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14)

“유신 씨에게 사랑받기 위한 내 마음의 좌표요.”

“앗, 네.”

“덕분에 합법적으로 땡땡이를 칠 수 있게 돼서 좋지 않아요?”

솔직히 그건 그랬다. 연가를 깎는 것도 아니고.

인유신은 마음 편하게 촬영을 구경하기로 했다. 방송 쪽과는 손톱만큼의 인연도 없는 자신이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스튜디오 구경을 해 보겠는가.

인터넷에서나 보던 초록색 크로마키도, 여러 촬영 장비들도 신기했다. 촬영 콘티를 보긴 했지만 마수들 CG가 어떻게 입혀질지 궁금했다.

“유신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세요.”

오늘도 브이로그 촬영 업무를 맡았는지 디카를 든 오하나가 반갑게 인사했다.

“저번에 촬영한 브이로그 반응 보셨어요?”

“아뇨. 잘됐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완전 대박. 업로드한 지 10분도 안 돼서 바로 이능부 채널 영상 중 최고 조회 수 찍었잖아요. 가끔 유신 씨 앓는 댓글도 있어요.”

“어, 저요? 제가 왜요?”

인유신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현규하가 신신당부해서 브이로그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찍히지 않았는데 대체 왜?

“그야 요즘 헌터님이 활발하게 얼굴 비치시는 게 전부 유신 씨 덕분이니까요! 실은 저도 예전에 조금 헌터님 덕질을 했거든요.”

“저한테 악플이나 달릴 줄 알았어요.”

“다른 데서도 유신 씨에게 악플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대체로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 ……에이, 그래도 역시 반응은 안 보는 게 낫겠어요. 선플이 많아도 악플 하나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맞는 말이었다. 신경 쓸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안 보는 게 낫겠지.

“반응이 좋아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30분만이라도 라이브 방송을 하고 싶긴 한…….”

“안 돼요.”

저 멀리에서 감독에게 액션 지도를 받고 있던 현규하가 어떻게 들었는지 단칼에 잘랐다.

“유신 씨가 싫어하잖아요. 라이브에서 실수로라도 유신 씨가 나오면 위약금 물고 이 촬영 엎을 겁니다.”

“물론이죠,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머쓱하게 웃은 오하나는 인유신에게 찡긋 눈인사하고는 디카를 들고 스튜디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어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방송용으로 편집할 건 30초고 유튜브에 업로드할 원본은 길어 봤자 2, 3분짜리 영상이어서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촬영에 대해 몰랐던 인유신의 오판이었다.

“컷! 거기 남자2 표정이 마수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급똥을 참는 표정이잖아. 다시 해요, 다시.”

현규하가 구해 주는 시민 역을 맡은 엑스트라 배우들의 연기 지도도 있었고, CG를 입힐 액션 신도 똑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서 촬영했다.

‘규하 씨는 촬영이 처음이라던데 어색하지 않을까? 막 팔다리에 철심 박아 놓은 것처럼 삐걱거리거나.’

그런 걱정도 했지만 딱히 연기할 것도 없이 마수와 싸우는 시늉만 하는 현규하의 액션은 자연스러웠다. 하긴 뭘 시켜도 잘할 거 같은 남자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감독이 원하던 그림은 나오지 않았나 보다. 잠깐 촬영을 중지한 감독은 턱수염을 쥐어뜯다가 물었다.

“현 헌터. 총 말고 다른 무기는 안 써요? 와이어를 안 써도 액션이 자유자재라서 화면은 잘 나오는데 뭔가 좀 아쉽네.”

“솔플만 하니까 화력으로 밀어붙이려고 총을 주로 쓰는데요.”

“근접 무기는요? 확 느낌이 오는 건 칼이나 창, 뭐 그런 종류가 좋을 거 같은데. 아니면 총검 같은 거라도.”

“대충 다 쓰죠.”

“오오, 그럼 무기를 좀 바꿔 봅시다! 총검, 아니 칼! 헌터의 가오는 역시 칼이지!”

“일본 말 쓰지 마요.”

“잉? 아, 뭐……. 아무튼! 칼입니다, 칼!”

“그건 감독님이나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닌데요.”

단호히 말을 자른 현규하는 자연스럽게 인유신을 돌아보았다.

“주인님, 내 가오를 위해서는 뭐가 좋아요?”

구석에서 멀뚱멀뚱 구경 중이던 인유신은 스튜디오 전체의 시선이 한순간에 자신에게 쏠리자 흠칫했다. 특히 방금 일본 말 쓴다고 지적받았던 감독의 표정이 볼만했다.

현규하의 가오, 아니 멋짐을 위해서는 뭐가 좋을까.

‘다 멋있을 거 같은데.’

현규하라면 파리채를 들고 마수를 때려잡아도 그림이 멋지게 뽑힐 거다. 그렇지만 인유신의 인상에 남는 건 역시 도끼였다. 진상을 퇴치해 준 그 도끼.

“도…….”

도끼, 라고 말하려는데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현규하가 자발적으로 조종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감독은 필사적으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칼! 칼! 칼! 칼! 칼! 칼! 칼! 칼! 카아아아아알!

“카, 칼이 멋있을 거 같아요.”

“그래요.”

현규하는 즉시 아공간에서 환도 한 자루를 꺼냈다. 검날에는 은사로 장식한 별자리와 검결이 각인되어 있고, 칼자루에는 상서로운 문양과 장식이 있는 환도였다.

담당자로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디지털소통팀의 노 팀장이 눈을 빛냈다.

“혹시 그 칼 사인검 아니에요?”

“네. 올해가 임인년이라서 성길 형이 새로 벼려 준 사인참사검이에요.”

“거기다가 권 장인님이 벼린 검이에요? 감독님, 이거 됩니다. 돼요.”

“되죠! 당연히 되죠! 사인검이라면 그거죠?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만들어서 삿된 것들을 벤다는 그 칼! 칼날의 저 별자리가 뭐였더라?”

“북두칠성이요!”

“오오, 북두칠성! 아무튼 사인검을 현 헌터가 들고 있는데 별자리가 도드라진 칼날이 샥 빛나면서 마수를 사냥하고! 크으으……!”

노 팀장과 의기투합한 감독은 하늘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카메라 앞에 섰고 촬영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스튜디오 촬영은 여기에서 끝내죠! 시간 남았지만 바로 게이트로 이동합시다!”

인유신도 촬영 장비를 옮기는 걸 도우려 했는데 스태프들이 극구 만류했다.

“남친님은 편하게 쉬세요! 편하게!”

다들 바쁜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조금 민망해서 구석에 머쓱하게 서 있던 인유신은 갑작스러운 부유감을 느꼈다. 그리고 몇 초 뒤, 허공을 날아서 현규하의 팔 안으로 안착했다.

“음, 역시 밀착하고 있는 게 제일 안정되네요.”

무게감을 확인하고 바닥에 내려놓은 인유신의 정수리에 손을 가볍게 얹으며 그가 눈가를 가늘게 휘었다.

“나 어땠어요?”

“살아 있는 가오였어요.”

빈말이 아니라 평소와는 달리 롱 코트를 펄럭거리면서 칼을 쓰는 현규하는 정말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마수와 대결하는 CG까지 입히면 더 멋지겠지? 인유신은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오면 고화질로 내려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오늘의 돌발 퀘스트.”

현규하는 허리를 굽혔고, 인유신은 주변을 둘러보고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 머리를 쓰담쓰담하며 칭찬했다. 사람 핸들링도 하다 보니 익숙해진다.

그런데도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느껴지는 그만의 좋은 향기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스튜디오를 나와 40분 이동해서 국영 게이트에 도착했다. 서울 근교에 열린 지속 게이트로 해 질 녘의 장면을 잠깐 찍을 장소다.

원래는 여기에서 촬영을 끝내고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와 마저 이어 갈 예정이었으나 사인검을 본 감독이 신내림을 받은 덕택에 일정보다 일찍 끝났다.

“순조롭게 끝나겠는데요? 던전에 별문제가 없다면 이번이 마지막 촬영입니다!”

촬영이 예상보다 이르게 끝나 아침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녹초가 된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당연히 문제는 발생했다.

“뭐야? 여기에서 무슨 촬영 있습니까?”

촬영 장비를 세팅하고 있는 게이트 근처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라서 돌아보니 권성길이었다.

“형님!”

“여어, 인유신이. 잘 지냈냐? 규하 놈이 안 괴롭히고?”

“어음, 네. 형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우리 여보야 마중 나온 건데……. 어, 저기 눈 마주쳤는데 인사도 안 하는 싸가지 없는 얼굴은 현규하 아니야? 그럼 이거 그거야? 이능부 홍보 영상 찍는다는, 그거?”

노 팀장이 놀란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권 장인님! 이혜연 헌터님이 던전에 계신다고요?”

“지인의 공격대에 사람이 부족해서 지원하느라 같이 들어갔는데 이따 저녁쯤에 나오기로 해서…….”

“이거 큰일 났네.”

당혹한 노 팀장은 헌터지원국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해가 질 녘의 시간을 포착하는 짧은 촬영이다.

게이트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던전에서 사냥하던 헌터 일행들은 정오부터 전부 철수하기로 행정적 절차가 진행되었고, 며칠 전에 공지도 된 부분이었다. 현재 내부에 있는 헌터들이 계속 사냥을 한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하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때 게이트에서 우르르 몰려나온다면 오늘 촬영은 망치는 거였다.

다시 촬영 허가를 받고, 게이트 앞의 노점상들도 내보내고, 말 많은 헌터들에게 던전을 비우라는 공지를 하려면 며칠이 더 걸릴지 모른다.

“사장님, 이혜연 헌터님이 지원한 공대가 강은지 헌터님의 공대가 맞죠? 전달은 제대로 했다는데 아마 공대 쪽에서 날짜를 헷갈린 모양입니다. 게이트 안으로는 통화도 안 되니…….”

노 팀장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감독을 돌아보았다.

“일단 촬영 진행하시죠. 안에 있는 공대가 좀 늦게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정 안 되면 CG로 처리하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만.”

“저희 제작비가요…….”

빠듯한 예산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한 실무자의 비애였다.

아무튼 그렇게 촬영은 재개되었다.

게이트를 배경으로 현규하가 마수를 멋지게 정리하고 돌아서는데 롱 코트 자락이 펄럭이면서 석양의 빛이 아름답게 꺾이며……. 대충 이렇게 제작팀의 사심이 넘치는 콘티였는데.

“음.”

막상 게이트 앞에 서서 석양에 비치는 미남이라는 화보의 한 장면을 연출하던 현규하는 칼질은 안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마수가 나올 거 같은데요.”

너무나 여상하게 나온 말이라 그 말의 뜻을 좌중이 이해하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뭐라고요!”

뒤늦게야 당황해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에게 현규하는 여전히 무심히 대답했다.

“게이트 입구의 마나가 조금 심상치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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