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14)

“……테이밍한 거, 정말 죄송해요.”

“됐어요. 공짜 각성제의 성능이 꽤 훌륭하니까.”

현규하는 조용히 미소하며 인유신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왼손의 반장갑을 벗어 인유신에게 건넸다. 처음으로 본 왼손의 손등에는 부러진 십자가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따가 귀속 아티팩트를 좀 쓸 건데, 필드를 전개하는 게 아니라서 아마 당신도 조금 어지러워하게 될 거 같아요. 우리는 영혼으로 연결된 끈적한 관계니까.”

평소라면 그의 농담에 좀 민망했을 텐데 이번에는 오히려 반가웠다. 현규하의 시선은 이제 아래를 향해 있었다. 여전히 아타베이라가 분개하고 있는, 지상.

“던전은 박제된 허상의 세상이고, 이곳에 현현한 신은 본신의 신체(神體)가 아니라 드리운 그림자의 파편에 불과한 허신입니다. 인간이 아예 손대지 못할 건 아니란 거죠.”

“근데 무기가 안 통했잖아요.”

“신을 쓰러트리려면 그에 합당한 무구나 신성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게다가 아타베이라는, 이미 패배했던 신입니다.”

말과 함께 현규하는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멀리 지상에서 날뛰던 아타베이라의 거체가 우뚝 멈추었다.

【———!】

여성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개구리의 몸체가 뒤틀렸다. 무형의 압력이 사방에서 아타베이라를 옥죄었다. 바람마저 멈추어 응집된 공기가 사지를 붙잡으며 얽어맨다.

중력과도 흡사한 거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아타베이라의 몸체에서 끼긱거리며 비틀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뒤틀린 살점이 투두둑 뜯어지며 신혈이 흘렀다. 미쳐 버린 신의 피가 떨어지는 대지가 부패했다.

태양을 가리는 거체를 봉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 보이지 않는 찰흙을 둥글게 뭉치는 것처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현규하의 관자놀이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젠장. 63빌딩을 쪼개는 게 더 쉽겠어.”

낮은 욕설을 중얼거린 현규하가 양팔을 올렸다.

【———!】

아타베이라의 거체가 허공에 뜨자, 마치 산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타베이라의 몸부림이 더욱 거세졌다. 살점이 깊게 뜯어지며 신혈이 흩날렸다.

현규하는 그대로, 아타베이라를 바다에 처박았다.

쿠아아앙!

물길이 수십 미터나 치솟았다. 인유신은 깜짝 놀라 몸을 굽혔다. 거꾸로 치솟은 물길이 역장에 부딪혀 발아래에서 비산했다. 마치 분수의 바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프리즘처럼 햇살을 무수히 반사하며 산란하는 물방울이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해수면에 거대한 공동이 파인 것도 잠시, 충격으로 밀려난 바닷물이 거센 소용돌이처럼 깊게 파인 공동으로 매섭게 밀려들었다. 아래의 해저에 처박힌 아타베이라는 그 어마어마한 수압을 받아 내고 있을 것이다.

현규하가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깊이 처박아 놨으니 올라오는 데 시간이 걸리겠죠.”

“어, 이걸 그냥 시간을 벌려고 한 거예요?”

“겸사겸사요. 유신 씨가 불안해하지 말고 안심하길 바라서요.”

입만 벌리고 있는 사이에 현규하는 역장 밖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인유신은 급히 그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

해수면 아래에서 그르륵거리는 끓는 소리를 내며 기어오르는 아타베이라의 발버둥으로 바다가 거칠게 요동쳤다. 현규하의 왼손에 새겨진 문신이 빛을 발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귀속 아티팩트 ‘마지막 황제의 부러진 십자가’를 일부 해방합니다.]

일부나마 귀속 아티팩트를 해방하자, 영혼의 다리를 지나 인유신에게도 그가 보고 있는 머릿속의 환상이 흘러들었다.

그것은 둥글고 드높은 천창으로 들어온 장엄한 빛살이 이콘을 비추는 대성당이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아들의 아래에서 제국의 마지막까지 이어질 최후의 성찬 예배가 집전되고 있었다. 낡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절망에 젖어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성가를 불렀다.

「주 하느님께서 그의 왕국에서 우리 모두를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기억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천사단에 에워싸여 보이지 않는 호위를 받으시는 만유의 왕을 영접하기 위함이니라. 알릴루이야, 알릴루이야, 알릴루이야.」

가장 낡은 자리를 지키는 황제의 주름이 파인 거친 뺨으로 굵은 눈물이 흘렀다.

아찔한 환상의 끝에서 깨어났을 때, 현규하의 왼팔에는 찬란한 광망이 맺혀 있었다. 높이 높이 치솟은 신성한 빛을 쬔 아타베이라가 발작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 그래서 규하 씨가 잔인해서 쓰고 싶지 않다고 했던 거구나.’

그의 말처럼, 정말 잔인한 수단이었다. 부모와 자식을 같은 수단으로 살해하는 게 아닌가.

동시에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곡된 신앙으로 아타베이라의 아이들을 학살했던 자들과는 달리, 현규하가 해방한 아티팩트의 기억은 멸망하는 최후까지 신앙을 거룩하게 받들던 신실한 신자들이었으니.

순정한 신앙의 결정에서 비롯된 찬란한 광망이, 허신에게 내리꽂혔다.

* * *

[던전의 히든 보스 ‘허신 아타베이라’가 사망했습니다.]

[던전이 완전히 클리어되었습니다.]

허신은 다른 마수들처럼 사체를 남기지 않았다. 허공에 녹아들듯이 사라지는 자취 너머에 남은 결정석만이 그녀가 존재했음을 알려 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규하 씨!”

현규하가 허공에서 내려 주자마자 인유신은 허겁지겁 달려갔다.

“다친 데는 없어요?”

“저야 멀쩡하죠. 빨리 팔 주세요.”

“갑자기 적극적이 되었군요.”

“아 씨! 쌉소리 그만하고요!”

결국 인유신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자 현규하는 움찔하더니 순순히 왼팔을 내밀었다. 왼팔의 참상이 끔찍했다. 5톤 트럭이 팔을 밟으며 지나간 뒤에 기름을 끼얹어서 불 속에 집어넣으면 딱 이 모습이 될 것이다.

‘힐이 안 먹히면 어떡해.’

칼에 찔린 상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부상이 아닌가. 식은땀만 좀 흘릴 뿐 현규하는 신음 한 줄기 뱉지 않고 태연한데, 안색이 하얗게 질린 사람은 오히려 인유신이었다.

필사적으로 마나를 끌어모아 힐을 퍼부었다. 우윳빛을 띤 치유력이 현규하의 팔을 감쌌다. 그리고 테이밍한 개체에게 주인의 스킬은 세상의 무엇보다 효과적이었다.

“오.”

말끔하게 치유된 왼팔을 본 현규하가 짧게 감탄했다.

“원래대로라면 성당에 찾아가서 성수도 뿌리고 축복도 받아야 그럭저럭 치유되는데 금방 나았네요.”

“힐이 먹혀서 진짜 다행이에요…….”

어째서인지 한창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 때보다 더 진이 빠졌다. 가용한 거의 대부분의 마나를 쏟아부었더니 탈력감도 심했다.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인유신의 허리를 현규하가 사이코키네시스로 부드럽게 받쳐 주었다.

“성유물도 없이 신력을 빌려 썼는데 팔 하나면 아주 싸게 먹힌 거예요. 덕분에 히든 보스의 결정석도 얻었고요.”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던 결정석이 허공을 날아와 현규하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불투명한 일반 마수들의 결정석과는 달리, 오색의 광채가 안에서 번져 나오는 듯한 신묘한 빛이었다.

결정석을 그대로 아공간에 넣으려던 현규하가 잠깐 생각하던 눈치더니 손을 내밀었다.

“재미있는 거 보여 줄까요?”

“뭔데요?”

“한번 만져 볼래요?”

“만져도 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오색의 광채가 신기하던 참이었다. 인유신은 히든 보스의 결정석에 살짝 손을 얹었다. 온수에 오랫동안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추울 때 보온용으로 끌어안고 자도 좋겠다.’

금전적인 가치를 매기기도 힘든 히든 보스의 결정석을 핫팩 대용으로 쓰다니 얼마나 호사스러운 망상인지.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현규하가 결정석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 순간이었다.

- 도와줘.

세상이 일변했다.

하늘을 밝히는 태양이 움직이지 않아 계속 한낮처럼 밝았던 던전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사방에서 일곱 개의 별이 나타났다. 갑자기 변한 모습에 놀라운 탄성을 토하기도 전에, 서쪽 하늘에 박혀 있던 두 개의 별 중 하나가 홀로 크게 빛났다.

그 별빛 아래에, 노인이 서 있었다.

늙고 지친 그녀의 그림자에 역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인유신은 직감했다. 이것은 멸망의 징조였다.

- 도와줘.

뇌리로 어린 소녀의 속삭임이 울렸다.

흠칫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구슬픈 눈물을 고요히 떨구는 노인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Am înțeles.”

현규하는 들고 있던 히든 보스의 결정석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고, 노인은 그에 답하는 것처럼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그렇게 던전의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인유신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뜬 순간 환한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몇 분은 지난 거 같았는데 리셋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니 1초도 지나지 않았다.

“…….”

방금까지 멀쩡하던 결정석이 뭉쳐 놓은 살덩이처럼 변해 있다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너무 놀라서 더 반응할 신경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현규하는 막 도축한 것처럼 핏기가 생생하게 감돌며 꿈틀거리는 살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4D로 영화 보는 것보다 더 실감 나죠?”

“……원래 히든 보스의 결정석에 마나를 주입하면 그런 게 보이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유신 씨와 나만이 볼 수 있는 구경이죠.”

“규하 씨의 히든 특성이랑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 깨진 글자 같은 거요.”

“전혀 쓸모없는 특성은 아니다 보니까요.”

“왕의 사생아라는 특성도요?”

현규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더 명료하죠. 말 그대로 내 아버지가 왕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정식으로 결혼한 건 아니라서요. 시스템의 판정이 까다롭더라고요.”

“…….”

어디부터 어디까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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