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14)

“…….”

짐작도 되지 않았다.

온전한 이성체가 자신의 의지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강제로 좌지우지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하물며 의지와 상반되는 감정에 지배되면서.

별생각 없이 시스템창을 터치했던 과거의 자신이 한심했고, 원망스러웠다. 시스템의 말장난을 오류라고 쉽게 치부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역시 테이밍을 해제하려면 이 방법뿐이네.”

현규하의 얼굴에 떠오른 나른한 미소가 햇살에 반짝이는 걸 보았을 때, 인유신의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멱살이 잡혀서. 내던져져서. 옥상의 난간을 넘어.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추락을 깨달은 순간, 멈춰 있던 세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주변의 상황이 급속도로 인식되었다.

떨어진다.

지구의 중력이 급속도로 끌어당긴다. 공기의 저항이 역풍처럼 몸을 사납게 후려친다. 뺨이 따갑다. 머리칼이 엉망진창으로 흩날린다. 흰 구름이 몽실몽실 뜬 파란 하늘이 급속도로 멀어진다. 창문으로 누군가의 경악한 시선이 스쳐 간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떨어진다.

보육원. 입양. 파양. 다시 보육원. 다시 입양. 다시 파양. 다시 다시 보육원. 주마등이다.

인간의 목숨은 평등하지 않다. 생명의 가치에는 차등이 존재한다. 자신의 가치는 가장 아래에 있다. 현규하가 죽여도 합당하다. 어차피 14년 전에 죽었을 목숨이다. 무섭지 않다. 괜찮다. 괜찮다.

인유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때.

“아아, 좆같다. 진짜.”

충돌하기 직전. 주차장의 시멘트 바닥으로부터 5센티미터 위. 낙하하던 인유신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다시금 둥실 떠오른 몸을 현규하가 양팔로 안아 올리며 말갛게 웃음 지었다.

“나 이렇게 심장 뛰는 거 태어나서 정말 처음이에요. 만져 볼래요?”

현규하가 그의 손을 한 번 더 가슴으로 인도했다. 라이딩 재킷의 가죽 질감 밑으로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있었다. 추락사할 뻔한 인유신의 심장보다 더욱 격렬한 박동이었다.

공포. 공포. 끝없는 공포. 인유신의 죽음을 지켜본 심장의 외침이다.

“내가 처음으로 게이트를 공략한 게 9살 때거든요? 그때 무서웠던 것보다 그쪽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더 무서워.”

현규하가 매끄럽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네. 종속되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상태창이 인유신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현재 상태 :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 * *

대놓고 욕하는 것보다, 웃음소리와는 달리 웃음기 하나 섞이지 않는 눈동자가 더 살벌하다는 걸 인유신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가 자신을 절대 죽이지 못하리란 사실도 깨달았는데 오히려 더 무섭다.

허공을 날아 옥상으로 돌아온 현규하가 아까와는 달리 인유신의 옆에 앉았다. 비로소 경청하겠다는 태도였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는 뭡니까?”

“제가 테이밍할 때 자동으로 설정해 놓은 이름이어서…….”

“사람을 테이밍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 그게……. 시스템이 나락이 락이니까 박쥐도 쥐라면서…….”

“뭐?”

인유신은 설명하면서 상당히 멍청이가 된 기분을 느꼈고, 그건 현규하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얼빠진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고도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 테이밍 능력이 설치류 한정이거든요.”

진짜 박쥐라고 착각해서 테이밍한 뒤에 상태창으로 그의 히든 특성이 뱀파이어라는 것까지 알았다는 설명까지 했다. 현규하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얼굴을 문지르면서 한참이나 생각했고, 인유신은 연신 눈치만 살폈다.

“그러니까 박쥐가 설치류가 아니라는 문제는 일단 넘어가도, 뱀파이어는 안개나 박쥐로도 변할 수 있으니까, 시스템이 박쥐로 판별했다?”

“네. 아마도…….”

“히든 특성이 뱀파이어 특질인 건 맞지만 나는 안개로도, 박쥐로도 변신 못 해요.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적은 한 번도 없고요. 나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쥐 따위가 아니라.”

할 말이 있겠는가. 인유신은 그냥 석고대죄하며 머리를 박았다.

“솔직히 믿기 힘든 얘기라는 건 인정하죠?”

“……네.”

“뱀파이어 특질이 있다는 걸 남한테 들은 건 아니에요? 몇 명 알고 있긴 했거든.”

“아니요. 현규하 헌터님을 직접 보는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하긴, 알고 있던 놈들은 내가 옛날에 다 죽였으니까.”

“……!”

여상하게 툭 던진 말에 염통이 오그라들었다. 엉덩이가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며 현규하로부터 슬슬 거리를 두었다. 현규하에게 죽어도 할 말은 없지만, 그게 죽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그쪽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해 보세요. 상태창에서 뭐 봤어요?”

“헌터님의 스탯이랑 능력이요.”

“그거야 인터넷 검색 한 번으로 알 수 있는 거고.”

“귀속 아티팩트도 두 개나 갖고 계시던데요.”

“……아, 그건 남들 앞에서 두 개를 같이 쓴 적이 없는데. 좋아요, 인정. 또?”

“그리고 다른 히든 특성들의 글자가 깨져 있었어요.”

“…….”

현규하의 입이 다시 굳게 닫혔다. 뭔가 말을 잘못한 걸까. 불안감을 느끼자 심장이 또 요란하게 쿵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깨진 글자 말입니다.”

“네.”

“그려 볼 수 있겠어요?”

그야 당연히 가능하다. 7세의 상태창을 띄우기만 하면 되니까.

고개를 끄덕이니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각성자들의 귀속 인벤토리인 아공간에는 무게 제한이 있다. 그래서 헌터들은 중요 무구만 겨우 쑤셔 넣는다는데 그는 상관없나 보다.

“저, 근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어플이 없는데요.”

“설치하세요.”

“넵.”

스토어에서 그림 어플을 검색해서 설치하는 1분 남짓한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인유신은 히든 특성 중 깨진 글자들만 따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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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규하의 눈동자가 커졌다.

“……씨발.”

그리고 그의 한마디에, 인유신은 사람을 테이밍한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현규하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여 인유신은, 다음 말을 할 용기를 냈다.

“사실은 저도 히든 특성의 글자가 깨져 있거든요.”

“구라 치지 마세요.”

“진짠데…….”

인유신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신의 히든 특성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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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규하가 미간을 좁혔으나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는 인유신의 상태창을 보지 못하니까. 글자 깨진 거야 인코딩 오류 아무거나 따라 하면 되는 거고.

“나는 지금도 몹시 불쾌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누구든 하루아침에 갑자기 주인이 생기면 비슷한 기분일 거예요. 근데 일 저지른 장본인이 거짓말로 기만까지 하려고 해?”

말투만이 아니라 목소리까지 스산하게 내깔렸다. 인유신은 직감했다. 진짜 화난 거다.

“내가 그쪽을 직접 죽일 수는 없지만 죽이라고 의뢰를 하는 건 가능할 거 같거든?”

“저, 정말이에요. 각성할 때부터 있던 거였어요.”

그렇지만 글자 깨짐 따위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필사적으로 사실이라는 걸 어필했다. 그의 살기에 달달 떨면서도 굽히지 않는 인유신의 태도에 현규하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좋아요. 그럼 던전에 가서 증명해 보세요.”

“던전이요?”

“네.”

“저는 헌터 라이선스가 없는데…….”

“상관없어요. 내 사유 던전입니다.”

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다시 슬쩍 시선을 올리니 호박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담고 있을 때도 아주 냉정하고 차가웠던, 그 시선.

거기에 대고 차마 ‘퇴근 후에 가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잘릴지도 모르겠다…….’

인유신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제가 생기면 홍 팀장이 가라고 등 떠밀었다는 변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헬멧을 꺼내며 주차장에 세워 둔 바이크 옆에 내려섰다. 옆구리에는 짐짝 인유신이 들려 있었다.

“우리 갑식이에 다른 사람 태우는 거 처음이니까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바이크 이름이 갑식이에요?”

“문제 있나요?”

“아뇨.”

괴멸적인 네이밍 센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했다.

바이크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건네받은 헬멧을 쓰고 앞에 앉은 현규하의 허리를 어설프게 잡자 그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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