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14)
  • [팀장님. 헌터님과 얘기가 길어져서 언제 사무실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바로 퇴근해도 돼^^ 내일은 주말이니 푹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는 게 힘들면 외근으로 처리해 줄게(파이팅 하는 토끼 이모티콘)]

    허구한 날 노총각 히스테리만 부리던 홍 팀장이 꿀 떨어질 거 같은 답신을 보냈다.

    헌터에 관심이 없어서 현규하의 얼굴도 몰라보는 사람은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이능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중 현규하를 몰라볼 사람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다.

    최상위권의 랭커는 어딜 가도 갑이고, 만성 헌터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이능부는 을이다. 현규하의 갑질에 홍 팀장은 기꺼이 을을 자처하며 인유신을 제물로 바쳤다.

    그 덕분에 잘릴 걱정은 덜어서 안심했다.

    “이거 신어요.”

    돌아온 현규하의 손에서 운동화가 흔들거렸다. 어딜 갔나 했더니 신발 가게를 들렀던 모양이다. 신겨 주려는 그에게 인유신은 얼른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신을게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본능이 주인님의 수발을 들면 기뻐질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

    얌전히 입을 닥친 인유신에게 운동화를 신겨 준 현규하가 흡족해하면서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상태창을 띄우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좆같겠지.

    “정말 기뻐져서 기분이 상당히 좆같네요.”

    “눈썰미가 좋으신가 봐요. 사이즈가 딱 맞아요.”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리려 시도했다. 어설픈 시도에 현규하도 따라와 주었다.

    “경찰의 자료를 볼 때 그쪽, 아니 당신의 풀 네임은 제대로 못 봤는데 성씨까지 이름이 어떻게 되죠?”

    “인유신이요.”

    “임유신?”

    “임씨가 아니라 인씨요.”

    “세상에 인씨도 있어요?”

    “4만 명이나 되는데요…….”

    “한국 인구가 1억은 될 텐데 거기서 4만 명이라고 해 봤자.”

    전국의 모든 인씨를 적으로 돌리는 발언을 하며 현규하가 코웃음을 쳤다. 인씨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유신은 조금 울컥했다. 현씨는 뭐 흔한 성인가.

    “보육원에서 퇴소할 때 성씨를 바꿀 수 있거든요. 처음에 있던 보육원 원장님의 성씨를 받아서 원래는 김씨였는데 퇴소하면서 인씨로 바꿨어요.”

    “특이한 성이라도 갖고 싶었어요?”

    “사찰 보육원으로 옮겼는데 키워 주신 스님들 법명의 돌림자가 인 자여서요.”

    “흐음.”

    빈정거리는 기색이었던 현규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인유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잘 바꿨네요. 김유신은 좀 술에 꼴아서 단골 택시 기사를 불렀다가 기사가 단골 룸살롱으로 데려갔다고 모가지를 잘라 버릴 거 같은 이름이잖아요.”

    “그, 그런가요?”

    인유신은 그 김유신과 한자가 다르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귀는데 프로필은 알아야겠죠. 나이는?”

    “22살이요. 보육원 퇴소한 뒤에 운 좋게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됐고요. 그때부터 계속 민안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고향은? 서울이에요?”

    “개성이요. 그래서 개성 인씨는 저 하나뿐이에요.”

    “유니크해서 좋겠네요.”

    아까처럼 빈정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왠지 현규하와의 대화가 조금은 편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사귀는 사이라는 설정을 위해 휴대폰 번호도 주고받았다. 전화번호부에 등록한 ‘현규하 헌터님’이라는 이름을 보며 어쩐지 싱숭생숭해졌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 휴대폰에 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이름이었다.

    “나한테는 궁금한 거 없어요? 어지간한 건 검색하면 나오니까 독학해도 됩니다.”

    “화내실 거 같아서…….”

    “개새끼가 주인님한테 어떻게 감히 화를 내겠어요.”

    화내지 않는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가도, 주인님이라는 고의적 단어 선택에 잔뜩 쫄아 버리는 상반된 감정 속에서 인유신은 소심하게 물었다.

    “진짜 박쥐로 변신 못 하시는 거예요?”

    현규하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풋사과처럼 싱그럽게 미소했다.

    “박쥐처럼 평생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살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웃으면서 살기만으로도 마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였다. 인유신은 깝치지 말아야겠다고 소심한 다짐을 했다.

    다시 현규하의 바이크를 타고, 주마등을 목격하며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해가 질 무렵이었다.

    “1일 기념으로 저녁도 같이 먹을래요?”

    “바이크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서 저녁 못 먹을 거 같은데…….”

    “그래요. 푹 쉬어요.”

    현규하는 친절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신이 나갈 거 같은 그의 바이크를 타느니 만원 지하철과 버스에 시달리고 싶었다.

    월세로 살고 있는 옥탑방이 위치한 오래된 주택가에는 곧 도착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꾸벅 하고 작별하려는데 문득 현규하가 불렀다.

    “유신 씨, 테이머로 각성한 게 몇 살이에요?”

    “워낙 어렸을 때라서 정확한 기억은 안 나는데 처음으로 테이밍을 한 건 5살 때였어요. 햄스터요.”

    “내가 개새끼가 아니라 쥐새끼였군.”

    듣는 사람을 오싹 떨게 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현규하가 턱을 문질렀다.

    “나도 테이밍을 해제할 방법을 알아볼 테니까, 유신 씨도 능력을 잘 연구해 봐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이밍을 해제하는 건 현규하만큼이나 인유신도 간절히 바라는 일이었다.

    “뭐, 아무튼 그 전까지는 잘 부탁합니다. 내가 스토킹해도 너무 놀라지는 말고요.”

    “넵.”

    “주말 잘 보내세요.”

    현규하는 그렇게 작별하고 떠나갔다. 인유신은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계단을 올라갔다.

    “6세야. 나 왔어.”

    반가워하는 6세를 쓰다듬으면서 살짝 가슴 쪽을 확인했다. 피부의 면적이 인간보다 훨씬 작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현규하만 특별한 건지, ‘유신唯信’이라 새겨진 글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오늘은 일단 쉴래.”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은 정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죽을 뻔하기도 하고, 게이트를 넘었으며, 무엇보다 위장이긴 하지만 현규하와 사귀는 사이도 되었다.

    마지막이 가장 큰 부담이지만, 뭐, 어떻게든 될 것이다. 어린 시절 두 번이나 파양을 겪어 본 경험에 따르자면,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졌다.

    가슴팍에 올라와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 6세의 감촉을 느끼며 인유신은 스르르 잠들었다.

    그리고 30분도 안 되어 휴대폰 벨 소리에 잠이 깼다.

    “여보세…….”

    - 야! 김유신! 아니, 인유신!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자다가 깨서 전화를 받았는데 크게 소리치니 더 정신이 없다. 누구인가 싶어서 다시 휴대폰을 보니 그와 같은 보육원 출신 친구였다.

    “박승기? 자는 사람 깨워 놓고 갑자기 뭔데?”

    - 야. 그러게 왜 문자를 씹냐!

    “자고 있었다니까.”

    - 아무튼! 문자로 주소 보내 준 거 있는데 봐 봐. 너 맞지? 아무리 모자이크가 되어 있어도 내가 널 못 알아보겠냐.

    뭔 소리야.

    인유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자를 확인했다. 링크는 대형 커뮤니티의 게시글로 연결되었다.

    - 나 이능부 공노비인데 회사에서 규하님 실물 영접한 썰 푼다.txt

    점심으로 제육 덮밥 조지고 산책하려고 회전초밥처럼 주차장 가생이 돌고 있는데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거임. 설마 게이트 열렸나 싶어서 깜짝 놀랐는데 옥상에서 사람이 떨어지고 있었음...

    옥상에서 추락하는 사람 본 적 있어? 진짜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한순간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엄청 빨리 떨어지는데 떨어지는 시간이 엄청 길게 느껴지더라.

    〈규하 님이 공중에서 공주님 안기로 안고 있는 짤.jpg〉

    근데ㅋㅋㅋㅋ그때ㅋㅋㅋㅋㅋ바닥 바로 위에서 사람이 딱 멈추는 거야ㅋㅋㅋㅋㅋ와 이건 진짜 눈으로 목격해야 함. 정말 손가락 하나도 안 들어갈 거 같은 바닥 바로 위였어. 그리고...ㅠㅠㅠㅠㅠ 후광이 번쩍거리더니 규하님이 공중에서 내려오셔서ㅠㅠㅠㅠ떨어지던 사람을 사이코키네시스로 안아 올리시는 거야ㅠㅠㅠㅠ진짜 영화 보는 줄ㅠㅠㅠㅠㅠ

    우리 뀨가 또 사람을 구했구나ㅠㅠ옆 동네 헌터(누구인지는 말 안하겠지만..ㅎ)는 맨날 사회면에서 안부 인사하는데 울 뀨는 지난주에 은행강도 잡고 이번 주는 또 사람을 구했어ㅠㅠㅠㅠㅠ

    그런 생각으로 존나 뽕차 있었는데...ㅋㅋㅋ..ㅋ....ㅋㅋㅋ.....

    사무실 돌아와서 들어보니 애인이었음..... 뀨가 애인 데리러 왔다고 벌써 회사에 소문 다 났더라. 애인이랑 옥상 정원에서 데이트하고 있었나 봄...ㅠㅠㅠㅠㅠㅠㅠ좋겠다... 뀨가 직접 자이로드롭도 태워주고.....

    하지만 괜찮아... 울 뀨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해..................

    └뀨 같은 소리하고 있네 시발아 여기가 현규하 팬커뮤냐? 느그들끼리만 통하는 좃같은 애칭은 느그들끼리만 써ㅅㅂ 낼 모레 서른인 인간한테 뀨ㅇㅈㄹ하는 거 안 쪽팔림?

    └└얘 왜 이렇게 급발진했냐

    └나도 이능부에서 일하는데 반갑다ㅎㅎ 오늘 회사에서 염장질 장난 아니었음. 애칭이 주인님이라던데? 그런 애칭을 육성으로 말하는 건 생전 처음 들어봤다;; 랭킹 1위쯤 되면 쪽팔림도 없는 듯...

    └└애인이 현규하를 주인님이라고 부른다고?

    └└└ ㄴㄴ현규하가 애인한테ㅇㅇ

    └근데 얼굴이 모자이크돼서 잘 안 보이는데 숏컷한 여자 맞지?? 어깨선이 남자처럼 보이는 건 내 눈의 착각이지????

    └└쓰니가 제일 중요한 말 빼먹었네. 애인 남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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