리는 언젠가의 만남과 같지만, 인유신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적인 감정의 무게에 당혹했다.

“……규하 씨.”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있던가.

워커 소리가 코앞에서 멈추었다. 항상 올려다보던 남자였지만, 오늘따라 그 높이가 아득하다. 메마른 잿빛의 시선이 삐걱삐걱 힘겹게 움직여, 인유신을 담는다.

식은 손끝이 느슨히 올라와 뺨을 어루만졌다. 그곳에 있는 걸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하여.

손끝에서 번지는 가느다란 떨림처럼 나직한 한숨이 허위허위 흐르고.

다음 순간, 인유신은 절박한 품에 안겨 있었다.

“……나 버리지 마요.”

뒤통수를 부여잡듯이 세게 안은 손이, 허리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은 팔이, 이마와 뺨으로 쏟아지는 숨결이. 전부. 현규하가.

[이름 :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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