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214)
  • “아이고, 물론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하하!”

    현규하의 얼굴이 굳자 노 팀장은 서둘러 농담이라며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그의 표정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공기가 어색하게 경직되고 노 팀장의 얼굴에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걱정된 인유신이 코트를 살짝 당기면서 올려다보았다.

    “규하 씨?”

    현규하가 나직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야. 내가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눈치 안 보고 합법적으로 유신 씨 옆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인데.”

    “지금까지 눈치를 봤단 말이에요?”

    “당연하죠.”

    당당한 어조였다.

    “내가 왜 아침마다 사무실에 커피와 디저트를 돌렸다고 생각해요?”

    홍 팀장을 커피 셔틀로 부려 먹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포토존 같은 걸 만들어서 귀찮게 해도 얌전히 사진을 찍어 줬잖아요.”

    그건 직원들이 진상 퇴치 토템님에게 자진해서 바친 공물이었다.

    “브이로그 촬영으로 데이트를 방해받아도 아무 말 안 했고요.”

    애초에 남의 직장에서 데이트를 한다는 전제 조건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지적하고 싶었다.

    “유신 씨가 근무 시간에 일 한다고 바빠서 나한테 신경을 안 써도 방해 안 하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요.”

    “그건 확실히……. 눈치를 보셨네요.”

    인유신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눈치 본 게 맞긴 하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던 권성길과 이혜연도 동조했다.

    “저놈이 다른 사람 눈치를 볼 때가 다 있네?”

    “사랑이 뭐라고 지 잘난 맛에 살던 놈까지 변하게 하냐. 어우, 징그러워. 성길아. 나 팔뚝에 소름 돋은 것 좀 봐.”

    그리고 노 팀장과 오하나는 할 말을 잃었다. 현규하가 민생안전과에서 무슨 갑질을 하는지 타 부서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다 났는데 눈치를 봤다니? 그게 눈치를 본 거였다면 안 볼 때는 뭘 어쩌려고……?

    노 팀장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머릿속을 환기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헌터님. 이능부 소속 헌터가 되시겠다는 거,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여겨도 될까요? 숙고하실 시간이 더 필요하신지요?”

    이능부와 계약한 헌터는 넓은 의미에서 공무원에 포함된다. 민간 업체인 헌터 길드에 비하면 연봉이 박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세금 혜택이며 복지를 마련해도 사기업의 연봉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십 년 전, 정부 소속의 공무 헌터가 주축이 된 쿠데타를 간신히 진압한 정부는 방침을 달리했다. 현장직의 공무 헌터는 군권을 비롯한 어떤 형태의 권력 행사도 불가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상위 랭커들은 이혜연처럼 헌터라는 일종의 특권적 신분에 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사명감을 가진 일부만이 정부에 소속되었다. 그 외에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헌터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아예 고위직으로 출세하려는 야망이 있거나.

    “내 조건은 유신 씨와의 합법적인 데이트뿐입니다.”

    “그건……. 음, 음. 아마 유신 씨를 헌터님을 전담하는 매니저라는 형식으로 하면, 으음, 될 겁니다! 제가 되게 하겠습니다!”

    “홍 팀장님과는 달리 얘기가 통해서 좋네요.”

    “제가 바로 위에 보고 올릴 테니, 잠시만, 진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 팀장은 휴대폰을 움켜잡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혜연이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야, 현규하. 다 좋은데 네 멋…….”

    “유신 씨, 부서 변경되어도 괜찮아요? 민안과에 계속 있고 싶다면 취소할게요.”

    ‘의견을 듣지도 않고 네 멋대로 유신 씨 처우까지 결정하냐.’라는 논지의 지적을 하려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규하가 인간이 됐잖아……?”

    인유신은 혼잣말을 못 들은 척하고 대답했다.

    “저야 뭐 어차피 계약직이니까 아무 데나 편한 대로 가면 좋죠. 근데 정말 제가 싫다고 하면 취소할 생각이셨어요?”

    “그럴 리가요. 당신과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서 죽을 거 같은데 합법적 데이트를 어떻게 포기하죠? 주인님 설득하려고 했어요.”

    “…….”

    얼굴로 설득하든 궤변으로 설득하든 반강제로 설득되었을 거 같긴 하다.

    그리하여 현규하의 폭탄선언은 이능부를 다시 한번 발칵 뒤집어 놓았고, 현규하는 정말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폭탄선언을 한 지 1시간도 안 지났을 때였다.

    다른 헌터도 아닌 S급 헌터의 영입이다. 통상적인 절차라면 기자 회견부터 하겠지만, 이능부로서는 현규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도장부터 찍는 게 시급했다. 지난날 기회를 놓쳤던 장관은 현규하와 나란히 선 홍보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줄 사인까지 받아 냈다.

    이능부 장관은 관용차까지 보내어 청사까지 모셔 오려 했으나, 현규하는 단칼에 거절하고 바이크를 탔다. 덕분에 인유신도 얼떨결에 그의 등 뒤에 매달려서 따라와야 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약하는 자리까지 동석했고, 말로만 들었던 유 변호사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 이분이 바로 그 인유신 씨로군요.”

    진짜 현규하의 지인들에게 무슨 소리가 돌고 있는 걸까.

    어, 하는 사이 계약은 후루룩 끝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인유신은 현규하와 나란히 주차장으로 가고 있었다. 평소의 퇴근길처럼.

    현규하의 엄지가 손등을 부드럽게 긁었다.

    “무슨 생각 해요?”

    그의 손끝이 스치는 곳으로부터 은은한 전류가 튀는 것만 같아 인유신은 어깨를 흠칫했다. 붙잡힌 손을 슬쩍 빼내려 했지만 현규하는 놓지 않았다. 대신 팔을 당겼다.

    “으앗.”

    한순간에 훅 딸려 간 인유신은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 심장이 한차례 콩닥거렸다. 본의 아니게 그와 밀착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단단한 몸이었다. 엄청난 근육질처럼 보이는 것도 아닌데 진짜 몸이 어쩜 이렇게 단단한 거지.

    고개를 올린 인유신은 이번에는 놀라서 후다닥 뒷걸음질했다. 현규하와, 그러니까 심장에 해로운 얼굴과 너무 가까웠다.

    뒷걸음질한 만큼 현규하가 허리를 굽혔다. 긴 속눈썹의 결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빙긋 가늘어진 호박색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인유신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여긴 그, CCTV도 있는데요.”

    “그렇죠.”

    “퇴근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야근하다가 집에 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죠.”

    “으, 조금만 떨어지시면 안 될까요.”

    “싫어요. 바로 옆에 내가 있는데도 다른 생각만 하고 있잖아요. 내가 용서할 수 있는 다른 생각은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 생각뿐입니다.”

    인유신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다시 열었다.

    “다 끝난 마당에 이런 거 질문해도 되나 싶어서요.”

    “뭐가요?”

    “그냥……. 규하 씨는 지금까지 어딘가에 소속되는 걸 싫어하셨잖아요. 근데 테이밍을 해제하면 끝인 관계인 저 때문에 이능부와 계약하셔도 괜찮을까 해서요.”

    스카우트하기 위해 쫓아다니던 길드원에게 대꾸도 없이 중지만 치켜들고 게이트로 들어가는 현규하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이 된 길드원의 영상은 지금도 짤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규하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인유신을 내려다보았다.

    “유신 씨는 언제나 끝부터 생각하는 사람이군요.”

    “습관이라서 그래요.”

    뭐가 되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그때가 닥쳤을 때 받는 충격이 덜하다. 두 번의 파양과 한 번의 죽음을 겪은 인유신의 방어 기제다.

    “길드 가입을 안 한 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어딘가 소속되면 귀찮은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데다가, 내 머리 꼭대기에 이래라저래라 휘두르는 놈을 두는 게 싫었을 뿐이지. 날 스카우트하려면 길드장 자리를 갖고 와도 모자란데 이사 따위를 들이대니 짜증이 안 나게 생겼어요?”

    “그쵸, 그쵸. 규하 씨 성격에 남 밑에 들어가서 버티는 건 무리죠.”

    “내 성격이 왜요?”

    “칭찬이에요.”

    “주인님은 마음대로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조종하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래 놓고 정작 얼굴과 궤변으로 밀어붙이는 건 현규하였지만, 아무튼.

    “내 인생을 휘두르는 인간은 아버지 하나만으로 족하니까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고 보니 던전에서 현규하의 입으로 아버지가 왕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던 데다가 머리도 복잡해서 그냥 넘기긴 했었는데…….

    인터넷에 찾아봤을 때도 현규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대중에게 알려진 현규하의 부모는 어머니인 현소라뿐이다. 추측이야 무성하지만 현소라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누구인지도 알려진 바 없었다.

    흔하지도 않은 성이니 그의 현씨도 아마 어머니의 성씨일 터였다. 현재보다 더 보수적인 30여 년 전에 어머니의 성을 이었다면, 미혼모일 가능성이 크다. 진짜 연인도 아닌 자신이 내밀한 가정사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문제다.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는데 현규하가 손등을 다시 둥글게 훑었다. 그의 손이 스치는 피부마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화하게 번졌다. 손가락 끝이 움찔해서 절로 꼼지락거렸다.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다들 궁금해하던데.”

    “안 궁금하다면 거짓말인데……. 제가 물으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유신 씨에게는 말해 줄게요. 하나만 물어봐요.”

    인유신은 비교적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질문을 골랐다.

    “혹시 혼혈이세요? 아버지가 외국인이신가 해서요.”

    “루마니아 사람이에요.”

    머릿속의 상념이 싹 사라졌다. 루마니아라면 그러니까.

    그의 머리를 감도는 의혹을 알고 있는 것처럼, 현규하가 빙그레 미소했다. 내려다보는 눈동자의 앰버색에 옅은 핏기가 감돌았다.

    “네에. 뱀파이어 전설로 유명한 곳이죠.”

    * * *

    -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현규하 헌터는 이능부와 좋은 만남을 지속적으로 가졌……’

    헌터 채용 기사냐 열애설 공개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규하가 인성 개썩창나서 길드에도 안 들어간다고 하던 새끼들 다 어디로 감?ㅋㅋㅋㅋㅋㅋㅋ

    └└그 씹버러지들 공무원 채용하는데 윤리관이나 인적성 검사도 안 하냐면서 악플 달고 있음ㅋㅋㅋㅋㅋㅋ공뭔됐다고 더 물어뜯을듯ㅋㅋㅋㅋ

    └헌터들은 온갖 혜택과 돈 다 빨아먹는데 월급까지 내 세금으로 줘야 한다고? 노력은 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운빨로 각성한 주제에 칼질하고 사람 죽이는 게 깡패새끼랑 뭐가 다름?

    └└응 열폭종자 어서오고

    └현규하한테 5번 차인 나르샤가 또 스카웃하려고 돈 풀었다는 소문 있지 않았음?ㅋㅋㅋㅋ걔네 이제 어케 되냐고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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