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겠네. 다음엔 나도 보여 줘요.”
- 저희 집에 놀러 와서 하룻밤 주무시고 갈래요?
“지금 갑니다.”
- 오, 오늘은 제가 준비가…….
시시한 한담 끝에 통화를 종료했다. 늦어도 11시에는 꼭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의 인유신이다. 지붕 밑으로 비치던 방의 불빛은 곧 꺼졌다.
현규하는 부스럭거리다가 이내 고요해지는 기척을 들으며 자신도 지붕에서 눈을 감았다. 이어 정확히 3시간 뒤, 그는 잠에서 깼다.
‘인유신은 어디에 있지?’
깨자마자 위치 좌표를 확인했다. 인유신은 여전히 지붕 아래의 옥탑방에서 잠들어 있다.
해가 뜨기까지는 긴 시간이 남았다. 던전이었다면 다시 사냥을 하러 갔을 테고, 오피스텔이었다면 끔찍한 무료함에 취하지도 않는 술이나 마셨을 테지만, 지금은 바로 아래에 인유신이 있다. 현규하는 해가 뜰 때까지 가만히 지붕에 누워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우울증이라 할 수 있다던데,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지친 권태감도 역시 우울증인가. 현규하는 고민한다. 그 고민마저도 이윽고 사라지고, 현규하의 머리는 텅 빈다. 늘 그러했듯이.
동쪽 하늘이 부옇게 밝아 오기 시작할 무렵, 현규하는 어젯밤의 인유신으로부터 미묘한 이상을 깨달았다.
불을 끄기 전까지 창밖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또 커튼을 안 치고 잠들었군. 암막 커튼을 달아 놓았으면서 활용도 안 하고 뭘 하는지.’
현규하는 지붕 아래로 상체를 숙였다. 역시 창문에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았다. 사이코키네시스를 이용해서 커튼을 소리 나지 않게 살살 움직여 창문을 가렸다. 창가의 다육 식물 화분들도 떨어지지 않고 무사했다.
매트리스가 벽에 붙어 있어 잠든 인유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아쉽다. 하지만 진짜 스토커는 아니니까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자는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인유신의 존재감이 확인되지 않으면 돌아 버릴 것 같았고, 유기되었다는 절망감으로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어졌기에, 틈틈이 안위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뿐이었다.
익명의 스토커가 창문을 가려 준 덕에 인유신은 곤한 수면을 취하다 깨어났다. 깜빡하고 커튼을 안 치는 날마다 커튼을 쳐 주고 있으니 인유신도 자꾸 까먹는다는 걸 현규하는 모르고 있다.
“6세야. 밤에 잘 놀았어?”
“찌익.”
밤새도록 쳇바퀴도 돌고, 케이지를 탈출해서 탐험하다가 돌아오고, 사료도 야금야금 까먹고, 모래 목욕도 탈탈탈 하고, 현규하가 몰래 커튼을 치는 것까지 목격한 6세가 기분 좋게 울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손을 뻗어 6세를 쓰다듬어 준 인유신은 하품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출근 준비를 할 시각이다.
현규하도 지붕에서 아쉬운 걸음을 떼며 오피스텔로 날아갔다. 그도 씻고 인유신의 출근길에 바이크를 태워 줘야 했다.
변함없는 아침이었다.
* * *
현규하가 지하에 주차한 바이크를 타고 올라오기를 입구에서 기다리던 퇴근길이었다. 온종일 붙어 있는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슬쩍 검색을 해 보았다. 다시 검색해 본다고 해서 어젯밤에 찾아보았던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
‘루마니아에는 지금 왕이 없는데…….’
루마니아-세르비아 왕정이 무너진 건 수십 년 전이다. 군주제가 폐지된 나라에도 과거 왕족이었던 왕위 요구자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현규하의 말이 그들을 뜻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루마니아-세르비아 왕실의 후손들을 찾아봤지만 현규하와 닮은 남자는 없었다.
‘이쪽도 잘생겼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래도 규하 씨가 더 잘생겼어.’
그렇다면 역시 농담이었나. 머릿속이 더 꼬이기만 한다. 가까이 느껴지는 인기척에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올렸다.
“실례지만 민안과의 인유신 씨 맞으신가요?”
“네. 제가 인유신인데 누구신지요?”
“하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성호 길드의 임지훈입니다.”
남자가 영업용 미소와 함께 명함을 내밀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길드로 인유신 씨를 모시고 싶어서요. 저희 성호 길드는 아직 규모는 작지만 B급 헌터 중에서도 상위권이신 장성국 헌터님을 비롯한 여러 헌터님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관심이 있으시다면 자리를 따로 마련해서 자세한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어, 그게…….”
“지금 바쁘시다면 편하신 시간대를 말씀해 주세요. 퇴근 후나 주말도 괜찮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인유신이 당황하여 눈만 깜빡거리는 사이, 어깨에 손이 가볍게 얹혔다. 현규하였다.
“나중에 보고 연락할게요. 지금은 우리가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길이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딱 봐도 어리고 만만해 보이는 인유신에게 말을 쏟아 내며 밀어붙이던 남자는 현규하가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얼른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깜빡거리는 인유신의 손에서 명함을 낚아챈 현규하가 짝짝 찢어서 버렸다.
“이런 듣보 좆소 말고 기왕이면 대형 길드로 가요. 슬슬 경쟁 들어간 모양이니 하루 이틀만 존버하면 연봉은 억대로 올라갈 겁니다.”
“억이요? 제 연봉이요?”
“물론이죠. 그럼 핑계를 사실로 만들기 위해 정말 데이트나 하러 가죠. 저녁 뭐 먹을래요? 지난번의 그 고깃집?”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인유신을 데리고 저녁을 먹은 현규하는 평소처럼 지붕 위에서 2시간마다 전화한 뒤 그를 재웠다.
그리고 이틀 후, 인유신은 정말 억대의 연봉을 제안하는 메일을 받았다. 대기업인 양사 그룹 산하의 안팡 길드가 시작이었다.
사방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때로는 집 앞에서. 때로는 민생안정과 앞에서. 때로는 메일로.
설사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깨달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자신은 현규하를 낚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규하 씨 때문에 이러는 거죠?”
“주인님과 내가 한 세트로 모두에게 인식되고 있다는 기쁜 방증입니다.”
다른 때라면 뻔뻔한 헛소리를 못 들은 척할 인유신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맛이 없다는 인유신의 점심을 위해 샌드위치를 포장해 온 현규하는 비닐봉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일단 먹으면서 해요.”
“네…….”
수긍하는 말과는 달리 인유신은 생각에 잠긴 듯 샌드위치를 깨작거렸다. 즐겨 먹던 에그마요 샌드위치인데도 영 맛이 안 느껴지는 모양이다.
현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제 될 게 뭐가 있나. 최저 임금만 겨우 받던 그의 연봉이 몇 배로 뛰었는데.
“좋지 않아요? 그 돈이면 가고 싶다던 대학교도 갈 수 있을 텐데요.”
“그렇지만 제가 잘나서 받는 돈이 아니잖아요.”
“주인님의 애완쥐가 잘나서 받는 거니 주인님 돈이 맞죠. 현규하라는 로또에 당첨된 셈 쳐요.”
“아니요. 달라요.”
제 의견을 좀처럼 내세우지 못하는 인유신의 목소리가 드물게 단호하다. 그리고 현규하는 그의 단호함이 언제 나오는지 알고 있다.
“이건 일종의 사기나 다름없잖아요. 테이밍을 해제하기만 하면 규하 씨와도 끝인데.”
아아. 역시.
현규하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실은 헌지국의 과장님이 다음 주에 인사 이동하면 7급으로 특채해 주겠다고 하신 것도 거절했어요. 저에게 오는 관심은 전부 규하 씨가 누려야 할 것이지, 제 몫이 아니에요.”
“…….”
“근데 정말 해제할 방법을 찾는 게 어려워요. 논문이랑 책도 틈틈이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진척이 없어요. 죄송해요.”
어떻게든 제 목을 쥐고 있는 목줄을 손에서 빨리 놓기 위해 바둥거리는 그의 주인을 말없이 응시했다. 목줄이 잡혀 있다는 안정감, 주인에게 봉사한다는 충족감, 그로 인한 즐거움.
……정말 길든 개새끼가 되어 가고 있다.
입술이 비틀렸다. 살의. 그리고 살의. 9살 이후 언제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 꿈틀거린다.
죽일까. 가당치도 않게 길든 개새끼 흉내를 낼 필요도 없이. 쉽고. 빠르고. 편하게.
〈알고 있어요. 제가 규하 씨를 걱정하는 게 주제넘은 행동이라는 건요.〉
약하디약한 주제에 걱정스레 바라보던 눈동자. 그를 볼 때면 다채롭게 변하는 감정의 색채. 한쪽 접시에 살의를 얹은 머릿속의 천칭이 맹렬하게 삐걱거리다, 기울어진다.
인유신은 목줄이 잡혀 있을 만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주인이다. 현규하는 웃음 지으며 주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정말 개새끼였다면 혀로 핥았겠지, 라는 생각 속에. 보드랍고 따스하다. 보스스한 솜털이 난 피부가 흠칫 떨렸으나, 그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는다.
“어떤 조건을 가져와도 다른 길드로 옮길 생각은 없단 거죠?”
“네. 옮긴다 해도 제 능력으로 가고 싶어요.”
“그럼 더는 유신 씨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경고할게요.”
인유신은 의아해졌다. 길드들 사이의 연락 수단을 통해서 경고하는 걸까, 싶었는데 현규하는 옥상 정원을 배경으로 셀카를 찰칵찰칵 찍었다.
“음, 필터나 보정 따위 없어도 완벽해. 이 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 하나 골라 봐요.”
“무슨 사진인데요?”
“유신 씨 휴대폰의 배경 화면으로 할 용도 겸 인증용입니다.”
“……?”
여전히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셀카 중 하나를 골랐다. 다 잘생겨서 하나만 고르는 게 어려웠다는 건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현규하는 그 사진을 정말 인유신에게 문자로 보내더니 +999가 달린, 무수하게 많은 대화방 목록을 다 무시하고 상단의 오픈 채팅방에 접속했다. 말 한마디 없이 현규하의 사진만 올라오고 있는 방이었다.
그곳에 사진을 올렸다. 다음과 같은 멘트와 함께.
[날 귀찮게 하는 건 상관없지만 내 남친은 귀찮게 하지 마요.]
순간, 채팅방이 멈추며 묵직한 정적이 내려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어 읽기도 버거울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채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뭐야 시발 어그로 아님???]
[근데 저 사진 첨 봄; 규하가 셀카 공개한 적 한 번도 없잖아]
[헐 진짜?? 진짜진짜??]
[현규하 사랑해!!!ㅠㅠㅠㅠㅠㅠㅠ]
[규하야 지금 뭐해? 점심 먹었어?]
[남친이 왜ㅠㅠ누가 괴롭혀?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