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무렵이래.”
인유신은 던전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객관적으로 말하려 했지만 얘기하다 보니 신이 났다. 이런 얘기를 편하게 할 친구도 박승기뿐이었다.
유심히 듣던 박승기가 놀라서 물었다.
“잠깐만. 현규하가 뭐라고 했다고?”
“던전의 배경이 된 그 시대에는 그게 당연한 거였다던데? 당시 유럽은 종교가 가치의 우선이었던 시대였는데 특히 콜럼버스는 독실한 신자여서 대학살에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는 거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아니, 그걸 현규하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게이트학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거 아니야?”
“몰라!”
신나게 말을 잇던 인유신은 박승기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당황한 나머지 소리부터 지른 박승기는 남은 커피를 쪽쪽 빨면서 다리까지 달달 떨었다.
“게이트 안의 환영은 던전이 사람들을 인식하기 전에, 아주 잠깐만 볼 수 있는 거라고! 그나마도 헌터들이 사냥하고 채취한다고 온종일 죽치고 있어서 새로 열리는 던전이 아니면 제대로 연구도 못 하는 게 현실이야. 망할 헌터들은 환영으로 보스몹 예측하고 나면 신경도 안 써! 근데 현규하는 어떻게 콜럼버스의 배경까지 알고 있는 건데? 우리가 아는 콜럼버스는 신앙심은커녕 그냥 금에 미친 놈이었잖아!”
그런가. 전문가가 말하니 그런 거겠지.
인유신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횡설수설하는 박승기가 진정할 때까지 소금빵을 오물오물 씹었다. 짭짜름한 버터 맛이 맛있다. 집에 갈 때 더 사서 갈까.
“게이트가 우리가 살아 온 지구와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
“어.”
“별일이 다 일어나는 게 던전이니까 옛날에는 비틀린 왜곡이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게 정론이었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데, 요즘은 평행 세계라는 게 학계의 통설이야.”
인유신은 눈썹을 깜빡거렸다. 그냥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왜곡이라는 것보다는 평행 세계 쪽이 더 근사하게 들렸다.
“러시아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트로츠키그라드라는 도시가 배경인 던전도 열린 적이 있대.”
“스탈린그라드(스탈린이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 현재의 볼고그라드.)가 아니라 트로츠키(스탈린에게 제거된 러시아의 혁명가.)의 이름이 붙었다고? 그럼 그 평행 세계는 트로츠키가 반대로 스탈린을 나가리시켰다는 거야?”
“뭐, 그렇겠지?”
“트로츠키는 도시에 이름 붙이는 걸 극혐했다던데 그 세계 트로츠키는 다른가? 신기하네.”
스탈린이 아닌 트로츠키가 국가 정상이 되었으면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우리나라는 뭐 없어?”
“뭐가 있더라……. 아, 그렇지. 평양처럼 옛날 북한이 배경인 던전에서 김일성의 노년으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종종 발견된다더라.”
“김일성은 6·25 때 만주로 도망쳤다가 실종됐잖아.”
“그러니까. 그 평행 세계에서는 6·25가 일어나지 않고 38선이 고착화되었거나 북한이 전쟁에서 승리해 통일했을 가능성이 있지.”
“그쪽 평행 세계에서 안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재수 없었으면 개성은 북한 땅이다. 대한민국 만세. 없던 국뽕이 갑자기 차올랐다.
“아무튼 게이트 안의 환경이라면 몰라도 문화나 역사적 흐름은 이렇게 단편적으로 추론하는 게 최선이야. 현규하처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콜럼버스의 신앙이 어떤지 따위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너한테 멋지게 보이려고 그럴듯하게 거짓말한 거 아니야?”
인유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현규하가 자기에게 멋지게 보이려는 행동은 절대 안 할 거다.
“규하 씨가 소유 던전 말고도 콜럼버스가 나오는 던전 몇 개를 봤다고 했거든. 나름대로 연구했던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 현규하도 우리 학교 게이트학 전공을 했었으니까.”
“규하 씨도 한국대였어?”
“몰랐냐?”
‘남친의 학력도 모르고 뭐 했냐.’라는 시선에 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중퇴했다는 대학이 한국대인 줄은 몰랐다.
인유신은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7년 전에 중퇴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근데 유신 님.”
“안 돼.”
“야아, 별것도 아니야. 소유 던전 더 갖고 있으면 친구 하나만 데려가 줄 수 있냐고 남친한테 말 한 번만 해 달라는 건데.”
“그러니까 안 돼.”
“너한테 잘 보이려고 거짓말까지 하는데 어렵지도 않은 부탁 하나는 들어주지 않겠냐?”
“얼마나 오래 만날지도 모르는데, 뭐.”
실언이라는 걸 깨달은 건 본심이 무심코 튀어 나간 뒤였다. 박승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헤어질 생각부터 해?”
“그냥……. 나랑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잖아.”
“야, 인유신. 네가 현규하에 비해서 뭐가 딸리는데? 얼굴……은 현규하가 낫네. 돈……도 현규하가 많고. 직업……도 현규하가 압승이고. 인성……도 세상 살기에는 싸가지가 없는 게 편하지. 하지만 대신 넌 나 같은 친구가 있잖아. 힘내, 인마.”
이게 친구인지 웬수인지 모르겠다.
랩실에 박승기를 다시 처박아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인유신은 상념에 젖었다.
‘승기가 괜히 그런 말을 해 가지고…….’
이 관계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건 자신만이 아니라 현규하도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테이밍된 이유를 현규하는 알고 있는 거 같으니 그를 따라 히든 보스의 결정석도 얻고, 성인이라는 할머니도 만나다 보면 끝낼 수 있는 걸까.
횡단보도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느라 무단횡단을 하려는 사람을 따라 무심코 발을 딛고 말았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정지 신호등의 빨간불이 반짝거리는 횡단보도 위였다.
“헉.”
급히 뒤돌아가려는데 몸이 허공으로 떴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눈을 깜빡인 순간, 평범한 대도시의 풍경마저 근사한 화보집으로 연출하는 듯한 미모의 남자가 허공에 나타났다. 동시에 비명 같은 탄성이 곳곳에서 들렸다.
“……규하 씨?”
“돌발 퀘스트. 주인님의 위기를 구한 애완쥐를 칭찬하기.”
“고, 고맙습니다.”
“말로만요?”
허공에 엎드리고 있던 현규하가 고개를 들이밀었고 인유신은 얼굴이 빨개졌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급격히 헛숨을 들이켜는 숨죽인 반응이 여기저기에서 솟았다. 구해 준 건 고마운데 주변의 수군거림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미친. 현규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남친인가?”
“설마.”
“아냐, 내가 보기엔 남친 같아…….”
인유신은 휴대폰을 꺼내는 행인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짝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칼을 핸들링할 때처럼 조물조물 쓰다듬었다. 처음 쓰다듬는 것도 아닌데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이 뚝딱거린다. 결이 곱고 보드라운 머릿결의 감촉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조금 더 다정하게는 안 돼요?”
쓰다듬던 인유신의 손을 붙잡은 현규하가 손끝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나는 입맞춤에 살갗이 화르륵 불타오르며 핏기를 얼굴까지 죽죽 밀어 올렸다. 어째서 심장까지 콩닥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걸까.
저도 모르게 흠칫하여 안으로 말린 손가락을 편 그가 다시 제 머리로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을 살짝 움츠리자 그제야 보드라운 머릿결이 스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인유신은 머릿결을 따라 그의 옅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좋은 향기가 났다. 현규하의 향기다.
만족스럽게 웃은 현규하가 인유신의 허리와 무릎 밑을 양팔로 올려 안은 채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숨도 못 쉬고 지켜보던 행인들의 입이 그제야 터졌다.
“현규하! 잘생겼어어!”
“어떡해, 진짜 애인인가 봐!”
어째서인지 입을 틀어막으며 벅차올라 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평소에는 옆구리에 짐짝처럼 끼고 다니면서 왜 이럴 때는 공주님 안기를 하는 걸까…….
하지만 무슨 대답을 들을지 무서워서 질문할 용기는 없었다. 대신 콩닥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힌 뒤 무난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질문을 했다.
“규하 씨는 어쩌다가 거기 있었어요? 어디 가던 길이었어요?”
“스토킹요.”
“…….”
“농담이고요, 볼일이 있어서 학교에 다녀오던 길이었어요.”
“아, 참. 한국대 다니셨죠? 제 친구가 한국대 대학원에 다니는데 오늘 들었어요.”
“내가 한국대를 다녔다는 걸 이제 알았어요? 주인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넵.”
인유신은 집에 가면 당장 현규하의 공식 프로필과 위키를 외우자고 결심했다.
“…….”
“…….”
10층 건물과 비슷한 높이의 상공이었다. 이제 슬슬 지상으로 내려가도 되지 않나 싶은데 현규하는 그를 안은 채 멀뚱멀뚱 내려다보기만 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더 있으세요?”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는 산책 안 해요?”
인유신은 제발 그가 육성으로 풀 네임을 부르지 말고 그냥 6세라고만 불러 주길 소심하게 바라면서 대답했다.
“햄스터는 산책 안 해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쳇바퀴만으로도 운동이 되는 데다가, 안 그래도 조그만데 케이지 밖에서는 더 찾기 힘들어서요. 잘못하면 실수로도 죽거든요. 6세야 케이지를 탈출해서 구석에 숨어 있다가도 저랑 말이 통하니까 부르면 나오지만요.”
“유감이네요.”
햄스터가 산책을 안 한다는 게 왜 유감인 걸까……. 인유신은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히 물었다.
“저랑 산책하실래요?”
“산책용 목줄도 챙겨 왔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하면서 아공간에서 꺼낸 건 진짜 가죽 목줄이었다.
“사람이 쓰는 목줄은 SM용으로밖에 팔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으아아아. 안 들려요!”
인유신이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거나 말거나 현규하는 목줄을 몇 개 더 꺼냈다.
“그립감 좋은 거로 해 볼래요?”
“진짜 목줄 하라고 해도 안 하실 거잖아요!”
“할 건데요. 나는 수치심 같은 거 없는 떳떳한 사람입니다.”
“결국 쪽팔리는 건 저뿐……?”
“주인님도 떳떳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십시오.”
기겁하는 인유신을 신나게 놀려먹고 난 뒤에야 현규하는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목줄을 집어넣었다. 자기를 놀릴 때마다 그의 얼굴에 반질반질 광택이 흐르는 것만 같아 인유신은 조금 억울했다.
‘피 빨아 먹는 뱀파이어가 아니라도 에너지 빨아 먹는 뱀파이어는 맞는 거 같은데.’
집사를 놀리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반려동물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다. 고양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쪽팔린 얘기 때문에 생각난 게 있었다. 현규하와 산책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문제였다.
“근데 규하 씨. 캡 모자나 선글라스 같은 건 아공간에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