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14)
  • “애완이라는 말은 사랑하고 아껴 주고 귀여워한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귀여워하며 많이 쓰다듬도록 하십시오.”

    현규하에게는 뻔뻔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재주가 있었다. 이 뻔뻔하고도 당연한 발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인유신이 고민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왐마야.”

    막 차에서 내리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 김지연의 탄성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으니까.

    “주무관님, 안녕하세요! 뭔가 오해를 하신 거 같은데요!”

    “안녕하세요.”

    김지연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얼굴을 가리고 후다닥 건물로 달려갔다. 오늘도 또 현규하로 인한 쪽팔림을 적립했다는 사실에 인유신은 좌절했다.

    그녀의 행동이 쵱컾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 씹덕의 승천하는 광대뼈를 가리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 도리는 없었다.

    * * *

    - 오늘부로 현규하의 남친 지지를 철회한다. 지지 관계에서 벗어나 한몸으로 일체가 된다. 현규하의 남친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남친 아니었으면 현규하가 홍보물 찍을 생각이나 햇겠냐? 지금도 던전 돌면서 결정석이나 줍줍하고 잇엇을듯;

    └그것도 그런데... 차라리 결혼소식으로 들었으면 덜 심란했을거 같아서...ㅠㅠㅠ

    └결정석 줍는 뀨 ㅈㄴ ㄱㅇㅇ........

    └└결정석 챙기는 게 햄스터 볼주머니 같을 거 같애ㅠㅠㅠㅠㅠ뀨 햄저ㅠㅠㅠㅠㅠㅠㅠ

    └돌도 아닌데 공개 연애하는 게 뭐 어떰

    └개처럼 일만 하며 떡밥은 몇 달에 한두 번 억지로 착즙하는 솔로 현규하 vs 남친이랑 염천 떨면서 날마다 떡밥 생성하는 현규하

    └└아니 이건 닥후잖앜ㅋㅋㅋㅋㅋㅋ

    └└야 나 첫댓이거든? 밸붕 닥후임 시발ㅋㅋㅋ

    * * *

    “슬슬 일이나 하러 갑시다. 주말에 비는 날 있나요? 주인님 스케줄에 맞출게요.”

    “저는 주말에 집에서 뒹구는 거 말고는 하는 일이 없어요.”

    그렇게 그 주의 주말에 바로 게이트 탐사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마침 월요일이 공휴일이기도 하니 던전을 다녀온 뒤의 피로도 풀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연구에서 게이트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먼저 대변혁의 개시와 함께 계측되기 시작한 대기의 마나 흐름과 응집도를 통해 출몰 시기와 장소를 알 수 있는 지속 게이트. 이 게이트는 흔히 던전이라 일컫는 단절된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두 번째는 불시에 나타나는 돌발 게이트. 돌발 게이트는 마수를 토해 내고 자연 소멸하여 따로 연결된 던전은 없었다.

    그 외의 소수 게이트들은 돌연변이로 취급되어 세 번째 분류로 묶었다. 일례로 현실을 침해하는 침식 게이트가 있었다. 현규하가 9살에 혼자 공략한 게이트이기도 하다.

    한국은 혼란스러웠던 대변혁의 초기를 유엔군을 주축으로 하여 해결한 나라였다. 한국인들은 게이트와 마수의 출현에 익숙해진 것만큼 국가 주도의 통제에도 익숙해졌다.

    마수의 뼈와 가죽은 무구 및 사치재와 산업재가 되고, 마수의 고기는 식량이 되고, 마수의 핵인 결정석은 필수적인 에너지 자원이 된다. 정부는 계측한 게이트의 절반가량을 국영으로 소유하여 자유로운 사냥터로 제공했으며, 나머지는 경매로 내놓았다.

    “경매에 부쳐지는 게이트는 전부 길드가 가져간다고 생각했어요.”

    “경매 참가 조건에 제한은 없어요. 그저 낙찰받으려면 개인보다는 단체가 자금 사정이 유리하니까 주로 길드가 가져가는 편인 거죠.”

    대체 돈이 얼마나 있기에 개인이 길드와 붙어서 던전을 낙찰받았는지 궁금했다.

    “묻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이군요.”

    “그렇긴 한데 안 물을래요.”

    “왜요? 은밀히 감추고 있던 스리 사이즈까지 대답해 줄 용의가 있는데요.”

    “안 그래도 규하 씨는 저랑 다른 세계 사는 거 같은데 재산이 얼마인지까지 알게 되면 아예 같은 사람으로도 안 보일 거 같아요.”

    인유신에게는 현규하가 쪽팔린 소리를 하면 못 들은 척하는 스킬이 생겼다.

    아무튼 현규하는 그 비싼 던전을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나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매스컴에 얼굴 한 번 안 비칠 만큼 일에 미쳤다는 얘기가 사실이긴 했나 보다.

    “길드는 여러 개 소유해도 공략할 사람이 많지만 규하 씨는 혼자서 어떻게 다 관리했어요?”

    “던전에서 찾을 게 있어서요. 있을 법한 던전 몇 개를 찍어서 찾고, 안 나오면 클리어하는 방법으로 돌고 있는데 요새는 영 진척이 없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져서 말이죠.”

    “얼마나 찾으셨는데요?”

    “20년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거운 시간의 무게에 인유신이 말문이 막힌 사이 바이크는 야산에 도착했다. 예전에도 왔었던 바로 그 던전이었다.

    헬멧을 벗자 현규하가 눌린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있다면 그걸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있으면요?”

    인유신은 어리둥절했다.

    “색적이나 탐색 스킬이 없는데 도움이 될까요?”

    “근거 없는 예감이니까 당신이 뭔가를 할 필요는 없어요.”

    “아하.”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해 준 말인가 보다. 납득한 인유신은 고개나 끄덕거렸다.

    “던전을 공략해 본 적은 있어요?”

    “아뇨. 게이트 안에 들어가 본 것도 저번에 규하 씨랑 왔을 때가 처음이었어요.”

    공략은 처음이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미지의 던전도 아니고 이미 현규하가 탐색하고 소유한 던전이다. 게다가 랭킹 1위가 바로 옆에서 보호해 줄 텐데 재수 없게 던전 브레이크라도 터지지 않는 한 안전할 거다.

    던전 안에서 버프만 주지 않으면 될 것이다. 실수로 버프라도 주었다가는……. 인유신은 고개를 저어 얼른 삿된 상념을 털어 냈다.

    “던전 내의 환경은요?”

    “일부러 찾아서 공부한 건 아닌데 석박사 과정 중인 친구가 게이트학 전공이라서 조금 들은 건 있어요.”

    “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얘기로 들은 것보다 더 생생할 테니 마음의 준비는 하세요.”

    현규하가 한 팔을 옆으로 올렸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싶어서 쳐다보니 그가 살짝 손짓했다.

    “옆구리에 끼고 들어가게 여기로 오세요.”

    아, 들어가자마자 바다였지.

    그렇게 인유신은 현규하의 옆구리에 번쩍 들려서 두 번째로 게이트를 넘었다. 약간의 현기증이 가볍게 몸을 훑고, 이전과 똑같은 바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인유신은 대롱대롱 들린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방 어디를 봐도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수평선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 18시간 41분 09초]

    “여기 마수들은 바다에서 올라오나요? 해전이나 해적이 있는 곳이에요?”

    “해적이라는 말은 얼추 맞군요. 조금 더 서쪽으로 갈 겁니다.”

    허공에 뜬 두 사람의 몸이 서쪽 하늘로 움직였다. 현규하와 비슷한 능력이 없는 헌터라면 고무보트라도 가지고 와서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자신은 등급 낮은 각성자에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헌터나 게이트 연구원이 될 확률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던전을 둘러볼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실컷 구경하고 나중에 절에 놀러 가면 자랑도 해야지.’

    그리고 인유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자신의 두근거림이 터무니없을 만큼 얄팍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현규하의 경고가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도.

    「사, 살려 줘! 살려 줘!」

    「어차피 천국으로 가지도 못할 불신자들이야! 전부 죽여!」

    낯선 언어들이 한순간에 번역되어 뇌로 입력되었다. 환상이라기엔 생생하고, 실재의 것이라기엔 불투명한 일단의 무리가 둘로 나뉘어 쫓고 쫓기고 있었다.

    카락과 캐러벨에서 육지로 쏟아지는 선원 차림의 백인들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찔렀으며 맹수를 풀고 전염병을 퍼트렸다. 선주민은 돌을 던지고 흑요석으로 만든 곤봉으로 저항했다. 일방적 학살이었다.

    백인들은 잔혹하게 살해하고 금을 갈취하고 손목을 잘랐으며 노예로 잡아갔다. 여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과 형제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으며 끌려갔다.

    길고 짧은 막대 두 개를 교차한 것 같은 낯선 상징이 선주민들의 주검 위에 군림했다. 백인들은 그 상징에 피와 술과 금을 뿌리며 흥겹게 웃었다.

    “이, 이건…….”

    발아래에 펼쳐진 참혹한 학살의 현장에 숨이 막혔다. 저들은 환영이다. 살육의 공기가 섬뜩하게 코끝을 감돌고 있을지언정 실재가 아닌 단절된 세계의 환영.

    환영이라는 걸 아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목 안이 바짝 탔다. 저도 모르게 현규하의 팔을 붙잡은 손안으로 진땀이 배어났다. 이 광경을 숱하게 목격하였을 현규하가 무심히 설명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처음에 백인들이 침공하는 모습만 봤을 때는 바스쿠 다 가마(포르투갈의 탐험가. 항로를 개척하며 무슬림 등을 학살했다.)인가 했었는데 살해되는 사람들이 인도인이 아니라 타이노인(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에게 학살당한 카리브해의 선주민.)들이더군요.”

    던전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중 찰나에 지나지 않을 한순간만 잘라 내어 고정한 단절된 세계다. 환영은 역사의 흐름에 기록된 시간을 던전 안에서 리셋하며 반복한다.

    그 역사는 그들이 살아온 지구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인유신은 콜럼버스와 그의 선원이 숭상하는 저 상징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저게 대체 뭐예요……? 뭔데 저렇게까지 받들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건지…….”

    “십자가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유신에게 그는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크리스트교의 상징입니다.”

    “아……. 전혀 몰랐어요.”

    “서울 시내에 교회와 성당도 몇 개 없는데 모르는 건 당연하죠. 백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려요?”

    “네. 가만히 두어도 지옥에 갈 불신자들이라면서…….”

    “종교적 광신이죠. 저들은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으면 사후에 지옥으로 떨어질 거라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으니 자기들이 죽여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짐승을 살육하는 것과 같은 감각이에요. 저 시대에는 그게 당연했어요.”

    현규하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까지 이어 해 주었으나, 인유신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에 지배되는 감각은 그의 상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겨우 종교 때문에요?”

    종교는 문화이자 마음의 의지처가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전반을 강제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인유신의 상식이었다.

    “이유의 하나였을 뿐이죠. 실제로 나나 유신 씨가 알고 있는 콜럼버스는 종교적 명분이 없어도 선주민들을 학살하고 탄압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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