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214)

“더, 던전 브레이크?!”

“그거까지는 아니고, 좀 큰 놈이 나올 거 같아요. 금방 정리할 테니까 뒤로 피해 있어요.”

사람들은 담담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S급 헌터라는 사실을 분분히 떠올리면서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무료.]

그를 걱정스레 보는 사람은 인유신 혼자일 터였다. 현규하가 살짝 손짓했다.

“주인님은 여기로 와요. 내 옆이 가장 안전합니다.”

“야! 현규하! 나는?!”

“형은 실드 코어 많잖아요.”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인유신은 자신을 눈에 담는 순간 사라진 그의 권태감을 인식하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타베이라보다는 약하겠죠.”

마수를 이길 수 있겠냐는 의미로 물은 건 아니었지만……. 인유신은 살짝 한숨을 삼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마수를 마주하고도 권태로 지배당하는 남자의 감정은 어떤 색으로 덧칠되어 있을까.

“이 정도면 마수의 체액이 튀지는 않을 거예요.”

현규하는 인유신의 주변에 가벼운 역장을 둘렀다.

부상 입는 상황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체액이 튀어서 더러워지는 상황을 염려하는 걸 보니 손쉬운 상대이긴 한가 보다. 인유신은 살그머니 감도는 염려를 일단 가슴에 묻어 두기로 했다.

불투명한 유리에 상이 맺힌 것처럼 일그러진 게이트의 입구가 진동했다. 심약한 누군가가 작은 비명을 지른 순간.

“샤아아아!”

마수가 사람 하나를 통째로 삼킬 것 같은 거대한 환형의 주둥이를 쩍 벌리며 게이트에서 튀어나왔다. 눈동자가 없는 얼굴 부위를 희번덕거리던 마수는 즉각 가장 앞에 있는 현규하에게 쇄도했다.

지렁이에 지네의 발이 달린 것 같은 형태의 이 마수는 생김새답게 지면 아래에서 이동하는 성질이 있었다. 아마 그래서 안에 있던 헌터들이 놓친 모양이다.

“우와악!”

마수의 그림자가 묵직하게 드리웠다. 마치 현규하와 인유신이 단번에 잡아 먹힌 것만 같았기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으나, 거기까지였다.

“샤앗!”

물질을 부식하는 타액이 떨어지는 주둥이를 크게 벌린 마수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현규하의 사이코키네시스에 붙잡혀서.

“역장 안 쳤으면 큰일 날 뻔했죠?”

“지렁이 침에 샤워하기는 좀 그래요.”

마수의 타액이 역장을 뚫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인유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현규하가 옆에 있으니 마수에 당할 거라는 위험은 전혀 느끼지 않았지만, 쩍 벌린 마수의 주둥이를 코앞에서 목격하니 소름이 돋았다.

‘어우……. 진짜 징그러워.’

세밀하게 주름진 시뻘건 식도와 주둥이 밖으로 자잘하게 돋아난 수많은 이빨이라니. 인유신이 질색하며 눈을 질끈 감자 현규하가 작게 웃었다.

“바로 처리할게요.”

그리고 그렇게 했다.

감독의 흥에 맞춰서 현란한 액션 신을 선보이던 촬영 때와는 달리, 현규하는 마나를 주입한 사인검을 가볍게 한일자로 그었다. 칼에 실린 마나가 허공을 격하여 마수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그게 끝이었다.

“사이코키네시스를 응용한 새로운 스킬을 예전에 개발했었는데, 검기 발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간지 나요.”

갑식이와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가 멋지다는 네이밍 센스의 소유자이니 검기 발사라면 정말 열심히 고민해서 붙인 게 아닐까?

“아니, 저……. 그게, 어어…….”

던전 한 번 같이 다녀와서 현규하의 강함에 무디어진 인유신과는 달리 좌중은 평범한 하루를 살던 사람들이었다.

눈앞에서 마수 한 마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륙당했다. 반으로 쩍 쪼개진 마수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로 코앞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데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둘의 대화에 어버버하고 있는데, 똑같은 마수가 한 마리 더 나왔다.

“이만하면 좀 뒈져라! 이 징그러운 지렁이 새끼야!”

“빨리 불에 태워!”

“파이어 볼!”

“도깨비 불장난!”

“오글거리니까 그놈의 스킬명 좀 그만 불러!”

사냥하는 헌터 공격대와 함께.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사냥하다가 전진 기지 바로 앞에서 놓치는 바람에요. 다치신 분 있나요?”

불에 타오르며 괴로워하는 마수의 머리를 쪼개어 막타를 친 여자가 굽실거리면서 주변에 사과했다. 게이트 밖으로 마수가 튀어나오면 100퍼센트 해당 공격대의 과오였다.

사방으로 머리를 굽실거리던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좌중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무슨 정신적 충격이라도……?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많이들 계시지? 행사라도 있어요?”

“이 팀장님, 그게 말입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 팀장이 상황을 설명하려던 때, 그녀의 옆으로 권성길이 달려갔다.

“누나아!”

“성길아아아!”

150센티미터 남짓한 자그마한 체구의 이혜연에게 권성길은 답삭 매달리며 안겼고, 그를 격정적으로 끌어안은 이혜연은 빙글빙글 돌면서 뜨거운 해후의 정을 나누었다.

얼이 빠져 있는 와중에도 카메라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은 감독이 씨익 웃었다.

“그림 좋은데요, 노 팀장님. 방금까지의 장면들을 홍보 영상에 붙여 넣으면 잘 빠질 거 같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노 팀장은 그 와중에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다른 커플도 힐끔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저 커플의 담담함도 국민 안전이라는 홍보 영상의 주제와 엮어 넣을 수 있을 거 같긴 했다. 물론 정말 그랬다가는 남친이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걸 꺼리는 현규하에게 썰리겠지만.

“오, 저희가 게이트 밖에서 마수를 태우던 걸 홍보 영상에 편집해서 넣는다고요?”

“자세한 건 편집을 해 봐야 알겠지만 권 장인님과 이 팀장님의 포옹 장면도 들어갈 거 같습니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헌터와 안전하게 기다리다가 맞아 주는 가족! 멋진 장면 아닙니까?”

“아이, 참. 대놓고 말씀하시니 좀 부끄럽네.”

이혜연이 히히 웃으며 목에 매달려 있는 권성길의 어깨를 툭 쳤다. 인유신은 둘을 보며 토끼에게 매달린 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헌터계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부다웠다.

“당연히 소정의 출연료는 드리겠습니다.”

“아유, 됐어요. 됐어. 잠깐 얼굴 나오는 건데 그까짓 거 몇 푼이나 한다고. 대신 게이트 밖으로 마수 놓친 거나 좋게 마무리해 주세요. 야, 너희도 출연료는 필요 없지?”

“예에!”

“국가에 봉사한 셈 치죠, 뭐!”

날짜를 착각해서 촬영을 망칠 뻔한 데다, 하필이면 이능부 공무원들 앞에서 마수를 놓쳐서 뜨끔뜨끔하고 있던 공대원들은 흔쾌히 응했다. 제작비가 굳은 노 팀장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내려왔다.

이혜연이 뒤에 권성길을 매단 채 뒤뚱뒤뚱 걸어왔다. 10년 만에 극적인 재회를 한 연인처럼 찰싹 붙어 있지만 듣자 하니 이혜연은 던전에 출근한 게 오늘 아침이었다.

“규하 네가 앞에 나온 놈은 처리해 줬다면서? 인마, 고맙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팡팡 두드리려 했으나 현규하는 단호하게 몸을 피했다.

“어허. 이 누나가 정신이 나갔나. 어디서 임자 있는 남자의 몸을 함부로 건드려요?”

“뭐?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저 지렁이 침에 뇌가 부식됐냐?”

“누나, 누나. 규하 옆에 있는 애가 규하 남친이야.”

“아아! 그 주인님?”

현규하의 지인들에게 어떤 소문이 퍼져 있기에 ‘그 주인님’이 된 걸까…….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힐끔 현규하를 올려다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뻔뻔했으며, 잘생겼다.

“……제 소문이 어떻게 난 거예요?”

그러자 현규하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마치 인유신이 그 질문을 하길 기다린 것처럼.

인유신은 기겁해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들으면 안 된다. 안 듣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괜찮아요. 안 들어도 알 거 같아요.”

“그러지 말고 들어 봐요. 내 남친이라고 하면 노리는 인간들이 많아질 테니까 내가 주인님을 위해서 그중의 한 놈을 본보기로…….”

정말 다행스럽게도, 권성길의 설명을 바로 알아들은 이혜연이 감탄과 함께 인유신을 돌아보며 현규하의 말을 끊어 먹었다.

“인사가 늦었죠? 규하 놈 덩치에 가려져 있어서 내가 미처 못 봤네요. 반가워요, 주인 씨!”

“안녕하세요, 헌터님. 근데 제 이름은 인유신입니다…….”

“아, 이름이 주인인 게 아니라?”

현규하를 바라보는 이혜연의 시선이 조금 기이해졌으나, 곧 납득했다. 현규하가 한 짓이니까.

“아무튼 잘 부탁해요. 만약에 규하 저놈이 괴롭히거든 부담 갖지 말고 나한테 바로 말해요. 내가 저놈의 자식 패 죽이지는 못해도 우리 애들 총동원하면 발목 잡아서 유신 씨가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으니까.”

안면을 트자마자 괴롭히면 꼭 상담하라고 부부에게 나란히 듣고 말았다. 인유신이 현규하의 인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고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 때, 노 팀장이 서글서글하게 끼어들었다. 옆에는 일단 뭐든지 디카로 다 찍고 있는 오하나도 있었다.

“오늘 정말 두 헌터분 덕분에 큰 시름을 덜었습니다. 영상도 아주 멋지게 잘 나올 거 같아요. 듣던 대로 사이도 좋으시군요.”

“안 친해요.”

“난 이 부부 모릅니다.”

이혜연과 현규하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노 팀장이 웃음을 지었다.

“하하, 두 분이 참 남매처럼 보기가 좋습니다. 이참에 이혜연 헌터님처럼 현규하 헌터님도 저희 이능부 소속이 되시는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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