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14)
  • “홍보 영상 시안들이요. 여기서 뭘 할지 남친과 고르고 있었어요.”

    “우와아. 어떤 시안을 고르실지 진짜 궁금하네요! 살짝 열어 보고 싶지만 스포일러 없이 영상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위해 참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요, 저희 디소팀에서 헌터님이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나 다름없어요. 100만 원이 넘는 커피 머신도 헌터님 이름을 붙이면 지출결의서 바로 통과될 거 같다니까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이…….”

    “규하 씨! 컷!”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남친이 커피를 자주 마시는 게 아니라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오하나 씨 얘기를 들으니까 괜찮은 아이디어네요.”

    “앗, 제가 헌터님에게 뭔가 도움이 되었나요?”

    “1층 탕비실에 커피 머신이나 하나 장만해 두려고요.”

    말과 동시에 현규하는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고문만이 아니라 잡무까지 봐주는 로펌이에요. YJ로펌, 많은 관심 바랍니다. 특히 내 변호사님은 양사 그룹의 부회장님이 추천한 아주 유능한 사람이죠. 유 변호사님, 홍보까지 확실히 해 줬으니까 커피 머신 좋은 걸로 뽑아 주세요.”

    로펌 홍보는 어른들의 사정으로 편집되었지만 유 변호사는 현규하의 카드로 긁은 3천만 원짜리 커피 머신을 배달했다. 수천만 원 대의 비품이 정부 기관에 가당키나 한 것인지 이능부는 잠깐 패닉에 빠졌지만, 직원인 인유신의 사유품을 가져다 놓은 거라는 형식으로 대충 무마했다. 현규하가 보낸 물건을 반품시킬 만큼 간이 부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피 머신이 설치되는 날, 민생안정과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도 구경을 와서 커피 한 잔씩 받아 갔다.

    “커피 잘 마실게요!”

    “더욱 칭송하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즈언하!”

    냅다 절까지 하는 흉내에 주위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무료.]

    인유신만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그의 상태창을 걱정스레 바라보았지만.

    “헌터님, 그럼 아침마다 커피는 따로 사 오지 않아도 되겠죠?”

    두근두근하며 묻는 홍 팀장의 희망을 현규하는 가차 없이 무너트렸다.

    “사람이 커피만 마시고 어떻게 살아요. 빵도 먹어야죠.”

    “하, 하하! 그, 그렇죠. 디저트는 제가 앞으로도 사 오겠습니다!”

    “소금빵도요.”

    “네!”

    몽롱한 눈길로 커피 머신을 쓰다듬던 김지연이 사진 한 장을 찰칵 찍더니 몰래 휴대폰을 두드렸다.

    - 우리 애 역조공 클라스 봐라.

    “…….”

    우연히 휴대폰 화면을 목격한 인유신은 그녀가 어느 게시판에 갈기고 있는 글을 보지 않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 * *

    - 현규하가 이능부에 갖다 놓은 커피 머신 봤냐ㅁㅊ

    저거 호텔에서나 쓰는 건데ㅋㅋㅋㅋㅋㅋ애인 준다고 집도 아니고 회사에 저딴 걸 갖다 놓음ㅋㅋㅋㅋㅋㅋ씹ㅋㅋㅋㅋㅋㅋㅋ

    └그 애인은 회사에서 커피 잘 마시지도 않는다고 지 입으로 말함

    └└쓸데없이 버린 돈 나한테나 버려줬으면

    └빨 게 없어서 더러운 호모 새끼를 빠냐 씨빨 니들도 다 호모임??

    └└남자랑 떡을 치든 여자랑 떡을 치든 마수만 잘 잡으면 됐지 뭔 상관???

    └└└근데 요새 현규하 마수도 안 잡지 않나? 연애질만 하던데?

    └└└└사촌형이 이능부 직원인데 며칠 전에 사유 던전 하나 닫았다고 신고했댔음

    └└└└└└남들은 하나 닫을 때 떼로 몰려가면서 온사방에 광고를 하는데 저 새끼는 혼자 가서 소리 소문도 없이 닫고 오네ㅋㅋㅋㅋㅋㅋㅋ

    - 죽지않고살아있길잘했다

    남친이화보집도찍어달라고하면찍어줄거같지않음?ㅠㅠㅠㅠㅠㅠ남친님제발부탁드려요다음은뀨화보집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뀨멘..뀨멘...

    └뀨가 아니라 남친한테 빌어야지ㅠㅠ남친 이름은 아직 안 깠지?

    └└이름은 모르겠고 성은 인씨래.

    └└└인멘인멘인렐루야

    └맨날 보고 만지는데 화보집 따위가 필요하겠냐ㅠㅠㅠㅠㅠㅠ

    └홍보 영상도 존나게 궁금하다.... 이능부에서 그것도 브이로그로 올려주겠지?

    └└난 라방에 걸어본다.

    └└└이능부가 규하 소속사냐고ㅋㅋㅋㅋㅋ

    └└븨로그 화질 올려보니까 시안에 제복이랑 눈가리개 같은 글자가 보인던디

    └└└대체 뭘 찍는 건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그래서 어떤 시안이 마음에 드시는지?”

    이능부와 계약해서 홍보 영상을 찍기로 한 감독은 긴장한 손바닥을 맞비볐다. 현규하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무심하게 시안을 툭 쳤다.

    “이거요. 난 아무거나 상관없었는데 애인이 골라 줬어요.”

    “오오, 역시! 저도 이 시안이 현 헌터의 이미지와 찰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인분이 특별히 고른 이유를 혹시 말씀하셨나요?”

    “아뇨. 별말은 안 했는데 애인이 시안들을 볼 때 여기에서 눈동자가 평균보다 12.48초 더 많이 머물러서요.”

    “사, 사이가 좋으시군요. 하하하…….”

    감독은 애써 웃었다.

    소문보다 더해서 순간 소름까지 끼쳤지만 자기와 사귀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 그저 카메라에 젖은 현규하를 완벽하게 담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이유 없이 젖은 현규하가 최종적으로 낙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작팀은 다시금 불타올랐다.

    “확실하게 더 젖게 하려면 위에서 뿌릴까요?”

    “살짝 살결이 드러나게 얇은 흰색 셔츠로다가. 단추는 밑단까지 거의 다 풀어서 속살이 보이도록.”

    “나는 반소매 셔츠 입은 남자들 젖었을 때 가슴골 도드라지는 게 그렇게 좋더라.”

    “기왕이면 샤워하던 시안이랑 합쳐서!”

    “옆에서 촤악 하고 물이 튀는 걸 맞는데 미간만 살짝 찌푸린 채로, 머리카락과 눈썹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폭주하는 회의실에서 막내가 수줍게 손을 들었다.

    “촉수 마수의 체액은 어떨까요?”

    “자기가 천재라는 거 지원서 볼 때부터 알았다니까.”

    감독은 고심 끝에 완성된 스토리보드로 디지털소통팀과 미팅을 가졌고.

    “미쳤어요?!”

    당연히 빠꾸당했다.

    눈물을 머금고 반려당한 시안을 다듬은 결과. 전체 연령가의 건전한 콘티가 완성되었으며, 젖은 현규하는 마수들의 피가 살짝 튄 현규하로 변경되었다. 그나마도 전체 연령가의 수위를 지키기 위해 해당 신은 흑백 영상을 교차하기로 했다.

    인유신은 조금 아쉬웠다.

    방송 심의를 좆 까던 시안들은 다 어디 갔는지 현규하가 위험에 처한 시민을 지키며 마수를 사냥하고, ‘국민이 안전한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이능부가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멘트가 마지막으로 나왔다. 정말 딱 정부 부처다운 영상이었다.

    ‘애초에 그 시안이 통과될 리가 없긴 했어. 젖은 셔츠 아깝다…….’

    그것도 그건데, 다른 문제도 있었다.

    “다 알겠는데 제가 왜 이 스튜디오에 나와 있어야 하는 걸까요?”

    평소 출근 시각보다 훨씬 이르게 현규하에게 강제 픽업되어 스튜디오에 온 인유신은 아직도 잠이 덜 깬 기분으로 하품했다. 현규하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럼 주인님은 하루 종일 걸린다는 촬영 내내 날 혼자 내버려 두려고 한 거였어요?”

    “그, 그건 아니지만 전화를 하시면 되는 거고……. 저도 일이 있는데…….”

    “날 유기할 거예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촬영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바쁜 스태프들이 ‘주인님’이라는 단어에 쫑긋 반응했다.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한 현규하의 얼굴이 그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듯했다. 저게 다 생쇼라는 걸 밝히지 못하는 인유신은 괴로웠다.

    “뭐, 아무튼.”

    현규하가 언제 충격받은 얼굴을 했냐는 듯이 인유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거칠게 쓰다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은 깨지는 유리 조각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러워서 인유신은 그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늑골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떨어져 있으면 너무 불안한데 촬영하느라 전화할 시간을 따로 뺄 수가 없을 거 같아서요. 촬영 내내 좌표를 띄워 놓을 수도 없는 거고.”

    “무슨 좌표요?”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