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14)
  • 머릿속이 심란하게 엉겼다. 규칙을 깨며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 히든 보스의 결정석. 도와 달라는 목소리. 현규하는 이 모든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전부 알고 있는 듯했다. 인유신이 인지하지 못한 이상까지, 전부.

    입술이 달싹거렸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뭉친 말들 때문에 오히려 혓바닥이 무겁다.

    하지만 인유신이 겨우 꺼낼 수 있던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찾고 있다고 하신 게 그거였어요?”

    “구체적으로 풀이하자면 특정한 던전에서 드롭하는 히든 보스의 결정석에 내 마나를 주입했을 때 극히 낮은 확률로 나타나는 현상이죠. 일종의 유니크 템이라고 할까요? 유신 씨랑 시너지가 좋아서 그런지 바로 먹었네요.”

    “……그게 뭔지 물으면 알려 주실 건가요?”

    “아니요.”

    당당하게 거절을 해서 그런지 화도 나지 않는다. 인유신은 그냥 한숨만 푹푹 쉬었다. 머리가 포화 상태라서 기운도 없었다.

    잠시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현규하가 입술을 움직였다.

    “여기서밖에 발음이 안 되는 이름이니까 이거는 알려 줄게요. 아까 봤던 할머니는 스픈타 마르치, 즉 화요일의 성인이에요.”

    “그렇군요…….”

    허신도 만났으니 성인을 만난 거로는 놀랍지도 않았다. 결국 최초의 던전행은 이래저래 현규하의 사정에 휩쓸린 셈이다.

    제대로 알려 주는 것도 없으면서 휘두르고 다닌 게 아닌가. 저도 모르게 살짝 노려보는 눈매가 되었던 모양이다. 현규하가 인유신의 눈가를 엄지로 슬슬 문질렀다.

    “주인님의 눈총을 받으니까 마음이 아프네요. 당신이 깊게 엮여서 좋을 게 없는 일이라서 그래요.”

    “……규하 씨는 진짜 뻔뻔한 사람 같아요.”

    “칭찬 고맙습니다.”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대신 집까지 잘 모셔다드릴게요. 어떻게 모실까요?”

    “하늘 날아서요.”

    “롤러코스터부터 시작해서 자이로드롭까지 확실히 태워 드리겠습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흐이약!”

    “그렇게 좋아요? 몸은 솔직한 사람이네.”

    “너무 빨라아!”

    “6살이나 많은 형아한테 반말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높아요!”

    아무도 없는 던전의 상공에서 이리저리 던져지고 날아다니며 인유신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유원지에서 느낄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짜릿하고 실감 나는 스릴에 스트레스는 아주 확실히 해소되었다.

    심란한 일들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즐거운 마무리였다.

    3.

    현규하는 양 손바닥에 올려놓은 살덩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비슷한 형체에 비슷한 핏기를 머금은 두 살덩이의 차이점이라면 크기였다. 왼손의 것은 작고, 오른손의 것은 크다.

    양손을 가까이 가져가니, 살덩이가 저절로 움직였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서로 엉겨들더니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완만한 형체가 되었다.

    ‘이제 조각은 세 개 남았나.’

    20년을 쫓아오면서 겨우 네 개밖에 못 모았다니.

    복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현규하는 아공간에 살덩이를 보관하고는 허공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시야의 구석에는 여전히 좌표가 반짝거리고 있다.

    좌표로 백날 확인해 봤자 역시 가까이에 있어야 제일 안정된다.

    만족스럽게 안정감을 만끽하던 현규하는 현관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붕에서 몸을 내밀어 보니 인유신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추리닝까지 갈아입은 걸 보니 어딘가 외출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피곤해서 쉴 줄 알았더니.’

    밖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의 주인을 절대 혼자 내보낼 수는 없었다.

    현규하는 투명화 스킬을 건 상태 그대로 엎드린 채 인유신의 뒤를 따라 슬슬 날아갔다.

    “6세야. 다녀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찍.”

    머리 위에서 현규하가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도 못 하는 인유신은 옥탑방의 계단을 총총 내려갔다. 낡은 주택은 비탈길의 꼭대기에 있다. 늘 현규하의 바이크를 타고 다니다 보니 도보로 가는 게 오히려 낯설어졌다.

    ‘지하철역만 좀 가까우면 좋을 텐데 말이야.’

    골목길을 벗어나고도 도보로 한참은 걸어가야 지하철역이 나왔다. 운동 삼아 걷고 있긴 하지만 아쉽긴 했다. 하긴 역세권이었다면 그의 빈약한 통장과 연봉으로는 월세를 구하지도 못했을 거다.

    3일 연휴의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지 한낮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캡을 깊이 눌러쓴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다가 인유신에게 부딪……힐 뻔한 순간,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크아악!”

    남자의 한쪽 팔이 기괴한 각도로 비틀려 있었다.

    “괜찮으세요?”

    팔이 부러져도 119에 전화하는 게 맞던가. 당황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몇몇 몰려들고 마침 지나가던 순찰차도 멈췄다.

    “무슨 일들이세요?”

    “저분이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급히 다가온 경찰들은 쓰러진 남자를 부축했다. 문득 경찰 한 명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휴대폰으로 지명 수배 전단을 확인했다.

    “어, 이 사람 박근철 아니에요?”

    “뭐?”

    “여기 보세요.”

    다른 경찰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급히 지명수배된 인상착의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했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던 것도 멈추고 도망치려다가 붙잡혔다.

    “아, 씨발! 아프다고!”

    “조용히 해,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입원한 할머니는 아직 퇴원도 못 하셨어.”

    아프다고 난리를 치는 남자를 순찰차에 밀어 넣는 사이 경찰 한 명이 인유신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잡으셨습니까? 갑자기 쓰러진 모양인데 혹시 각성자이신가요?”

    “아니요. 저도 왜 쓰러졌는지 모르겠어요.”

    “아, 그래요? 피해는 없으신가요? 소매치기에 퍽치기까지 하는 놈인데 꽤 악질적이거든요. 지난달에는 피해자분이 병원에 입원까지 하셨어요.”

    그 말에 인유신도 서둘러 살펴봤지만 휴대폰은 멀쩡했다. 훔쳐 갈 게 그거밖에 없기도 했다. 어쨌든 피해도 없고 바로 잡혔으니 다행이었다. 갑자기 팔이 부러진 게 의아하긴 하지만 피해자의 살이나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닐까.

    해프닝은 짧게 끝났다. 순찰자가 멀어지자 모여들었던 몇몇 사람들도 곧 흩어졌다. 인유신도 걸음을 옮겼다.

    “저 차 왜 저래!”

    “피해!”

    막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했을 때,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중앙선을 넘어 사선으로 질주하는 트럭이 있었다. 끼익! 끽! 차들이 연신 급정지하며 도로는 금세 혼잡해졌다.

    멋대로 질주하는 트럭이 인유신이 서 있는 인도로 치고 들어오기 직전.

    “……!”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트럭이 우뚝 멈추었다. 삽시간에 시동이 꺼지고 연신 공회전하던 바퀴마저 조용해졌다.

    당혹감에 굳어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돌렸다. 인유신도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정말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와 씨,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네.”

    “근데 어떻게 갑자기 인도에 들어오기 직전에 딱 멈춘 거지?”

    “각성자가 멈춘 거 아니야?”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하기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쯤에서 자기 덕분이라고 으스대며 나타나야 할 각성자는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들과 구급대원들에 의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운전자가 트럭에서 구출되었다.

    ‘오늘따라 일진이 대낮부터 스펙터클하네.’

    놀란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인유신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가게 뒤쪽의 골목길로 들어가서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히, 히, 후.

    진정되었다.

    ‘라마즈 씨. 라마즈 호흡법을 이렇게 써서 정말 죄송합니다.’

    호흡법보다는 그걸 가르쳐 주던 현규하의 뻔뻔한 얼굴 때문에 진정된 거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왠지 모를 죄책감에 인유신은 소심하게 사과하며 지하철 입구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지하철을 한 번 환승하고 도착한 곳은 한국대학교였다. 인유신은 휴일에도 혹사당하는 가련한 노예에게 하사하기 위한 커피와 소금빵까지 사서 랩실의 문을 노크했다. 이전에도 왔던 곳이라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노예. 있냐?”

    물론 오늘 랩실에 박승기 혼자만 있다는 걸 들었기에 하는 인사였다. 박승기가 거무죽죽한 좀비 같은 몰골로 문을 열더니 턱짓했다.

    “휴게실.”

    한마디만 겨우 내뱉고는 흐느적거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박승기는 조용한 휴게실에서 커피를 주유한 뒤에야 조금은 인간의 몰골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랩실에 너 혼자야?”

    “교수님 학회에 따라갔어. 나는 반응 확인해야 하는 게 있어서 출근했고.”

    “밤새운 거야?”

    “쪽잠은 잤어.”

    커피를 쪽쪽 빨며 중얼거리는 친구의 기운을 북돋워 줄 선물을 가방에서 꺼냈다.

    “토요일에 규하 씨랑 던전에 갔다 왔는데 말이야.”

    “와, 씨발. 야! 너 이렇게 귀한 걸 어떻게 구했냐? 말도 안 돼!”

    인유신은 호들갑을 떠는 박승기를 흘겼다.

    “아직 보여 주지도 않았거든?”

    “거래처 님의 뽕을 채워 주기 위한 비즈니스 쇼맨십 리액션이라고나 할까. 암튼 데이트는 잘했냐?”

    “데이트……인지는 모르겠는데, 잘 갔다 오긴 했어.”

    클리어되어 완전히 닫히기 전의 던전에서 가져온 건 모래와 바닷물, 부러진 나뭇가지 몇 개였다. 솔직히 문외한인 자신의 눈으로는 던전 밖의 모래와 뭐가 다른 게 있나 싶었지만 박승기는 기뻐하며 받았다.

    “무슨 던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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