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싫은데요.”
인유신은 그답지 않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절 지킨다고 제 앞에서 죽는 건 싫어요.”
“…….”
“그러니까 규하 씨도 저만 살리고 죽겠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농담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알았어요.”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잠시 내려다보던 현규하는 깊이 캐묻지 않고 그의 머리칼을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태양이 사라졌다.
태양 빛을 가릴 만큼 거대한 형체가 바다로부터 우뚝 솟아나 거대한 눈을 부릅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당장에라도 저것이 흉포하고 살벌한 기세로 몰아칠 것만 같았다. 인유신은 바짝 긴장하여 현규하의 옷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던전의 히든 보스, 허신 아타베이라는 눈동자를 굴리며 지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닥을 새까맣게 덮은 무수한 마수의 시체가 아니라, 던전의 단절된 시간을 구성하는 타이노인 환영의 잔재가 어른거리는 지상을. 그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모습을.
죽어 나갔다.
총에 맞고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개에게 물리며 죽어 나갔다. 금을 갈취당하고 노예로 팔리고 유린당하며 죽어 나갔다.
【———!】
비통한 호곡성이 터져 나왔다. 내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참담한 슬픔과 고통으로 신은 울부짖었다. 자신의 아이들이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것을 두 손 놓고 볼 수밖에 없던 신의 피눈물이었다.
밀도 높은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아…….”
인유신은 멍하니 눈썹을 깜빡거렸다. 현규하가 그의 눈가를 닦아 주고 나서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전이된 신의 슬픔과 고통이 그의 감정을 압도했다.
“너무 이입하지 말아요. 전부 지나간 과거의 잔재에 불과할 뿐이니까.”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정말 아까 그 보스처럼 싸우려고 할까요? 극히 드물지만 히든 보스는 재량껏 헌터들을 보내 줄 때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사이에도 아타베이라의 호곡성은 끊이지 않았다.
“천만에요. 가장 위험한 최악의 상황입니다.”
“혹시 저희를 아까 그, 환영 속에서 사람들을 학살한 백인이라고 오해라도 해서요?”
“아니요. 저 신에게 이제 피아의 식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현규하의 낯에는 어느새인가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유신 씨, 당신은 지금 아타베이라의 감정을 느끼고 있나요?”
“굉장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거 같아요.”
“그게 문제입니다. 신은 인간보다 고차원의 존재인데 인간인 우리가 신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에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어서 고개를 갸웃하는 인유신에게 현규하가 마른 음성으로 속삭였다.
“조악한 비유지만 날벌레나 지렁이가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까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같이 기쁨이나 슬픔을 나눌 수 있을까요?”
“……못 하죠.”
“하지만 나도, 유신 씨도 아타베이라의 감정을 이해했어요. 그건 즉, 신이 미쳤다는 겁니다. 완전히 미쳐 버려서 감히 인간이 이해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을 만큼 하위 차원으로 실추했다는 뜻이에요.”
현규하의 입술 끝이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아타베이라를 섬기던 타이노인은 도래한 백인들에게 학살당하여 맥이 끊기고 종교와 문화는 전부 파괴당했습니다.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죠.”
그들이 상대해야 할 것은 끔찍한 슬픔과 고통 끝에 미쳐 버린 신이었다.
아타베이라는 기억한다.
망각은 망각하지 못하는 신이 그들의 피조물이자 아이인 인간에게 베푼 축복이다. 망각하지 못하는 신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달과 민물과 다산의 신 아타베이라는 기억한다.
그녀의 아들, 바다와 카사바의 신 유카후가 첫 번째 인간을 만들었을 때를. 영웅 데미난이 부풀어 오른 등의 고통을 딛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카라카라콜의 혈맥을 이어 갔던 것을. 그리하여 인간을 보다 더 가깝게 굽어보게 된 순간들을.
동쪽으로부터 도래한 백인들에 의해 그녀를 섬기던 아이들이 무참히 살육당하는 모습을. 애타게 그녀를 찾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아이들의 절규를. 처참하게 죽어 가는 순간에도 그녀를 조각한 소박한 신상을 품에 안던 아이를. 마지막 남은 아이가 지켜 주지 못한 신들을 증오하며 토해 낸 최후의 숨결을.
아타베이라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우짖었다. 모든 신도를 잃고 신앙의 맥이 단절되어 미쳐 버린 신은 신성한 신력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적을 현현하지 못한다. 이성 없이 맹목적인 분노에만 휩싸여서 무턱대고 후려칠 뿐이었다.
그럼에도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육체의 공격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 없는 흉기였다.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대지가 진동하고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해저에서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바다가 끓어올랐다.
“우왓!”
바다로부터 끓어오른 물이 날카로운 창날처럼 치솟았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 순간, 그의 허리를 감싼 현규하는 이미 그 자리를 피해 아타베이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쿠우웅! 묵직한 팔이 날벌레를 쫓아내듯이 날아왔다. 아타베이라의 손은 허공으로 도약한 현규하의 다리 아래를 지나 마수의 시체로 가득한 땅을 찍어 눌렀다. 사체가 뭉개지고 파편이 튀어 오르며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이리저리 몸을 피하기만 하던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대전차 화기를 꺼내어 그대로 쐈다. 격중하는 로켓탄의 폭음에 인유신은 잠깐 기대를 품었지만, 허사였다. 자욱한 포연이 가시자 드러난 아타베이라의 거대한 신체는 상처 하나 없이 건재했다.
신력을 다루지 못하며, 미쳐 있고, 허신에 불과할지라도 신은 신. 인간이 만든 조야한 무기는 신에게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음, 역시 안 통하네. 미군한테 직구로 비싸게 산 건데.”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어쩌긴요. 존버해야죠.”
“예?”
“힘 빠질 때까지 존나 버팁시다.”
현규하는 인유신의 허리를 안고서 아타베이라 머리 너머의 하늘로 몸을 띄웠다.
【———!】
지상의 아타베이라가 울부짖었으나 그 팔은 닿지 못했다. 하늘을 울리는 진공파도 사이코키네시스를 응용한 역장을 치자 전부 튕겨 나갔다.
인유신을 놓은 현규하는 허공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무심히 아래를 응시했다.
“진짜 신이 아니라 허신이니까, 언젠가는 지칠 거예요. 던전 안에 우리가 있는 이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거고. 힘을 빼 놓은 뒤에 살살 피해서 유신 씨는 내보내 줄게요.”
“그럼 규하 씨는……. 규하 씨의 마나도 무한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뭐, 나 하나는 어떻게든 되겠죠.”
“…….”
“유신 씨가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 않도록 뭔가 좀 가지고 올 걸 그랬네요.”
닿지 않는 팔을 뻗고 발을 굴리며 분노에 길길이 날뛰는 아타베이라를 응시하는 시선에서 인유신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그 눈동자였다. 은행에서 마주쳤던, 더 없는 권태감에 젖어 있던 시선.
인유신은 가만히 그의 상태창을 불러왔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무료.]
그뿐이었다. 허신과 조우한 최초의 경악이 가신 현규하는 이제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전투에 임하며 늘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제아무리 현규하라 할지라도 마나와 능력의 한계치는 있다. 그 한계에 달할 때까지 아타베이라를 던전에 묶어 두고, 그 뒤에는? 마나가 바닥나면? 과부화된 뇌가 더 이상 사이코키네시스를 운용하지 못하면? 현규하는?
인유신은 몹시 불안해졌다.
“……유신 씨.”
갑자기 현규하가 손을 뻗었다. 턱을 스친 손이 인유신의 목덜미를 가만히 짚었다. 두근, 두근, 두근. 불안감에 젖은 심장의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현규하의 안색이 급변했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불안. 불안. 불안. 불안.]
인유신은 현규하의 권태를 지우며, 불안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다.
“왜 무서워요? 뭐가요? 내가 당신은 꼭 보내 준다고 했잖아요.”
방금 전까지의 무심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현규하가 안절부절못하며 인유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야, 저는 무사히 보내 주실 거라는 말을 믿지만요.”
“그럼 됐잖아요.”
“규하 씨가 던전에 혼자 남게 되잖아요. 저는 전투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나야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죠.”
“그 방법이 뭔데요?”
“…….”
현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인유신은 이대로 죽는다 해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그의 권태 앞에서는 죽음조차 무의미한 것이다.
“저 혼자는 안 나갈래요. 제가 버프를 걸면 마력 소모가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요? 방법을 같이 찾아봐요. 이래 봬도 이능부에서 일하면서 주워들은 거 많아요.”
현규하가 묵직하게 신음하며 이마를 눌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무슨, 눈이요?”
“19년 전의 그 꼬맹이가 자꾸 생각난단 말이야.”
의미 모를 대꾸를 중얼거린 현규하는 얼굴을 문지르곤 고개를 돌렸다.
“딱 하나 방법이 있긴 있어요. 잔인한 수단이라서 쓰고 싶지 않았던 건데……. 당신이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러면서 그는 인유신의 목덜미를 다시 짚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러니까 제발, 불안해하지 마요.”
“안 그럴게요.”
“손 한 번만 잡아 줘요.”
인유신은 잠자코 현규하의 손을 맞잡았다. 식은땀이 조금 배어난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에 얽혔다. 자신보다 더 불안해하는 건 오히려 현규하 같았다. 테이밍이 아니었다면 현규하는 지금도 불안감은커녕 무심한 시선을 내리뜨고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