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14)
  • ‘아니지. 굳이 살인 청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인유신이 매일 지나가는 길에 살상용 스킬을 깔아 두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는데.’

    머릿속으로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인유신을 죽일 수 있는 무수한 방법들이 떠올랐다가, 떠오른 것처럼 빠르게 흩어졌다.

    〈……처음으로 걱정했다는 그분은요?〉

    현규하는 부추겨지는 감정 가운데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스스로 떠올렸을 감회를 되짚었다. 인유신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에서 뭉클거리며 번지던 그 오묘한 느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참 나.”

    칼로 찔렀던 손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피 얼룩이 남았을 뿐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손을 치유력으로 감싸며 자기가 상처를 입은 것처럼 당황하고 아파하던 그가 떠올랐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쉬이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생명체가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형아, 안 아파?〉

    무서워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앙앙 울면서도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상처를 걱정하던 그 어린아이가.

    19년 전의 그 아이가 지금은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지, 현규하는 불현듯 궁금해졌다.

    2.

    복잡한 상념에 젖어 있느라 잠을 설쳤고, 결국 늦잠을 잤다. 아침을 먹을 시간이 없어서 출근하기 전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지각하면 안 되니까 사무실에 가져가서 먹어야겠다.’

    현규하가 출근길에 태워 주기 위해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슈퍼에서 나온 인유신은 기겁했다.

    “제가 슈퍼에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주인님을 쫓는 애완쥐의 본능입니다. 바로 출근할 거죠?”

    “그렇긴 한데…….”

    인유신은 얼떨떨하게 뒤에 올라탔다. 현규하는 평소처럼 그의 앞 머리칼을 정돈해 준 뒤 헬멧을 씌워 주었다.

    그 덕에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도 어색하지 않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역시 경황이 없다.

    ‘진짜 어떻게 알고 슈퍼 앞에 서 있었던 거지? 슈퍼에 들어가는 걸 봤나?’

    하지만 그 의문을 해소하기 전에 현규하가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인유신은 얼른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는 길에 당신의 버프에 대해서나 들어 보죠. 어떤 버프입니까?”

    “원기와 마나를 회복하는 거요. 지금까지 테이밍한 게 쥐뿐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한번 나한테 써 보세요.”

    “지금요?”

    출근길에 어떻게 마나를 활용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버프를 걸어 주었다.

    현규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마나를 소모했다.

    “우와……!”

    골목길을 달리던 바이크가 하늘로 부상했다. 서서히 부유하는 바이크 위에서 인유신의 시야도 넓어졌다.

    익숙한 동네의 풍경이 조감도나 모형도처럼 발아래에 펼쳐졌다. 고개를 올리니 언덕을 지나 하늘로 솟은 마천루의 풍경이 보였다. 몇 미터 상승했을 뿐인데 구름이 손에 잡힐 듯 훌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차가워진 바람마저 유쾌했다. 유원지에서 놀이 기구를 탄 것처럼 즐겁고, 재미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봐요!”

    “좋아요?”

    “네!”

    한순간에 아득하게 높아진 부유감은 아찔하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구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현규하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근데 당신의 버프는 마수를 사냥할 때나 던전 안에서는 쓰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아, 효과가 별로예요?”

    “아니요. 지나치게 좋아서 문제입니다.”

    “……?”

    “설 거 같거든요.”

    인유신은 의아했다.

    선다고? 바이크에 타고 있는데 사고 나면 어쩌려고 선다는 거지? 설마 다른 의미는……. 아……니……겠…….

    “뭐가 선다는 건지…….”

    “당신이 상상하는 그게 맞습니다.”

    “힉!”

    현규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팔이 움찔했다. 접촉할 때마다 자꾸 자동으로 튀어 오르는 게 번거로워서 시야 구석으로 밀어 놓은 현규하의 상태창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기쁨. 흥분.]

    끄아아아악.

    이런 데서 세울 거 같다는 말이나 하는 남자의 허리를 계속 안고 있어도 되나?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여, 여, 여기서요?!”

    “아직 안 섰어요. 그리고 조금 빠르게 갈 거니까 허리 꽉 붙잡아요. 매달려도 되고요.”

    “저 그냥 내려 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흐아아아악.”

    내적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현규하는 정말 빠르게 바이크를 움직였고, 살고자 하는 인유신의 생존 본능은 그의 허리에 바짝 매달리게 했다.

    인유신은 눈물을 삼켰다. 진짜 거기에다 버프를 줬으면 억울하지도 않았다. 기력이나 마나 소모를 회복시켜 주는 버프가 왜 그런 쓸데없는 신체 부위에 작용이 된단 말인가.

    ‘아 씨, 그냥 지하철 타고 간다고 할걸.’

    도로를 무시하고 건물 사이의 허공을 질주한 바이크는 빠르게 이능부 청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내려서자마자 인유신은 후다닥 바이크에서 뛰어내려 몇 걸음 물러났다. 가방을 가슴 앞에 꽉 끌어안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그의 반응에 현규하는 오히려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성애자니까 안심하세요. 당신의 몸이나 엉덩이에 흥분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그치만 섰……. 아니, 그게 그렇다면서요! 왜요!”

    “그야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요!”

    “지금은 괜찮다니까요. 안 보여요?”

    현규하는 엄지를 아래로 꺾어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지만 인유신은 절대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주인이 칭찬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예뻐해 주면 개들도 좋아하잖아요? 주인님의 은총인 당신의 버프가 그런 거랑 같은 거예요. 내가 애완견이었다면 프로펠러라도 달린 것처럼 흔들다가 꼬리뼈가 부러졌을걸.”

    “반려견은 쓰다듬어 준다고 해서 그, 하지는 않잖아요!”

    “당장 그런 반응은 아니라니까요.”

    현규하가 한 걸음 다가서자 인유신은 기겁해서 두 걸음 후다닥 물러났다. 가시 돋친 소동물 같은 모습에 현규하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 놀리는 게 가장 가성비 좋은 기분 전환이네.”

    그딴 걸 확인 사살로 듣고 싶지는 않았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당신에게 버프를 받으면 잘하고 있다고 칭찬받고 사랑받는 거 같아서 기뻐요. 평소에는 감정이 고조되기만 할 뿐이죠. 근데 전투 중에는 뇌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되잖아요? 엔도르핀이 분비된 와중에 감정까지 고조되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어음, 어…….”

    “다른 쪽으로도 반응이 올 거 같다는 얘기죠.”

    “그, 그럼…….”

    인유신은 힐끔 현규하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에는 버프를 줘도 괜찮다는……. 거죠?”

    “불안하면 중성화 수술이라도 할까요.”

    “그건 하라고 해도 안 할 거잖아요!”

    “때로는 주인님에게 항명하는 쾌감도 있는 법이죠. 하지만 후처리를 라스푸틴처럼 해서 당신의 방에 보존하는 조건이라면 고려해 볼게요.”

    “서, 성희롱인데요!”

    놀림에 말려들어 간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는 라스푸틴의 그, 표본 사진을 떠올려 버린 인유신은 속이 안 좋아졌다.

    ‘왜 아침부터 그런 걸 떠올리게 하냐고.’

    조금 원망스러워하는 눈으로 보자 현규하는 “음.” 하며 턱을 문지르더니 인유신의 머리칼을 슥슥 헤집었다.

    “당신 반응이 재미있어서 과했네요. 어쨌든 평상시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얘기까지 들었는데 신경 쓰지 말라는 건 좀 무리한 게 아닐까.

    “근데 정말 당신에게 버프를 받으니까 기분이 좋거든요. 확인할 게 있는데 한번 날 쓰다듬어 볼래요?”

    “네? 제가 규하 씨를요?”

    현규하가 종종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는 6살이나 어리기도 하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반대로 되니 갑자기 낯설어졌다.

    ‘뭔가 확인할 게 있다고 했으니까…….’

    조금 망설이다가 팔을 올리니 현규하가 허리를 굽혔다. 인유신은 햄스터를 핸들링하는 기분으로 조심조심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든 현규하가 엷게 미소했다.

    “쓰다듬어 주기만 했는데도 확실히 기분이 괜찮아졌어요. 당신에게 봉사하는 것만큼은 안 되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가성비네요.”

    “어, 그럼……. 다행인가요?”

    “다행이죠. 효율적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는 인유신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 올리게 했다. 허리를 안을 때처럼 단단한 근육질이 느껴지는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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