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14)
  • “내가 마나를 이끌어 줄 테니 기억해 두세요. 다음번에도 마나 패턴을 주입할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인유신은 상념을 떨쳐 내며 현규하가 이끄는 대로 조심스럽게 마나를 움직였다. 그 일에 집중한 탓에 문짝 뒤의 공중에 뜬 까마귀 형상의 일반 아티팩트에도 제 마나가 주입되는 걸 깨닫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행동의 진위를 파악한 권성길이 혀를 내둘렀다.

    “거, 내가 남 연애에 참견할 처지는 아니지만 저 음흉한 놈 하는 짓 보소. 야, 이 자식아. 그 스킬은……. 어휴.”

    “네? 규하 씨가 뭔가 했나요?”

    의아해진 인유신이 더 캐묻기 전에 현규하가 말허리를 끊었다.

    “참견할 처지 아니라는 거 알면 조용히 하시죠.”

    “크흠, 너도 연애하면 뇌가 바뀌는 인간이었구만.”

    “유신 씨가 내 주인님이셔서요.”

    태연히 주인님이란 단어를 지껄여 인유신을 닥치게 한 현규하는 마나 패턴의 등록을 완료해 주었다. 인유신은 얼른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주머니 천에 몇 번 문질렀는데도 손등에는 한참이나 현규하의 온기가 남아 맴돌았다.

    “아무튼 수리는 끝냈으니 데이트 방해는 그만하고 아저씨는 이만 간다.”

    “벌써요? 제가 식사라도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점심 약속이 있어. 그리고 수리비는 규하한테 뜯어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

    사람 좋게 웃은 권성길은 인유신의 손에 명함을 슬쩍 찔러 넣으며 속삭였다.

    “혹시 규하 저놈이 이상한 짓 한다 싶으면 도와 달라고 연락해.”

    “다 들립니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인마.”

    주차한 곳까지 배웅을 나가겠다는 인유신을 만류한 권성길은 다음에 보자는 서글서글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스님과 다른 아이들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다.

    명함을 만지작거리면서 히히 웃는 그에게 현규하가 툭 내뱉었다.

    “저 형, 애까지 있는 유부남이에요.”

    “저도 아는데요. 아내분이 이혜연 헌터님이시잖아요.”

    “그냥 그렇다고요. 분리 불안증에 별 이상한 증상까지 덤으로 딸려 있어서 귀찮게…….”

    “……?”

    인유신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현규하는 목뒤를 문지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튼 슬슬 점심시간인데 냉장고에 있는 거라고는 조촐한 반찬 몇 가지와 라면뿐이었다. 손님을 대접하기에는 미흡했다. 밖에 나가서 점심 먹자는 얘기를 하려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인유신은 뜨끔했다. 보육원의 아이들을 주로 돌보는 인전 스님이었다. 인유신은 얼른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뒤 조심히 전화를 받았다.

    “스님, 안녕하세요.”

    - 유신아! 괜찮은 거니? 아무 일 없지?

    “어, 저야 별일 없는데요.”

    전파로 전해진 놀란 음성에 인유신도 덩달아 놀랐다. 아마 그 게시물을 보고 전화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 헌터가 추락하던 사람을 구해 주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사람이 네가 맞지? 타지에서 혼자 일하고 혼자 살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겠니.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하려무나. 얼마든지 기대도 된다. 알겠지?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던 인유신은 조금 생각한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추락 사건이 자살 기도라는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절대 아니에요, 스님. 제가 일부러 뛰어내린 게 아니라 실수였어요.”

    - 성인이 실수로 추락할 만큼 옥상의 안전 설비가 되어 있지 않다니 정말 큰일이구나! 내가 당장 민원이라도!

    어쩐지 사건이 커질 것 같았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그의 손에서 현규하가 휴대폰을 슥 빼 들었다.

    “실례지만 전화 바꿨습니다. 그날 유신 씨와 있던 현규하라고 합니다.”

    - 아, 현규하 헌터님? 달가사의 인전입니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인전이 놀랐고, 인유신은 거의 기겁했다. 저 사람이 또 입으로 폭탄을 터트리는 거 아니야?

    허둥지둥 인사하는 인전에게 현규하가 말을 이었다.

    “유신 씨가 떨어질 뻔했던 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습니다. 제 능력이 사이코키네시스인데 컨트롤을 실수해서 유신 씨가 휘말렸고요. 하필이면 그때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서 기사까지 난 모양입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스님한테 또 주인님 운운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해하던 인유신의 눈이 커졌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정중한 태도였다.

    책임을 모두 제 몫으로 돌린 진지한 어조에 그제야 인전도 진정했다. 다시 전화를 바꾼 인유신에게 인전이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 내가 착각한 거라니 다행이다만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의지하라는 건 진심이란다.

    “그럼요. 저도 알고 있어요.”

    - 오냐.

    “참, 스님! 오늘 저 권성길 장인님도 만났어요.”

    인유신은 일부러 권성길의 화제를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다. 덕분에 전화를 끊을 무렵에는 인전도 완전히 안심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은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현규하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현규하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왜 그런 얼굴로 봐요?”

    “스님한테 그렇게 말하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떨어트렸다고 하면 더 놀라실 거 같아서요.”

    그건 인유신도 동감이었다. 아마 살인 미수로 신고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게이트를 공략한 일이 알려진 뒤에 바로 훈련소로 끌려갔지만.”

    그 말 한마디를 툭 뱉은 현규하는 인유신의 정수리에 손을 살짝 올렸다.

    [현재 상태 : 살의. 흥미. 이상한 증상.]

    “이만 가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떠난다고 하자 인유신은 오히려 놀라워서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이어지는 말에 상념이 싹 날아갔다.

    “앞으로도 내 연락을 씹지 말고 꼬박꼬박 받고, 숨거나 도망치지 말아요. 휴대폰도 늘 켜 놓도록 하세요. 유기되어서 분리 불안이 터지면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인님.”

    “네, 넵!”

    하마터면 서울이 날아갈 뻔했다는 걸 상기한 인유신은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현규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근데 아까부터 뜨는 저 ‘이상한 증상’은 대체 뭘까.

    이른 오전부터 두 손님으로 들썩이던 집에 혼자 남으니 갑자기 적막한 느낌이 들었다. 보육원에서 나오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익숙해져 있던 감각이었는데 오늘따라 낯설다.

    인유신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라면이나 끓여 먹기 위해 냄비에 물을 받았다.

    “야! 인유신! 형님 오셨다. 문 열어.”

    물이 막 끓기 시작했을 때 현관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인유신은 투덜거리며 불을 끄고 문을 열었다. 저놈은 내가 부재중이면 어쩌려고 전화도 없이 쳐들어오냐.

    “내가 집에 없으면 어쩔 뻔했냐?”

    “주말에 네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겠지.”

    “대학원생 주제에 주말이라는 말을 꺼내다니 건방지군.”

    “점심 아직 안 먹었지?”

    박승기의 손에 짜장면과 탕수육이 들려 있었으므로 인유신은 건방진 대학원생을 용서하기로 했다. 평양대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한국대학교의 대학원에서 갈리고 있는 박승기는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보육원 친구였다.

    짜장면을 후루룩 흡입하며 박승기가 먼저 꺼낸 말은 당연히 뻔했다.

    “현규하랑 무슨 관곈데?”

    “어어……. 일단 사귀는 건…… 맞나?”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입으로 사귄다는 거짓말을 하자니 몹시 어색했다. 그를 테이밍했다는 진실은 절친한 친구에게도 하지 못할 고백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으게…….”

    “아! 저번 주에 은행 갔을 때 현규하가 구해 줬었다고 했지? 그때 알게 된 거구만?”

    “어음.”

    “네가 먼저 들이댔을 거 같지는 않고, 현규하가 먼저?”

    “큼.”

    “헐. 대박. 첫눈에 반하다니 살다 보니 별일도 다 겪네.”

    인유신이 말하지 않아도 박승기는 알아서 스토리를 착착 짜 맞춰 나갔다.

    “싸가지 없다는 얘기가 있던데 너한테 잘해 줘?”

    “그런 것…… 같아?”

    운동화도 사 주고, 야식도 사 주고, 문도 고쳐 주니 잘해 주는 게…… 맞겠지? 슬리퍼가 벗겨진 것도 현규하 때문이고, 밤중에 깨서 야식을 먹게 된 것도 현규하 때문이고, 문이 부서진 것도 현규하 때문이었지만, 아무튼.

    “하긴 연애 초기에 나이도 6살이나 더 많은데 잘해 주지도 않으면 개새끼지. 근데 현규하는 그렇다 쳐도 넌 게이가 아니잖아?”

    “헌터님, 아니 규하 씨는 잘생겼잖아.”

    이번에는 준비해 놓은 대답이라서 어렵잖게 나왔다. 성적 지향성까지 극복할 만큼 잘생겼다는데 뭐 어쩔 건가. 그리고 잘생긴 얼굴은 모든 걸 납득시키는 개연성이었기에 박승기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육원에서 같이 부대끼며 동고동락한 박승기와 친구가 게이라는 이유로 서먹해질 만큼 얕은 관계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헌터랑 사귀게 됐다니 형은 만족한다.”

    “사귀는 건 난데 네가 왜 기뻐하냐.”

    “야, 베프가 유명 헌터 애인인데 나한테도 좀 떨어질 게 있을 거 아니야? 그, 게이트 내의 샘플이라든가? 새로운 아티팩트의 정보라든가?”

    박승기의 전공은 게이트학이다. 과연 현규하가 겨우 위장 연애를 하는 애인의 친구를 위해 친절히 샘플을 제공하는 수고를 해 줄까?

    인유신은 회의적으로 얼굴을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지 말고 네가 헌터 애인을 사귀면 되잖아.”

    “랩실 노예 주제에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

    “누가 대학원 가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

    “망할. 그때 교수님한테 찍히는 게 아니었어.”

    조기 졸업을 준비하다가 교수의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가 버린 멍청한 대학생을 욕하며 박승기는 눈물 젖은 탕수육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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