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14)

“없죠. 취향이 아니라서요.”

“마스크는……?”

“오늘 공기 좋은데요.”

하긴 현규하가 모자나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민얼굴의 현규하와 다니면 여기저기에서 주목을 사게 될 테니, 일반인인 그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그냥 내 얼굴을 가릴까?’

고민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규하가 말을 툭 던졌다.

“내가 창피해요?”

“아, 아니, 그, 창피하다는 게 아니라! 규하 씨는 워낙 유명인이니까,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사진 찍는 사람도 많아서, 근데 저는 일반인이고…….”

깜짝 놀라서 주섬주섬 말을 주워섬기는 그의 당혹감을 즐긴 뒤에야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좋은 스킬이 있죠.”

공휴일에 출근을 시킨 회사에 돌발 게이트가 열리길 저주하던 이 대리는 창밖을 보며 잠깐 스트레칭을 하다가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규하잖아!’

10층 창밖에 사람이 둥둥 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심지어 현규하였다.

- 및ㅊㅊ;ㄴ지금박ㄱ에규하잇어;;;;

비공계 트위터에 최후의 한마디를 남긴 이 대리는 연신 하트와 멘션 알람이 오는 휴대폰으로 촬영에 열중했다. 창문이 닫혀 있어 빛이 반사되는 게 안타까워 죽을 것만 같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그 남친인가? 규하보다 조그맣고 댕글댕글하고 귀엽다……. 햄스터 상이야……. 근데 저건 뭐지? 목줄처럼 보이는데?’

행복한 시간은 잠시였다.

‘뭐야? 어디 갔지?’

방금까지 저 앞에 있던 현규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의 애인만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머물렀다.

“어? 규하 씨? 어디 갔어요?”

인유신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어요.”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짓에 깜짝 놀라서 보니 거기에 있었다. 직전까지 현규하가 아니라 아주 흐린 인상으로 여겨지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곳에 있다는 걸 확실히 인식해야 제대로 보이는 모양이다.

“우와……. 신기하다. 이건 무슨 스킬이에요?”

“쉽게 표현하자면 존재감을 지워 없애는 거예요. 덤으로 개량판이라서 전자 기기에 촬영되지 않다 보니 연예인과 범죄자들이 주로 씁니다.”

“기왕 각성할 거 이런 스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 같아요.”

보육원에서 사는 고아라고 은근한 따돌림을 받는 것보다는 아예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속엣말을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는데도, 현규하는 마치 그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빙그레 미소했다.

“내가 세상을 따시키는 듯한 느낌이 썩 좋죠.”

그리고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내려와 손을 내밀었다.

“산책합시다, 주인님.”

인유신은 눈썹을 깜빡거리며 반장갑을 낀 손을 바라보았다.

“손잡고요?”

“그럼 목줄 할까요.”

“아니요!”

목줄 대신이라면 손을 잡는 게 아니라 팔짱도 낄 수 있었다. 급히 손을 잡자 현규하가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매끄러운 장갑의 감촉보다, 깍지를 낀 손가락의 살결에 더 신경이 쓰인다. 손가락에도 굳은살이 박여 거칠고 단단하지만, 따스하게 감싸는 손. 인유신이 낫게 한 왼손이었다.

악수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손을 잡아 본 게 몇 년 만인지도 모르겠다.

“점심은 먹었어요?”

“친구랑 같이 커피랑 빵 조금요.”

“그럼 좀 늦었지만 점심 먹으러 가죠.”

“맛집 아세요?”

“중퇴한 뒤에는 학교 근처에서 식사한 적이 없지만 예전에 맛있다는 얘기를 들은 분식집이 있어요. 떡볶이 좋아하죠?”

“당연하죠!”

처음에는 그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게 살짝 창피하기도 했지만 행인들에게는 정말 그가 인식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민망함은 조금 덜었다.

“근데 제가 떡볶이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집 앞의 분식집에 자주 가길래요.”

이상하다. 분식집에서 현규하의 전화를 받은 건 한 번밖에 없었던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인유신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그들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서 분식집에 도착했다.

그가 말했던 대로 떡볶이와 튀김은 아주 맛있었다. 늦은 점심이라서 배만 조금 채우려고 했는데 김밥까지 시켜서 먹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소화도 할 겸 코인 노래방에 들렀다. 인유신이 번쩍거리며 돌아가는 조명 아래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동안 현규하는 탬버린만 짤짤짤 흔들었다. 저러다가 알아서 선곡을 하겠거니 싶었는데 탬버린 소리만 현란해질 뿐이었다.

‘분명히 규하 씨가 탬버린 처음 흔들었을 때는 어색했던 거 같은 느낌인데…….’

탬버린 흔들기도 스킬 숙련도가 쌓이는 걸까…….

늘 그랬듯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긴 하지만 하나도 안 즐기는 표정인데 탬버린 스킬만 렙 업하고 있는 게 놀라웠다. 과연 랭킹 1위.

슬쩍 상태창을 살폈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평소의 현규하였다. 살의와 흥미는 기본 베이스이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 같다.

“규하 씨, 무슨 생각 하세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노래는 안 부르세요?”

“옛날 노래밖에 몰라서요.”

“저도 뭐 요즘 아이돌 노래 아는 것도 아닌데요. 그러지 말고 같이 불러요.”

“내가 노래 부르는 거 듣고 싶어요?”

가만히 있는 그가 신경이 쓰였을 뿐, 딱히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여기서는 열심히 호응해야 한다고 인유신은 학습했다.

“완전요.”

“주인님의 구라에 넘어가 주는 것도 애완쥐의 덕목이죠.”

뜨끔한 인유신의 옆에서 현규하는 처음으로 만지는 듯한 노래방 리모컨을 신중하게 누르더니 노래를 골랐다.

기껏해야 유행이 지난 노래를 고를 거라고 생각했던 인유신은 당황했다. 유행이 지나도 너무 예전에 지나간 노래였다. 하지만 유명한 노래이긴 했다. 첫 소절만 불러도 전 국민의 95퍼센트 정도는 반사적으로 이어서 부를 만큼.

저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어깨가 절로 들썩거리고 왠지 엉덩이도 흔들면서 춤을 춰야 할 거 같은 이 노래는, 70년대 트로트였다.

또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현규하는 무척 진지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 와중에 발라드 가수 같은 그윽한 미성이어서 미묘한 언밸런스가 느껴졌다.

“듣기만 했었는데 불러 보니 재밌네요.”

그리고 다시 고른 노래도 역시 70년대 트로트였다. 정말 옛날 트로트밖에 모르는 거였다.

‘뭐, 어때. 사람이 바쁘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트로트의 장점이 뭔가. 국민 노래다. 인유신도 탬버린을 흔들면서 마이크를 잡았다. 탬버린 스킬은 그에게 부족할지 몰라도 흥으로는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보육원 노래방 기기에서 단련한 흥이다.

“잠깐만요.”

목이 살짝 쉴 정도로 코인 노래방에서 시간을 불태우고, 덕분에 배가 금방 꺼져서 저녁을 먹고, 근처 공원을 구경하며 걷다가, 집 앞 골목길까지 현규하가 데려다준 뒤에야 인유신은 이상을 깨달았다.

“이거 산책이 아니라……. 데이트 아니에요?”

“이제 알았어요?”

“……?”

인유신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두둥실 떠올랐다. 데이트? 산책이 아니라 데이트? 왜? 갑자기?

“우리 사귀는 사인데요.”

“어, 그야 그렇긴 한데……. 그거 뻥이잖아요.”

“뻥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가 사귄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렇지만 해제 방법을 알게 되면 바로 헤어질 거잖아요.”

현규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직까지 놓지 않고 있던 그의 손을 쥔 채 가볍게 흔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죽여서 테이밍을 해제하는 건 여전히 매력적인 계획이에요. 지금도 꽤 끌리고 있죠.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고 있잖아요. 무엇 때문일 거 같아요?”

“제가 각성제라서……?”

“정답.”

잡혀 있는 인유신의 손등으로 새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왔다. 촉촉한 감촉이 스며들고, 맞닿은 살갗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손끝이 움찔했으나 어째서인지 그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입술 사이로 가늘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살갗을 간질였다. 손가락을 꼼지락, 하고 움직이자 지그시 붙잡은 손에 힘이 약간 더해졌다.

“유신 씨는 손가락도 뼈가 없는 것처럼 보드라워요. 세게 잡았다가 부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야.”

손등에 입술을 댄 현규하가 눈가를 곱게 휘며 웃었다. 웃음에 스민 숨결이 짙게 피부 위를 감돌았다. 그에게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데, 은은한 부드러움을 품은 눈동자와 마주하니 마치 자신을 홀리려는 것만 같아서…….

“각성제의 값은 제대로 치러야죠.”

그 말에 인유신은 흠칫하여 정신을 차렸다. 홀리긴 무슨. 정신 차려, 인유신. 가늘어진 호박색 눈동자가 가로등의 빛을 받아 더욱 짙게 빛났다.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하세요. 내가 필요한 일도요. 그게 뭐든 당신에게 충실하게 봉사하겠습니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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