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14)
  • 왕이 물었다.

    〈나와 형제들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낮에 지어도 밤이면 무너지니 도저히 완공할 수가 없다오.〉

    요정이 답했다.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매장하면 무사히 완공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말이오?〉

    〈제물에 합당한 이들을 알려 드릴 테니 그중에서 선택하십시오. 처음으로 부합하는 이는 쌍둥이이며, 또 다른 이는 왕의 형제 중 한 명의 부인입니다.〉

    왕은 선택했다.

    1.

    〈형아, 뭐 해?〉

    마당 구석에 앉아 있는 소년을 아이가 불렀다. 소년은 저 애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는 고민을 하다가 그냥 대꾸했다.

    〈자다가 깼어?〉

    〈응.〉

    〈들어가서 자. 밖에 나온 거 원장님한테 들키면 혼나.〉

    〈잠이 안 와.〉

    아장아장 걸어간 아이가 소년이 들고 있는 펜던트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정교하게 세공한 유리 장식 안에서 붉은색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예쁘다. 뭐야?〉

    소년은 달라는 듯이 앞으로 내밀어진 아이의 고사리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펜던트를 건네주었다. 아이가 기뻐하며 펜던트를 머리 위로 들었다.

    투명한 유리 조각 너머에서 핏빛으로 물든 달빛이 쏟아졌다. 만월이었다.

    그때 달빛이 일그러지며.

    게이트가 열렸다.

    * * *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든가, 설상가상이라든가, 머피의 법칙 같은 말은 바로 오늘의 자신에게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인유신은 생각했다.

    먼저 중고 거래 사이트로 안 쓰게 된 선반을 팔았다. 구매자가 온갖 트집을 잡으면서 직거래에서 5,000원이나 깎았다. 속으로 욕을 몇 번 하고 잊으려 했는데 뜬금없이 은행 계좌가 정지되었다. 알고 보니 보이스 피싱 사기 집단에 연루되어 있던 구매자가 그의 계좌를 이용한 거였다.

    심지어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반차까지 내고 방문한 은행에서는…….

    “꼼짝도 하지 마!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쏜다!”

    은행 강도들이 들이닥쳤다.

    ‘가, 강도라니. 말도 안 돼.’

    강도들이 들고 있는 총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인유신은 부들거리는 손을 꼭 쥐면서 바닥에 엎드렸다. 아무리 총기가 만연한 사회라지만 그런 범죄자를 맞닥뜨리는 게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만큼 무서웠다.

    바닥에 엎드린 손님들과 은행원들은 벌벌 떨었다. 저쪽에는 무장 경비원이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쓰러져 있다. 생생한 피비린내가 공포를 더욱 부채질했다.

    “빨리빨리 옮겨. 늦어도 5분 안에 은행에서 나가야 해.”

    강도들은 커다란 가방에 정신없이 지폐 뭉치를 옮겨 담았다. 인유신은 두려움에 잠식된 공기를 느끼며 숨을 삼켰다.

    “엄마…….”

    “쉿. 찬우야, 말하면 안 돼.”

    옆에 엎드린 아이가 무서워서 칭얼거리기 시작하자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입을 막으며 급히 끌어안았다.

    인유신은 슬쩍 눈을 움직였다. 자신의 상황 또한 좋지 않지만, 무서워하는 아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괜찮을 거야.”

    엄마에게 안겨서 떠는 아이에게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인마가 되고 싶은 게 아닌 이상 강도들도 굳이 여기에서 사람을 더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돈만 챙겨 나가면 사람들은 무사할 거라고, 인유신은 믿었다.

    그런데 갑자기 ‘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강도의 욕설, 그리고 비명이 쏟아졌다.

    “이 새끼가! 꼼짝도 하지 말랬잖아!”

    “으아악!”

    강도들이 돈을 담는 틈을 타서 책상 아래의 비상 신고 버튼을 누르려던 은행원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나뒹구는 은행원의 셔츠에 벌건 핏물이 번졌다.

    “씨발! 누른 거 아니야?”

    “빨리 담아!”

    “그냥 지금 튀자고!”

    강도들도 대단히 당황했다. 보스로 보이는 남자가 이를 갈았다.

    “어차피 경비원은 곧 뒈질 거야! 하나를 죽이나, 둘을 죽이나! 아무나 인질 하나 잡아 두면 되겠지!”

    그러더니 바닥에 엎드린 손님 중 하나의 머리채를 잡으며 거칠게 일으켰다.

    “아악!”

    “엄마아!”

    인유신의 옆에 있던 아이의 어머니였다. 심장이 철렁했다. 어머니가 인질로 잡힌다면 아이는…….

    “죄다 쓸어 담아!”

    여자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남자가 호통쳤다. 가방을 채우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엎드린 사람들은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인질로 잡힌 사람이 무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들은 여자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인질이 되지 않은 행운에 안도했다.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하는 여자의 다리에 아이가 울면서 매달렸다.

    “엄마! 엄마!”

    “이건 또 뭐야.”

    남자가 짜증을 내면서 발을 들어 올렸다.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만요!”

    남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까지 순간 그에게 모였다. 인유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은 정말 최악의 날이다. 보이스 피싱에 당하기도 했고, 은행 강도도 만났다.

    그중 가장 최악은 아이가 있는 어머니가 그의 눈앞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다. 하지만 이 아이를 자신과 같은 고아로 만들 수는 없었다.

    “제, 제가 인질이 대, 대신 될게요.”

    공포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아이의 어머니가 어떤 표정을 하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인유신은 떨리는 몸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괜찮아. 아마 신고가 접수되었을 테니까 금방 경찰이 도착할 거고, 괜찮아. 괜찮아.

    강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때였다.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 사이로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흐릿하던 시야가 한순간에 밝아진다.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깜빡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를 리가 없는 얼굴이었다.

    백인 혼혈이라는 소문까지 있을 만큼 뚜렷하고 우아한 이목구비. 지금 당장 런웨이를 걸어도 부족함이 없을 훤칠한 장신. 검은색의 라이딩 재킷.

    혼란 속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는 여상한 몸짓은 터무니없을 만큼 태연하여, 그가 서 있는 공간만이 이질적으로 투명하게 비쳤다. 불시의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여 생겨난 침묵 속에서 남자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가벼운 손짓은 한숨처럼 무료해 보이다가, 잘생긴 눈매를 접었을 때에는 나긋한 조소로 바뀌었다.

    “은행 업무 시간은 분명히 맞는데, 불청객들이 조금 있는 것 같네.”

    “혀, 혀, 혀, 현규하!”

    “오, 나 알아?”

    “씨발! 쏴!”

    남자의 등장에 경악했던 강도들이 발작적으로 총을 쏘았다. 탕! 타당! 귀를 찢는 소음에 인유신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비명 소리도, 피비린내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것처럼 총알은 남자의 20센티미터 앞에 멈추었다.

    “나를 알면 총 따위 쏴 봤자 쓸모없다는 것도 알아야지.”

    이어 그는 손가락을 가볍게 딱 튕겼다.

    “우아아악!”

    강도들은 비명을 지르며 거꾸로 날아가 천장에 처박혔다. 손짓 한 번으로 상황을 정리한 남자는 따분하게 하품하더니, 허공에 고정된 총알 하나를 튕겼다.

    쾅!

    천장에서 악을 쓰며 총을 쏘려던 강도의 총이 폭발했다.

    “끄아악!”

    비명도 잠깐이었다. 보이지 않는 철구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턱뼈가 으스러졌다. 그 옆에 처박혀서 발악하던 강도의 어깨뼈가 비틀렸다.

    “또 평생 죽만 먹으며 살고 싶은 사람?”

    “…….”

    강도들은 조용해졌다. 총까지 전부 빼앗은 남자의 시선이 바닥에 웅크려서 멍한 얼굴을 한 사람들을 향했다.

    “다친 사람 있나요?”

    태연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인 목소리는 멍하니 굳어 있던 사람들을 현실로 불러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무너졌고, 안도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인질로 붙잡혔던 여자가 아이를 품에 안으며 연신 울먹거렸다.

    “가, 감사해요! 현규하 헌터님. 정말 감사해요!”

    “네, 네.”

    건성으로 감사 인사를 흘려넘긴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 경비원을 살피며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 유 변. 난데요. 내가 지금 은행에 왔다가 강도를 좀 만났거든요. 죽여도 되나? 쟤들이 먼저 총 쐈는데 정당방위 아닌가? 내가 총소리에 놀라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거 같아. ……아, 던전 밖에서는 정당방위도 안 통해? 헌터로 살기 힘드네. 아무튼 알았어요. 경찰에 신고나 대신 해 줘요.”

    애석해하며 혀를 찬 그는 인유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 있는 사람.”

    “저, 저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거 같은데 여기 상처 좀 누르고 있을래요? 저기 은행원 같은 사람이 쓰러져 있어서, 난 저쪽으로 가 봐야겠는데.”

    인터넷에서나 보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구해 주었다는 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망상이었다. 넋을 잃고 있던 인유신은 얼떨결에 걸어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경비원의 옆구리를 손으로 세게 누르며 지혈했다.

    뜨거운 피가 왈칵거리며 쏟아졌다. 생생한 생명의 증거가 조금씩 현실을 인식시켜 주었다. 엉망진창 최악으로 치달아 가던 하루의 악몽이 끊어졌다. 남자로 인해. 헌터 랭킹 1위, 원 맨 아미 현규하.

    이를 인식하자 왼쪽 가슴 부근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머리까지 아찔하게 했다. 끓어오른 것이 혈류를 따라 전신으로 흘러간다.

    그 순간, 눈앞에 그에게만 보이는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창은 오류가 난 것처럼 지지직거리며 명멸했다.

    ‘시스템창에 오류가 나기도 하는 거야?’

    당황한 사이에 깜빡거리며 꺼졌던 시스템창이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이어 선명한 글씨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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