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14)

현규하 앞에서 찍소리도 못 하는 홍 팀장을 제외한 민원실의 모두가 행복했다. 안 그래도 연애한다는 소문이 났는데 애인……까지 사무실에 죽치고 있어서 민망해 죽을 거 같은 인유신은 살짝 미묘했지만.

여하튼 민원에 시달릴 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업무 만족도는 대폭 상승했다. 호통치면서 욕부터 갈기는 민원인에 비하면 지금 인유신의 앞에 있는 사람 같은 케이스는 무척 쉬운 케이스였다.

“아, 저기, 마수한테 피해를 당했는데…….”

“피해 증명을 할 수 있는 사진이나 서류 같은 건 있으세요?”

“죄송해요. 깜빡하고 안 챙겨 왔네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순순히 물러난 사람은 바로 사무실을 나가지 않고 민원실에 비치된 잡지를 읽고 있는 현규하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예상했던 대로 거짓말을 하며 들어온 현규하의 팬이었다.

번거롭긴 했지만 민원실에서 2년 동안 단련된 인유신은 오히려 반가웠다. 업무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으면 됐다.

그날도 그렇게 평탄하게 마무리되려나 했는데 갑자기 현규하가 던전 공략을 가자는 얘기를 던져 왔다.

“던전이요? 제가요?”

“네. 한참 매너리즘에 빠져서 게이트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슬슬 재개해 보려고요. 나는 숨만 겨우 쉬며 살아도 세금이 줄줄 새는 가련한 고액 납세자랍니다.”

“규하 씨가 일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제가 따라 가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주인님과 같이 가는데 방해될 리가요.”

다시 튀어나온 주인님 운운에 인유신은 현규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사냥개들도 혼자 사냥을 나가는 것보다는 주인과 같이 가야 효율이 증대되지 않겠어요? 일종의 심리적인 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나도 주인이 반가워서 꼬리 흔드는 개새끼처럼, 아니 쥐새끼처럼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사냥을 하게 될 거라 그 말이에요. 근데 쥐도 반가우면 꼬리를 흔들던가?”

쥐는 그렇다 쳐도 꼬리 흔드는 박쥐는 듣도 보도 못했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주인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민망해서 뺨이 화끈거렸다.

다행히 사무실 사람들은 주인님이라 부르든 마님이라 부르든 여보님이라 부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진상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옵신 거룩한 성 현규하께서 주인님이라 하시매 그곳에 주인님이 계시더라.

뭐, 현규하의 언행에 익숙해지면서 주인님도 자연스럽게 애칭으로 여겨지곤 했고.

‘참, 지금까지 테이밍했던 햄스터랑 흰쥐한테는 어느 정도 힐과 버프가 가능했는데 규하 씨한테도 될까?’

테이밍에 관한 화제는 듣는 사람이 없어야 될 거 같아 퇴근 후에 다시 말하자는 얘기를 하려는데, 홍 팀장이 끼어들었다. 현규하의 눈치를 보면서도 비빌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다운 약삭빠름이었다.

“하하, 헌터님. 기왕 던전 공략을 하시는 거, 저희 쪽과 같이 홍보 영상이라도 하나 찍어 보는 건 어떠세요? 마침 헌터님이 저희 이능부에도 익숙해지셨으니 아다리가 잘 맞아서 와꾸가 예쁘게 뽑힐 거 같지 않습니까?”

“내 외가가 독립운동가 집안입니다. 일본 말 듣기 불쾌하네요.”

“시, 시정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입을 닥치게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현규하가 잠자코 턱을 문질렀다.

“근데 홍보 영상은 괜찮은 거 같군요. 유신 씨와 가려던 던전은 내 사유 던전이라서 기각이지만, 다른 던전이라면 나쁘지 않겠는데요?”

“정말이십니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쇼!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현규하가 가볍게 손짓했다. 홍 팀장과 얘기가 길어지자 신경을 끊고 업무를 하고 있던 인유신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 떴다.

어쩐지 이 느닷없는 부유감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공중을 날아가 현규하의 무릎에 안착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팔이 허리를 감아 온다.

“……!”

자신처럼 몰랑몰랑한 게 아니라, 조밀한 근육이 단련된 탄탄한 허벅지였다. 그걸 손도 아니고 엉덩이로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해졌다. 얼굴에 열이 훅 올랐다.

접촉 면적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엉덩이를 꼼지락거렸지만 허리에 감긴 현규하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옅은 호흡이 귓불의 솜털을 사르르 쓸어내리는 감촉에 등골까지 찌르르했다. 인유신에게만 겨우 들리는 낮은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우리 주인님은 사무실인데도 상당히 대담하네.”

“……?”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인유신은,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엉덩이로 느껴지는 감촉이 허벅지만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허벅지 쪽에 수납된 굵고 두툼한 무언가를 제 엉덩이로 비비적거리고 있었던…….

‘흐아아아아아악!’

인유신은 속으로 거의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옆자리에 앉았다. 현규하의 입꼬리가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재미있음.]

‘이런 거로 재미있어하지 말라고요……!’

감정의 디폴트에 살의를 깔고 있으면서 놀리는 걸 재미있어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현규하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인유신의 어깨를 보란 듯이 감싸 안으며 홍 팀장에게 제안했다.

“내 조건은 유신 씨입니다.”

“네?”

“공무원도 실적 반영은 할 거 아닙니까?”

물론 당연히 자기 성과 평가를 위해 홍보 영상을 찍자는 제안을 꺼냈던 홍 팀장이었다.

“그 실적을 유신 씨의 업무 평가에도 반영하시죠.”

죽 쒀서 개 주게 생긴 홍 팀장은 눈을 부릅떴고, 인유신도 깜짝 놀랐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홍 팀장이 변명했다.

“유신 씨는 계약직인 데다 홍보와는 관련 없는 업무를 맡고 있다 보니…….”

“일단 유신 씨 이름만 올려놓으면 예쁘게 틀을 짜 맞추는 건 실무자들이 알아서 하겠죠.”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바 아닌 현규하가 겨우 진정한 인유신을 돌아보았다.

“유신 씨.”

“앗, 네.”

“유신 씨는 계속 계약직으로 근무할 건가요? 뭐, 일하는 게 싫으면 내가 평생 먹여 살려 주는 방법도 있긴 한데요.”

인유신은 뒷말은 못 들은 척하며 대답했다.

“계약 연장이 안 되면 다른 일 알아봐야죠.”

“무기 계약으로 전환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기회가 저한테 오는 걸 기다리는 것보다 로또 당첨되는 게 더 빠를 거 같아요.”

“어쨌든 되긴 된다는 거네요. 실적 쌓으면 좋은 평가가 따르겠죠?”

안 되면 강제로라도 전환을 시켜 주겠다는 말처럼 들려 홍 팀장은 식은땀을 닦았다.

“그, 아마, 음, 유신 씨 업무로 돌리는 거 가, 가능할 겁니다! 헌터님이 원하신다면, 네!”

최고 공적이 인유신에게 넘어가도 주워 먹을 건 있을 것이다. 생각을 고쳐먹은 홍 팀장은 열렬히 호응했고, 현규하도 산뜻하게 응했다.

“그럼 홍보물 찍읍시다.”

덕밍아웃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팬 커뮤니티에도 관련 썰을 일절 풀지 않으며 참던 김지연의 인내심은 그의 한마디로 화려하게 폭발했다.

- 얘들아!!!!!! 규하 이능부 홍보 영상 찍는다!!!!!!!!!!!!!!

데스크 밑에서 몰래 휴대폰을 터치하는 그녀의 현란한 손가락으로 인해 팬 커뮤니티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정부 부처이니만큼 신중하고 어느 정도 경색될 수밖에 없는 업무 처리가 역대급으로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홍 팀장이 디지털소통팀장에게 달려가고, 기안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홍보담당관으로부터 바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결재도 순식간이었다.

최상위권 랭커. 빼어난 외모.

대중이 열광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미디어 노출이 극히 드문 현규하다. 홍보 영상은커녕 그 흔한 CF 촬영도 한 적이 없다. 그 현규하를 최초로 홍보 영상에 기용할 수 있다면 주목도는 폭발적일 게 분명했다.

이능부는 거만한 헌터들한테 치이고 불만 많은 국민들에게 치이면서 사방에서 두들겨 맞는 부처다. 마음 바뀌기 전에 도장부터 찍어 놓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사실 홍보 영상을 다른 헌터와 찍고 싶었어도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팬 커뮤니티의 루머를 멋대로 기정사실화한 기사들이 이미 양산되고 있었으니까.

퇴근 시각 1시간 전.

홍보담당관은 물론이고 차관까지 계약서를 들고 달려왔다. 본래는 이능부 장관이 직접 현규하에게 인사하려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해외 출장 중이었다.

계약을 조율하고 검토하기 위해 현규하의 고문인 유 변호사도 동석했다.

“반갑습니다, 현규하 헌터.”

“네에.”

긴장한 차관의 인사에도 현규하는 따분하게 대꾸했다.

차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예산 담당자를 달달 볶아서 최대한의 예산을 쥐어짜 왔다. 이능부로서는 살점을 잘라 내는 심정으로 받아 온 예산이었지만 잠깐 던전만 돌고 나와도 결정석으로 아공간을 가득 채울 최상위권 랭커를 만족시킬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급히 준비된 자리라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상세한 조율은…….”

“그런 건 그냥 대충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내 동의하에 찍겠다고 쓰고요. 계약금도 줄 수 있는 만큼만 거세요.”

현규하는 차관의 말허리를 끊으며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유 변호사에게 넘겼다.

“유신 씨 업무 성과로 올리겠다는 약속만 지키면 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애인만 잘 챙기면 까다롭게 굴지 않겠다는 절대 갑의 관대함에 차관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준비한 예산 내에서 계약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빨리빨리 하죠. 유신 씨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

어째서인지 현규하가 서명을 하던 도중 손가락을 삐끗하여 ‘앙’이라는 글자를 쓰다가 다시 작성하는 사소한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계약은 무사히 완료되었다.

현규하와 악수하는 사진까지 박은 차관은 흡족했다. 어디에서 말이 샜는지 확정되기도 전에 뜬 인터넷 뉴스를 보며 손톱을 깨물던 디지털소통팀의 직원들은 신나게 홍보 자료를 송출했다. 홍 팀장도 콩고물이나마 주워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기뻤다.

그렇지만 인유신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제 멀미는 안 하는군요.”

집 앞에 도착해서 헬멧을 벗자, 현규하가 헬멧에 눌린 인유신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싱긋 웃었다. 매일 출퇴근을 현규하의 바이크로 하니 아찔한 속도감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리고 정말 익숙해진 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밀며 웃음을 짓는 그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처럼 불시에 후광이 비치는 얼굴이 불쑥 나타나도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곁눈질하면서 훔쳐보는 건 바뀌지 않았지만.

“그럼 쉬세요.”

늘 그랬던 것처럼 인사하고 돌아가려는 그의 손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자신이 처음으로 먼저 그와 접촉한 거라는 걸 깨달은 건,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규하의 시선을 마주한 뒤였다. 흠칫해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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