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14)
  •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한가한가 봐?”

    “도비는 주말의 자유를 얻었어요.”

    “그럼 개성에 같이 갔다 오자. 아까 인전 스님이랑 통화했는데 내가 자살 기도를 한 줄 오해하고 많이 놀라셨어.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여 드리게.”

    물론 박승기도 환영이었다. 두 사람은 남은 점심을 서둘러 먹고 개성으로 출발했다.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양손에 마트에서 산 간식을 바리바리 싸 든 채 달가사 보육원으로 향했다.

    반가워하는 승려들과 아이들과 노닥거리다 보니 주말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3시간마다 걸려 오는 현규하의 전화도 바로바로 받았다. 밥은 먹었냐, 뭐 하고 있었냐, 같은 소소한 용건이라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인유신은.

    [야.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해서 말이야. 유신이한테 쓴 스킬이 스토킹이나 다름없다는 거 알지?]

    [형은 사랑을 모르는군요.]

    [사람 몸에 위치 추적을 심어 놓는 게 뭔 놈의 사랑이야!]

    [유신 씨랑 커플링 좀 맞춰 볼까 하는데 만들어 줘요.]

    [거기엔 또 무슨 흉악한 스킬을 쓰려고!]

    ……라는 문자가 현규하와 권성길 사이에 오갔다는 걸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경비부터 시작해서 청사 내에서 지나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거린다는 느낌을 받는 건 분명히 자의식 과잉으로 인한 착각일 것이다.

    ‘금요일에 그 문제가 터지고 이틀이나 지났잖아. 안 그래도 사는 게 바쁜 사람들이 남의 연애 사업에 계속 관심을 가질 리가 없어……!’

    설마 현규하가 또 청사에 나타나서 스캔들에 불을 지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전화만 잘 받으면 될 거다.

    인유신은 평소처럼 밝은 인사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소파에 발을 죽 뻗고 제집처럼 편안하게 늘어져 있던 현규하가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주인님.”

    누구나 그런 경험은 겪지 않나.

    아침에 분명히 알람 소리를 듣고 깬 뒤에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식탁에 앉았는데, 사실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였고 그 모든 과정이 전부 꿈이었다는 소소한 경험.

    ‘꿈인가?’

    인유신은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뺨을 찰싹 때리려 시도했다. 시도는 금방 막혔다. 현규하가 뺨과 손바닥 사이를 가로막은 제 손으로 인유신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손톱을 가지런하게 깎은 손가락이 손등을 살살 매만지는 감촉에 인유신은 흠칫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감촉과, 어느새 낯설지 않게 여기게 된 손의 체온이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웃김.]

    “자학하는 취미 있었어요? 그런 취미가 있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죠. 나한테 가학 성향은 없지만 당신의 피학 성향을 맞춰 주기 위해서는 기꺼이 때려 주겠습니다.”

    “아, 아, 아니거든요?”

    인유신은 후다닥 손을 빼며 뒷걸음질 쳤다. 아까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뺨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주인님이 없는 하루를 보내야 한다니 무척 우울하더군요. 그래서 만나러 왔습니다.”

    “시, 심정은 이해되지만 사무실인데……. 퇴근하고 뵈어도 되고요.”

    “퇴근 시간까지 못 기다릴 거 같아서요.”

    그러면서 현규하는 팔을 스윽 움직여 사무실을 가리켰다. 컴퓨터를 부팅하고 업무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게다가 총원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내는 세금만으로도 민안과 직원들 연봉을 전부 주고도 남을 텐데 성실한 납세자가 사무실에 찾아오는 것조차 안 됩니까?”

    “어, 어어…….”

    고액 납세자가 당당하게 갑질을 하니 일개 계약직 공무원은 뭐라고 할 말이 없어졌다. 때마침 을질을 자처하는 6급 공무원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됩니다! 다 됩니다! 헌터님 하고 싶으신 거 다 하세요!”

    현규하가 사무실에 들이닥쳤다는 긴급 문자를 받고 주차장부터 부리나케 뛰어온 홍 팀장이었다. 벗겨지기 시작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헉헉거리던 홍 팀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호통을 쳤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차 한잔 내오지도 않고 뭘 하고 있어! 지연 씨! 얼른 가서 커피라도 타 와.”

    김지연은 갑자기 던져진 불똥에 입술을 꼭 깨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인유신은 당황했다. 자기 때문에 사무실로 난입한 불청객인데 애먼 사람이 괜한 욕을 먹었다. 탕비실로 서둘러 가려는데 다리가 허공에서 엇나가더니 몸이 둥실 떴다. 어 하는 사이에 인유신은 현규하 옆으로 옮겨져서 안착했다.

    “믹스 커피가 몸에 안 받아서 안 마십니다.”

    “그러셨습니까? 아이고. 이거 제가 큰 실수를 할 뻔했군요. 어떻게, 다른 차는 뭘 드시나요?”

    “청사 앞에 카페들이 있던데 거기에서 한 잔 사 오세요.”

    “네?”

    “카드는 줄 테니까 커피 사 오라고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카드를 끼운 현규하가 손을 까딱거렸다.

    “기왕 가는 길이니 사무실 직원들 몫의 커피까지 전부 사 오면 되겠군요. 디저트나 빵 같은 건 알아서 적당히 챙겨 오세요.”

    커피 심부름 같은 건 20년 전에 때려치운 홍 팀장은 몹시 당혹했다.

    “저, 저 말입니까?”

    “그럼 내가 유신 씨를 보내야 하나요?”

    코웃음을 친 현규하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유신에게 물었다.

    “유신 씨는 어떤 커피 마실래요?”

    “……어, 그냥 아메리카노요.”

    “나도 같은 걸로 하죠. 나머지는 종류별로 센스 있게 사 올 거라고 믿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홍 팀장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현규하에게 티도 못 내고 양손으로 공손히 카드를 받아 들어 사무실을 나갔다. 팀원들에게 치졸하게 갑질하던 상사는 진짜 갑을 만났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솔직히 속이 조금 시원했다. 김지연도 웃음을 참으며 인유신에게 슬쩍 엄지를 추켜세웠다.

    “앞으로는 출퇴근길도 전부 내가 태워 줄게요.”

    “그냥 지하철 타면 되는데요.”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래요. 내 주인님이 나 없이 사고가 나면 어쩌나, 나 없이 지하철이 테러로 폭파하면 어쩌나, 나 없이 게이트가 열리면 어쩌나, 나 없이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쩌나, 나 없이 하수구에 빠지면 어쩌나, 나 없이 길거리 음식 먹다가 식중독 걸리면 어쩌나, 나 없이 귀여운 햄스터에게 유혹당하면 어쩌나, 나 없이…….”

    “바이크 감사히 잘 타겠습니다!”

    “좋아요.”

    현규하가 눈가를 접으며 생긋 미소했다. 아침부터 정신없는 일이 발생한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우습지만, 정말 예쁜 미소였다.

    “마음 같아서는 유신 씨 자취방에서도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은데 회사에서 매일 만나는 거로 참아 볼게요. 나 잘했죠?”

    “차, 참 잘했어요…….”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능부 민생안정과 소속의 민원실은 현규하 팬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 * *

    - 오늘 헌터님 뵙고 사진도 찍었네요~~^^

    우리 카페에서 헌터님이 어디에 있으신지 사생활을 노출하면 안 되는게 규칙이지만.. 요즘은 다들 눈치채고 있으시죠?ㅎㅎ

    회사 근처에 게이트가 열리는 바람에 마수의 피해가 조금 있었어요. 피해구제신청서를 작성하려고 갔는데 마침 헌터님도 계시더라구요. 곁눈질만 하다가 용기를 내어서 사진을 부탁드렸는데 너무나 흔쾌히 같이 찍어 주셨어요^^

    〈볼하트 해 주시는 헌터님.jpg〉

    〈헌터님 사인.jpg〉

    용건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가는 건 헌터님만이 아니라 다른 공무원분들께도 큰 폐가 되는 일이겠지만...

    저처럼 볼일이 있을 때는 비대면 신청 말고 직접 찾아가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해요~~~

    └헌터님 사진도 너무 잘 나오셨네요. 얼굴 진짜 작으세요

    └다른 말도 해 주셨나요? 목소리 한번 들어보는 게 소원인데ㅠ

    └└그럼요^^ 정말 상냥하셨어요

    └요새 사인에 ‘앙’이라고 썼다가 지운 흔적이 종종 보이네요ㅎㅎㅎ 습관이실까요?

    └밖에서 규하님 볼 수는 없나요??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사진 찍거나 기다리는 분들 몇 명 있었네요^^;;

    - ‘그곳’에서 찍은 현뀨 고화질 직찍 푼다 받아가셈

    귀찮으니까 100명 넘어서 링크 터지면 재업 없어. 알아서 받아가

    돈미새 좆터 창롬새끼 행사랑 촬영 뛴다고 산 대포 카메라를 다시 쓸 날이 오네ㅅㅂㅋㅋㅋ 민원실 문짝에 시뻘건 궁서체로 민원 용무 있는 사람 아니라면 들어오지 말라고 붙여놔서 밖에서만 찍은 사진들임

    민원실 안에 뀨랑 사진 찍으라고 포토존까지 있던데 시발시발 좆같은 마수는 왜 이럴 때는 안 튀어나옴??

    └헐... 와.... 야...... 진짜 고맙다...... 복 받아라...... 사랑해.........

    └아 시발 얼굴 보니 돌겠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뀨 사진은 뀨가 아니었네 ㅁㅊ

    └고화질로 영접하는 거 처음이야 어떡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심장 터질 거 같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규하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2233344445555ㅠㅠㅠㅠㅠ행사 좀 뛰라고ㅠㅠㅠㅠ돈 좀 쉽게 벌라고ㅠㅠㅠㅠㅠㅠㅠ현규하 이 새끼야 본업 좀 그만해 시바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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