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14)

입만 떡 벌린 인유신의 앞으로 현규하가 여유 있게 걸어왔다. 저런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마나를 때려 부은 주제에 얄미울 만큼 멀쩡한 얼굴이었다.

“역시 헌팅은 솔플로 해야 제맛이야.”

“…….”

“알아요. 내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유능하기까지 한 남자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굳이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주인님의 칭찬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현규하는 얼른 쓰다듬으라며 머리를 숙였지만 인유신은 오히려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이게 말이 돼요? 보스가 너무 쉽게 잡히잖아요!”

“당신의 유능한 애완쥐의 사랑스러움을 칭찬하십시오.”

“으아악.”

“칭찬 안 해요?”

“싸운 직후인데 지금 칭찬하면 버프 주는 거랑 똑같잖아요!”

“쳇.”

현규하가 ‘들켰군.’이라는 표정으로 혀를 차는 건 눈의 착각일 것이다, 아마도.

인유신은 허망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장한 게 무색했다.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보스를 정리하고 던전 공략까지 끝낼 수 있는 거였구나…….

‘내가 헌터였으면 규하 씨를 보고 좌절해서 두 번 다시 던전 공략을 안 했을 거 같아…….’

그가 주로 홀로 던전 공략을 나서는 건 헌터들의 정신 건강과 멘탈을 보호하는 숭고한 일이었다…….

“아 참, 보스 잡히면 게이트는 언제 닫혀요?”

“리셋이 끝나면요.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결정석 가져가고 싶으면 챙겨요.”

주변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마수의 사체가 깔려 있었고, 그 사체마다 결정석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한마디로 노다지판이었다.

“규하 씨는요? 이따가 인부들 데리고 다시 오시게요?”

“큰 거 하나만 챙기죠, 뭐.”

포스 필드를 거둔 현규하는 너덜너덜한 고깃덩어리가 된 ‘일그러진 망집의 학살자’의 사체에서 결정석을 꺼내 왔다.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크기의 결정석을 본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우와. 보통 결정석들은 커 봤자 손가락 두 마디 정도라던데 던전 보스의 결정석은 엄청 크네요. 이 정도면 S급이죠?”

“올해 세금도 이걸로 낼 수 있겠습니다.”

인유신은 저 커다란 결정석에서 부스러기 하나를 떼어 내면 자신의 연봉이 될지 궁금해졌다.

감탄하는 그의 표정을 관찰하던 현규하가 비뚜름히 고개를 기울였다.

“갖고 싶으면 줄게요.”

“네? 규하 씨의 세금을요? 제가요?”

“돈으로 환산해도 좋겠지만 이 결정석의 마나를 흡수하면 당신의 능력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어쩌면 테이밍한 햄스터로 군단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어요?”

순간 인유신의 머리에는 작고 귀여운, 무한한 햄스터들이 자그마한 입을 오물오물하며 자신을 둘러싸는 극락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따끈따끈하고 오밀조밀한 푸근한 생명체. 그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광경이었으나…….

‘헛! 정신 차려! 이건 함정이야.’

황급히 행복한 공상에서 탈출했다.

“규하 씨의 동생, 아니 다른 햄스터 테이밍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현규하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인유신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다른 햄스터를 더 테이밍하기로 했다가는 서울이 망할 뻔했다. 서울이 망하는 것도 문제지만, 서울이 망하면 가까운 개성까지 조진다.

“기억하고 있었다니 기특하네요.”

“근데 찾던 아티팩트는 찾으셨어요?”

“아티팩트라니요?”

“던전에서 찾을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귀속 아티팩트 아니었어요?”

“아뇨. 귀속 아티팩트가 더 있으면 편하긴 하겠지만 지금 갖고 있는 두 개로도 쓸 만합니다.”

“그럼 뭐 찾으려고 하신 건데요?”

“굳이 분류하자면 아티팩트도 아주 틀린 말은…… 잠깐만.”

불현듯 현규하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덩달아 인유신도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현규하보다 마나의 응용력이 떨어지는 그가 이상을 감지한 건 시스템창에 새 메시지가 출력된 후였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인유신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평상시의 던전에 구성되는 개체수의 몇 배나 되는 마수들이 일거에 쏟아지는 던전 브레이크. 이는 일반적으로 던전 리셋이 거듭되거나 던전 내의 마나가 지나치게 응축되었을 때, 즉 던전을 정리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보스를 방치해서 인위적으로 던전을 폭주시켜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던전 보스까지 죽여서 클리어한 게이트에서 브레이크가 터졌다는 사건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 어떡해요. 규하 씨.”

현규하의 실력은 아까 눈으로도 확인했다. 하지만 혼자 던전을 클리어하며 그 많은 무기와 마나를 소모했는데, 방금 겪은 마수들의 몇 배나 될 브레이크를 홀로 받아 낼 수 있을까?

“빨리 나가서 지원 요청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긴급 연락을 받은 다른 헌터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건 힘을 소모한 현규하도 가능하지 않을까. 자신이 마나를 다 긁어모아서 힐과 버프를 준다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고.

인유신은 긴장감으로 양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현규하가 옆에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란 믿음이 생긴다. 여유 있게 던전을 정리하고, 또 은행 강도로부터 그를 구해 준 현규하라면.

“규하 씨, 저도 뭐라도 도움이 될…….”

결연히 고개를 올린 인유신의 눈동자가 커졌다. 시선이 한참이나 위에 있어서 제대로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현규하는.

“인유신. 나의 ¦°ø¾니ð. 당신 정말 최고야.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어.”

무척이나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 * *

- 도와줘.

* * *

인유신은 눈썹을 깜빡거렸다.

위급한 상황에 걸맞지 않은 현규하의 웃음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네?”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덕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그를 다그쳤다.

“저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셨잖아요. 발음이 꼭…….”

발음이 꼭 오류가 나서 깨진 것처럼. 인코딩 오류인 양 글자가 깨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던전 브레이크를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욱 섬뜩한 오한이 등골을 훑었다. 이 남자는 뭔가 알고 있다. 어째서 시스템이 그를 테이밍하도록 유도한 것인지.

인유신의 눈동자에 비치는 혼란을 아는 것처럼,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 현규하가 싱긋 미소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도 말했잖아요? 당신이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그뿐이에요.”

“……찾는다는 게 던전 브레이크였어요?”

“정확히는 던전 브레이크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물이죠. 지금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합시다.”

현규하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팔을 뻗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이 남자는, 이 관계를 해지할 방법도 알고 있을까.

충동적인 질문이 목 안을 간질거린다.

〈나도 테이밍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볼 테니까, 유신 씨도 능력을 잘 연구해 봐요.〉

문득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테이밍의 의미는 알고 있어도 해지할 방법은 모르는 걸까.

인유신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길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중에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생각해 보고요.”

“…….”

“이리 와요.”

끝내 명확한 설명을 해 주지 않은 남자는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가까이 걸어갔다. 현규하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이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그는 최정상에서 군림하는 헌터다. 강한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보다 먼저 죽지 않을 것이다.

현규하가 인유신의 허리를 감싸듯이 안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부유감이 유독 낯설게 다가왔다. 무심코 그의 팔에 매달리자, 시선을 내린 현규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가를 접었다.

‘이런 상황에도 여유가 넘치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보니 이래저래 심란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희석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팔을 붙잡은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린 인유신은 신음성을 삼켰다. 까마득하게 펼쳐진 지평선 저 먼 곳으로부터 무수한 마수들이 지면에서, 바다에서, 허공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수들 특유의 기이한 음성이 뒤죽박죽 뒤섞여서 울려 퍼졌다. 홰를 치듯 날개를 퍼득거리는 소리,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는 소리, 사납게 튀어 오르는 소리. 무질서한 마수 떼의 혼란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생명체의 멸살. 이 던전 내에 지구의 생명체는 오직 둘뿐이다.

하나의 명령 체계에 조종당하는 군체처럼, 마수들의 눈알이 일제히 움직이며 고정되었다. 마수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인유신은 기겁했다.

“으아아…….”

“무슨 명령어라도 입력된 것처럼 동시에 쳐다보는 게 꼭 호러 영화 같죠?”

태평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마수들은 날개를 퍼득거리며, 육중하게 땅을 밟으며, 높이 튀어 오르며,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마수 떼로 인해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인유신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나마 허공에 떠 있으니 다행이지, 지면이었다면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저거 어, 어떡해요? 너무 많잖아요. 지금이라도 지원 요청을 하는 게 어떨까요?”

“안 돼요. 던전 밖으로 밀려 나가게 했다가는 내가 파산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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