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14)

“네?”

“사유 던전을 관리하는 의무는 낙찰받은 사람이나 길드에게 있어요. 내 던전이 폭주해서 피해가 발생하면 전부 내가 보상해야 합니다. 저놈들을 풀었다가는 파주 정도는 너끈히 초토화가 될 텐데 아무리 내가 돈이 많아도 그랬다가는 파산이에요.”

그러며 현규하는 퍽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빚쟁이가 되었다고 주인님에게 유기되면 어쩌죠?”

인유신은 기가 막혔다. 한편으로는 감탄스러웠다.

“아니, 어떻게 규하 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개소리가 나와요?”

“주인님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어서 슬프네요.”

“전부 규하 씨 때문인데요.”

“뭐, 아무튼. 내가 던전 브레이크를 예상하면서 주인님을 모시고 왔는데 아무 대책도 없을 만큼 무책임한 인간은 아니잖아요?”

확실히 그건 그랬다.

인유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푼 현규하가 양손을 깍지 껴서 스트레칭을 하듯 위로 길게 뻗었다. 손을 놓았다고 해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인유신은 깜짝 놀라서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붙잡는 건 상관없는데, 팔을 좀 위로 올릴래요?”

“아, 불편하세요?”

“위치가 조금 위험하네요.”

“위치가 무……. 으히아으아악.”

인유신은 기겁해서 애매하게 장골에 두르고 있던 팔을 위로 올렸다.

겨우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 마수들은 발아래까지 쇄도해 있었다. 공중에 있는 그들을 향해 비행형 마수가 날아왔다. 지면에서는 마수들이 도약하고 서로의 몸통을 타고 오르며 그들에게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냈다.

핏기가 서린 마수의 습한 숨결이 가깝다. 희번덕거리는 동공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다. 돌멩이를 문지르는 듯한 기이한 울음소리가 쫓아온다. 인유신은 아득히 다가오는 14년 전의 기억에 파묻히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가슴과 허리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매달린 인유신의 손등을 토닥이며 현규하가 속삭였다.

현규하는 14년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눈앞의 마수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고만 여길 터였다.

한데도 그의 한마디는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인유신의 혼란을 단단하게 붙잡아 주었다. 이 사람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인유신은 한숨을 삼켰다.

“좋아. 이쯤이 좋겠군.”

허공으로 몸을 더 높이 띄워 지평선까지 전부 시야에 담은 현규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유신도 미약하게나마 각성자다. 현규하를 중심으로 한 마나의 흐름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피부에 오슬오슬한 소름이 곤두섰다. 지금까지 그가 본신의 능력인 사이코키네시스로 전투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을 무한정으로 갈기는 것 정도야 막말로 마나와 무기가 충분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다. 놀랍도록 정확한 동체 시력과 운동 신경이 뒷받침되기는 했으나 그가 사이코키네시스를 사용한 건 기관총을 허공에 고정하여 쏘았을 때뿐이었다.

세상에 사이코키네시스를 지닌 각성자는 더러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현규하처럼 이적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리라.

“피비린내가 조금 날 겁니다.”

나직한 말과 동시에 현규하가 양팔을 서서히 위로 올렸다. 시야가 뒤집혔다. 아니, 지평선까지 새까맣게 매운 수천수만 마리의 마수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날개 끝에 돋아난 발톱으로 할퀴려던 마수가 뒤집혔다. 육중하게 쿵쿵 밀고 오던 마수의 다리 세 개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날카롭게 튀어 올라 작살처럼 꿰려던 마수의 주둥이가 꺾였다.

키르륵. 끼아아. 캬하아아앗.

마수들이 울부짖었다. 시커먼 마수 떼로 덮여 있던 땅이 드러나고, 이제 푸르른 하늘이 마수로 가득 찬다.

인유신은 감탄성을 뱉지도 못하고 입만 벌린 채 앞을 바라보았다. 현실이 아니라 차라리 영화나 CG 같은 느낌이라 실감도 나지 않는다.

“으아…….”

겨우 1미터 앞에서 허공으로 발버둥 치며 끌려 올라가는 마수의 눈알과 시선이 마주친 뒤에야 신음 같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인유신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현규하의 뒤로 더 숨었다. 마수도 당황하거나 경악할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마수 떼는 하늘로 올라갔다. 높이. 높이. 높이. 더 높이.

그를 따라 올라간 인유신의 얼굴이 뒤로 크게 꺾였을 무렵, 현규하는 수직에 가까이 들어 올린 양팔을 그대로 떨구었다.

끼아아아아아.

단말마의 비명이 길다. 상공으로 치솟은 마수들이 추락한다. 추락의 시간이 길다. 쿠웅! 쾅! 퍽! 지면에 크레이터가 연속으로 퍽퍽 파인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곤죽이 된 마수의 사체 위로 또다시 마수들이 추락한다.

마수들이 연이어 추락하는 굉음으로 지면이 뒤흔들렸다. 살과 뼈가 부러지는 파육음이 단말마의 비명 사이로도 둔하게 울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규하는 바다에 늘어선 범선들도 상공으로 높이 올린 뒤 마수들의 위로 떨구었다. 콰앙! 쾅! 지면의 바위도, 나무도, 범선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간신히 붙어 있던 마수들의 숨이 끊어졌다.

[던전의 마수가 전멸했습니다.]

인유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린아이가 장난하는 것처럼 가볍고 순식간에 이루어진 살육이었다.

피비린내가 뒤늦게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추락하는 여파로 인해 지면에 흙먼지가 짙게 피어올라 저 참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똑똑히 목격했다면 꽤 오랫동안 밤잠을 자지 못했을 테니까.

“다친 데는 없죠?”

“그, 어……. 네…….”

던전 보스를 한순간에 죽였을 때는 허탈감이라도 들었는데, 지금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는 이 남자가 아예 다른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아, 이제 좀 몸이 풀리는 거 같네. 게이트 밖에서 이 짓거리 했다가는 몬스터 웨이브를 혼자 다 때려잡고도 피해 보상금 지급으로 파산할 테니 못 하거든요.”

“그건……. 확실히…….”

도로며 건물도 다 박살이 나고 지면 아래의 하수관이나 지하철 등도 결딴나겠지.

평소 같은 농담을 듣다 보니 서서히 충격이 가시기 시작했다. 인유신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현규하의 허리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아뇨. 유신 씨도 알겠지만 던전 안에서 브레이크를 정리하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히든 보스가 나와요. 내가 찾는 건 거기에 있습니다.”

“히든 보스는 콜럼버스 둘일까요?”

“그럼 편하겠지만 아마 콜럼버스와는 반대로 타이노인들의 전설 속 영웅이 아닐까 싶어요. 내 추측으로는 데미난이라는 영웅이…….”

[던전의 히든 보스 ‘허신(虛神) 아타베이라’가 나타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신이라니 몹시 위험할 거 같다. 하지만 현규하라면 어떻게든 해결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규하 씨, 저건 뭔데요?”

지금까지 본 게 있으니 큰 걱정 없이 현규하를 부른 인유신은 흠칫했다. 몬스터 웨이브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그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타이노 신화의 최고신입니다.”

“진짜 시, 신이라고요?”

“네. 신이요.”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현규하가 인유신을 내려다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우리 좆 됐습니다.”

던전 보스와는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히든 보스가 생성되기 시작하자 던전 자체가 우웅 웅 진동하며 요동쳤다. 마나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일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 결정석이 뚜렷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위치는 바다 위. 그러니까 한참 떨어진 허공에 떠 있는 인유신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결정석이 엄청나게 크다는 거였다. 결정석의 크기는 보통 마수의 강함과 비례한다.

“하하하.”

식겁한 인유신은 그냥 소리 내어 웃기만 하는 현규하를 짤짤짤 흔들었다.

“우, 웃지만 말고요!”

“그럼 울까요?”

“울지도 마세요! 저거 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히든 보스라고 예상하고 싸울 준비를 한 건 전설 속 영웅이지, 최고신이 아니었거든요. 그리스 신화에 비교한다면 오디세우스를 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우스가 튀어나온 상황이에요, 이거.”

낯설기 짝이 없는 이름보다 단번에 머리에 확 박히는 설명이었다. 덕분에 인유신은 비명을 질렀다.

“제우스를 어떻게 때려잡아요!”

“하하.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웃지 말라니까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완전히 형성되기 전에 빨리 도망쳐서 지원군을 불러와야 하나. 아니, 그런데 지원군을 불러와도 다들 고만고만한 헌터들인데 제우스를 잡을 수 있나? 제우스를 때려잡기 위해서는……!

“기간토마키아(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맞서는 신들의 전쟁.)!”

“진정하세요, 유신 씨.”

“지구 어딘가에 티탄이나 가이아가 히든 보스로 있는 던전이 있지 않을까요? 히든 보스를 불러내서 제우스랑 싸우게 하면……!”

“좋은 아이디어인데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허신은 아타베이라입니다. 진짜 제우스가 아니라요.”

“아.”

“진정하고 내가 말하는 대로 침착하게 심호흡하세요. 호흡을 빠르게 하면서 세 번에 한 번씩 천천히요.”

“히, 히, 후우…….”

현규하가 시키는 호흡법을 따라 하다 보니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왔다.

“효과가 좋네요. 뭐예요? 다음에 또 멘붕할 일이 생기면 따라 해 볼게요.”

“라마즈 호흡이요.”

“…….”

애인도 없는, 아니 진짜 애인도 없는 미혼의 남자가 어떻게 라마즈 호흡법 같은 걸 알고 있는 거지?

떨떠름하고 미묘해진 인유신의 시선에도 현규하는 별 타격 없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예 자포자기하고 히든 보스가 형성되는 걸 구경하는 것만 같았다.

허신 아타베이라는 서서히 형상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개구리의 몸에 여성의 얼굴을 한 신이었다.

“이 던전의 배경이 콜럼버스와 타이노인이니 공부를 좀 했습니다. 아타베이라는 타이노인들의 종교에서 최초의 신이자 창조신으로, 신들의 어머니이기도 해요. 자애로운 동시에 잔혹하다는 양면적인 측면이 있죠. 개구리가 몸체인 게 보이죠? 바로 저 개구리가 아타베이라의 성수(聖獸)입니다.”

“무척 유익한 TMI이긴 한데 던전에서 살아 나가는 데 도움이 될까요?”

“글쎄요…….”

현규하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뭔가 상당히 내키지 않는 게 있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여기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은 꼭 던전 밖으로 보내 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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