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에게 정당한 값을 치르기 위해 봉사한다. 그럼 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다시 당신에게 정당한 값을 치른다. 봉사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기적의 순환 논리죠?”
소년처럼 짓궂게 미소한 현규하가 한 번 더 손등에 키스하곤, 손을 놓았다.
“잘 자요.”
“네…….”
“아, 이건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에게 주는 내 선물입니다.”
아공간에서 꺼낸 햄스터 간식까지 쥐여 준 현규하가 얼른 올라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인유신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은 게이트학 전공인 친구가 규하 씨랑 같이 던전에 갈 수 있는지 궁금해해서요. 아니면 던전의 부속물 약간이라도요. 사례비는 드리겠대요.”
“저번에 말했던 보육원 친구예요?”
“네.”
“그럼 사례비는 유신 씨의 어린 시절 사진으로 하죠.”
“네?!”
“그럼 이만.”
“잠깐만요!”
뭐라고 붙잡기도 전에 현규하는 허공으로 훌쩍 날아올라 사라졌다. 삽시간에 까만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의 그림자로 멍한 시선을 올렸다. 어린 시절 사진이라니 그런 걸 대체 어디에 쓰려고…….
‘에이, 모르겠다.’
목덜미를 긁적이며 대문을 열었다.
어쨌든 현규하는 거래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 지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도 테이밍을 해제하면 바로 끝나게 될 거란 암시겠지. 현규하의 언행으로 다시금 확인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 그에게 기대를 품지 않아도 된다. 정말 다행이었다.
인유신은 손등에 남은 입술의 감각을 세게 문질러 지웠다.
* * *
던전을 공략하고 지속 게이트 하나를 완전히 닫았지만 인유신의 생활에 특별한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진상을 퇴치하는 인간 토템과의 일상적인 하루가 이어졌다.
……라고 생각했는데, 현규하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예? 뭐가요?”
“2시간.”
2시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인유신에게 현규하가 검지와 중지를 편 손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2시간마다 전화할래요. 던전에서 유신 씨와 황홀한 경험을 하고 나니 점점 더 보고 싶어져서 안 되겠어요. 30분마다 전화하고 싶은 걸 참아서 2시간으로 타협한 거예요.”
“2시간마다라면 그, 좀…….”
“안 돼요?”
“그게…….”
“안 돼요?”
“…….”
“안 돼요?”
“…….”
개연성 있는 얼굴이 애처로운 시선으로 쳐다보자 저게 다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매정하게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테이밍이라는 원죄가 자신에게 있지 않나.
하긴 뭐, 3시간이나 2시간이나.
“……돼요.”
“좋아요. 나중에 딴말하면 삐칠 겁니다.”
오케이 하자마자 현규하는 가련한 눈빛 따위 싹 집어치우고 다시 배부른 고양이가 되었다. 역시 정기라든가 에너지라든가 하여튼 그런 종류의 기를 빨아먹는 뱀파이어가 맞다.
“중요한 문제를 끝냈으니 이거나 좀 봐요.”
구내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평소처럼 옥상 정원에서 노닥거리던 참이었다. 인유신이 던전도 다녀오고 민원 업무도 보는 사이에 홍보 영상 작업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현규하가 보여 준 건 시나리오 시안들이었다.
“유신 씨는 내가 여기서 뭘 찍었으면 좋겠어요?”
“끌리는 게 없으세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서요. 기왕이면 주인님이 보기에 좋은 영상이 낫겠죠.”
인유신은 프린트한 시안들을 받아 팔랑팔랑 넘겨 보았다.
현규하가 28년 인생 최초로 찍는 영상이다. 게다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영상이다. 시안에는 현규하로 뽕을 뽑고야 말겠다는 감독의 흑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시나리오들을 대강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 이유 없이 젖은 현규하
2. 이유 없이 헐벗은 현규하
3. 이유 없이 샤워하는 현규하
4. 이유 없이 퇴폐적인 현규하
5. 이유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현규하
6. 이유 없이 채찍을 들고 있는 현규하
7. 이유 없이 크림을 핥아 먹는 현규하
8. 이유 없이 옷이 찢어지는 현규하
9. 이유 없이…….
“저기, 이런 거 그대로 찍었다가 방통위에 걸리는 거 아니에요?”
심지어 일반 기업의 CF도 아니고 정부 부처의 홍보 영상이다.
“내 존재 자체가 19금인 걸 어쩌겠어요.”
“…….”
“그래서 뭐가 끌려요?”
인유신은 방긋방긋 웃는, 오늘도 찬란하게 눈부신 미모를 힐끔거리면서 상상했다. 샤워하고 촉촉하게 젖은 채 옷이 찢어져서 채찍 들고 침대에 퇴폐적으로 누워서 크림을 핥아 먹는 현규하……. 심장 박동이 상승했다. 모솔일지언정 일평생 이성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몹시도 심장에 좋지 않은 상상이었다.
‘이거 시리즈로 다 찍으면 안 되나?’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전부 궁금했다. 뭘 찍어도 19금, 아니 근사한 영상이 될 거 같아서. 잘생긴 얼굴은 독점하지 않고 모두와 나누어야 인류에 이바지하는 게 아닐까?
한창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나더니 디지털카메라를 든 직원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헌터님! 그리고 인유신 씨! 디지털소통팀의 오하나입니다. 이능부 브이로그를 찍는 중인데 헌터님을 촬영해도 될까요?”
“유신 씨가 노출되지 않는다면요.”
“당연하죠! 실수로 찍혀도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까지 확실하게 편집할게요.”
허락을 받은 오하나는 다시 문밖으로 나가 들어오는 장면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인유신은 얼른 맞은편 벤치로 대피했다.
“여기는 회사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 장소여서 꼭꼭 숨겨 두려다가, 저희 회사에서 가장 핫한 그분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오늘 특별히! 여러분들께만 공개합니다. 짜잔! 안녕하세요, 현규하 헌터님! 디소팀의 막내 어공 오하나입니다.”
“네에.”
현규하가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예전이라면 차이점을 못 느꼈겠지만 이젠 상태창을 띄우지 않아도 알았다. 영혼 없는 시큰둥한 미소였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무료.]
잠깐 떨어졌다고 바로 권태감이 올라왔는데 촬영 괜찮나…….
“요즘 옥상 정원에 자주 오신다는 첩보를 얻었는데요! 오늘은 뭘 하고 계셨어요?”
“주인님과 데이트 중이었어요.”
“컷! 컷이요! 컷!”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팔을 엑스 자로 교차하며 외쳤다.
“촬영 중인데 주인님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주인님을 주인님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부르죠? 지금이 호부호형도 못 하는 조선 시대인가요?”
“그거랑 호부호형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유신 씨는 내가 창피해요?”
목덜미까지 빨개진 인유신과는 달리 현규하는 가증스럽게도 서글퍼하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고, 오하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두 분은 듣던 대로네요.”
뭐가 듣던 대로란 걸까……. 인유신은 조금 슬퍼졌다.
현규하에게 익숙한 민생안정과 직원들과는 달리 그 호칭을 아직 낯설어하는 타 부서의 오하나는 ‘주인님’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에 인유신은 현규하를 붙잡고 제발 주인님은 빼 달라고 애원했고, 현규하는 애처로운 한숨을 쉬었다.
“주인님이 원하시면 따라야죠.”
“하하하. 그럼 다시 찍을게요. 흠, 흠. 요즘 옥상 정원에 자주 오신다는 첩보를 얻었는데요! 오늘은 뭘 하고 계셨어요?”
“남친과 데이트 중이었어요.”
데이트라는 건 꿋꿋이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촬영은 이게 이능부 브이로그인지 현규하 브이로그인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인터뷰어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떨던 오하나가 벤치에 놓인 서류들을 가리켰다.
“무슨 서류를 보고 계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이 질문은 원하지 않으시면 편집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