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210)화 (210/240)

- 210화 -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이때만큼은 운전을 배워두지 않은 게 후회될 수밖에 없었다. 차 키가 꽂힌 멀쩡한 차량 두 대를 지나쳐온 터라,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윽….”

지끈거리는 왼쪽 어깨에 저절로 손이 갔다.

‘더럽게 아프네.’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역시 진통제까지 챙겨올걸.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도한서가 준 진통제들은 전부 약효가 놀라웠다. 체내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고통을 잊게 해줄 정도라, 이처럼 크게 다쳤음에도 기껏해야 뻐근함만 약간 남을 뿐이었다. 거의 부분마취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만큼 대단한 진통제라서 탐이 날만도 했으나 굳이 챙겨오진 않았다.

고통 대부분을 앗아가 주는 건 좋지만, 문제는 다른 감각 또한 둔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진통제의 약효가 돌 때는 온갖 감각이 안심이라도 한 것처럼 느슨해졌다. 경계심이 옅어지고 조금만 방심하면 몸이 나른해지려 했다. 추측하건대, 도한서가 준 진통제에는 안정제 같은 부가적인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몸의 나른함은 큰 부상의 영향과 아직까지도 완전히 내려가지 않는 열 때문이 크겠지만, 그런 걸 고려하더라도 감각이 둔해지는 것만은 이런 재난 상황 속에서 독 중의 독이었다.

그랬기에 준성은 아예 연구소의 진통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백팩에서 챙겨온 붕대로 어깨끈을 만들어서 다친 팔을 걸어두니, 그나마 좀 버틸 만했다.

준성은 아프게 지끈거리는 어깨를 손으로 짚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불쑥 앞쪽 모퉁이에서 튀어나오는 사람 그림자 때문에 순간적으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크아-!

팔이 꺾인 기괴한 모습의 피투성이 좀비 한 명이 얼굴을 들이대며 포효했다.

하지만 무섭게 소리를 쳐놓고는 뭔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끈적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머리를 슬쩍 기울이며 준성을 마주했다.

피 냄새밖에 맡지 못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마음만 먹는다면 준성의 얼굴쯤은 그저 머리를 쭉 뻗는 것만으로도 무참히 물어뜯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허리를 비틀어서 꺾인 팔을 휘두른다면 준성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을 수 있었고, 반걸음만 내디디면 서로의 가슴이 맞닿을 것이다.

그런데도 좀비는 가만히 멈춰 서서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굳은 얼굴의 준성은 자신을 응시하는 붉은 피막 덮인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슬쩍 옆으로 발을 뻗었다.

자극하지 않도록 느릿하게 옆으로 움직여서 좀비를 스쳐 지나갔다. 좀비의 붉은 피막 덮인 눈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다.

서너 걸음 걸어나간 후에야 방금의 좀비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힘없는 신음과 한쪽 다리를 질질 끄는 소음이 점차 멀어져갔다.

“후우….”

제 갈 길을 가는 좀비의 뒷모습을 돌아본 준성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되네.’

준성은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은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고 물건들을 품에 안고 다닐 수는 없어서, 지나가던 길에 남성용 숄더백 하나를 주워다가 유용하게 사용 중이다.

가방 안에 안전히 들어있을 도한서의 혈액팩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한서의 혈액이 돌고 있는 한, 이 육체가 좀비에게 물릴 리 없었다.

좀비들은 도한서의 혈액을 기피한다. 그건 자신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감히 모체를 오염시키고 죽게 만들까 봐서 본능적으로 겁을 내는 거다.

그렇다 보니, 좀비들은 도한서의 혈액이 돌고 있는 강준성에게 차마 이빨을 박아넣을 수가 없었다. 도한서의 외견을 보고 모체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상대의 체내에 그의 혈액이 있는지 없는지로 구분하다 보니 바이러스들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어쨌든 수혈을 받든, 단순히 마시든, 체내에 도한서의 혈액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좀비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새삼스러웠다.

도한서는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이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가슴이 돌이라도 맞은 듯 아릿거렸다. 도한서의 잇자국이 남아 있을 목울대가 재차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 막히게 쓰라리다.

걸어 나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벌써 발길을 돌리고 싶어진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서 그 서늘한 연구소 지하로 내려가, 무섭게 화난 얼굴의 도한서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무작정 떠나서 미안했다고 등을 토닥여주고, 원한다면 자신이 먼저 키스해주며 달래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안다.

도한서에게 되돌아간다는 건, 그를 제 손으로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영웅 심리라든지 희생정신, 그딴 게 아니었다. 죽을 날을 받아뒀으니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멋진 척이나 하다가 눈을 감으려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책임감과 죄책감의 문제다.

도한서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전부 바꿔주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한 주제에 스스로 그 길을 무너뜨리는 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과거에 다시 얽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리면 그 죄책감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도한서의 ‘삶’을 책임지기로 약속한 이상, 반드시 지킬 생각이다.

세상이 도한서를 손가락질하도록 놔두지 않겠다. 그에게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이 덧씌워지는 것도 싫고, 이제야 자유를 얻은 도한서가 다시금 실험체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강준성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연구소를 벗어날 때처럼 다시금 결심을 굳힌 준성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그대로 걸어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길로 새지도 않으며, 휴식을 핑계로 쉬려고 하지도 않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때가 기회였다.

도한서의 혈액이 자신을 충분히 보호해주는 바로 이때 움직여야 했다. 노을이 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빛도 충분하니, 다리에 무리가 가더라도 최대한 걸어볼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정처 없이 걸을 생각이었다. 연구소에서 멀리 떨어지기만 하면 되고 좀비들도 도한서의 피가 도는 자신을 당장 공격하지는 못할 테니, 길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일부러 그가 모르는 루트를 향해 아무렇게나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나온 곳들은 도한서가 일일이 다 찾아보고 다닐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생각을 바꿨다.

‘도한서가 잠들어 있는 지금밖에 없어.’

수면제가 한서를 몇 시간이나 잠재워줄 수 있을지 확신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6시간 내외는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움직일 수 없는 지금이야말로 ‘그곳’을 직접 확인할 기회였다. 무작위 루트로 향하는 건 그다음 일이다.

그래서 준성은 지금 이때까지도 오직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직접 걸어서 움직이다 보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준성은 군용 대피소 공터에 널려 있는 많은 수의 시체를 보며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노을까지 겹쳐, 사방이 온통 새빨갛게 보일 정도로 피투성이 시체가 한가득하다.

차가 진입하면서 밀고 지나간 건지, 아니면 애초에 처음부터 몰아넣기 시작한 건지, 한쪽으로 대충 쌓아둔 것 같은 시체의 산도 몇 개 보였다.

준성은 시체가 없는 길을 골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들은 전부 두 눈에 붉은 피막이 덮여 있었으며, 신체 일부가 잘리거나 꺾이는 등의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전부 군복을 입고 있다. 그들이 이 군용 대피소의 군인 좀비였을 거라는 건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에 작은 칼자국을 달고 있는 좀비 시체를 보며, 준성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이 많은 좀비를 처리한 게 도한서겠지. 무서운 놈….’

미리 처리해두라고 도한서를 보낸 건 자신이었지만 설마 이처럼 수가 많을 줄은 몰랐다. 반항하지 않는 군인 좀비들의 머리에 하나하나 칼을 박아넣고 있었을 태연한 얼굴의 도한서를 떠올리니 섬뜩한 한기가 찾아온다.

코가 마비될 정도의 지독한 피비린내 사이를 지나친 준성은 곧바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들 잘 나갔겠지?’

간간이 보이는 시체와 주변에 난무한 핏자국을 힐끗거리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공터에는 어떠한 차량도 없었다. 남아 있는 거라고는 셀 수 없이 많은 좀비의 시체와 피 웅덩이뿐이다.

도한서가 자신이 맡겼던 일을 제대로 해내 준 게 맞다면, 버스팀은 이곳에서 그가 남겨둔 혈액팩과 연구자료를 무사히 확보했을 것이다. 뒤이어 비상연락을 취해서 좀비 사태가 퍼진 영역 밖에 있을 군대를 불러들였을 거고, 자신이 말해둔 것처럼 적절한 협상을 통해 그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나아갔을 터였다.

준성이 이곳에 온 건, 자신이 짰던 계획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 무리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동생과 절친까지 끼어 있었으니까.

강채이와 장대욱의 얼굴을 떠올리며 걸음에 속도를 높이던 그때.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아서 움직이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곳에서.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던 준성이 뒤를 확 돌아보려던 순간, 그새 등 뒤에 다가온 누군가의 손이 그의 입을 무섭게 틀어막았다.

“강준성.”

입을 틀어막히자마자, 낮게 깔린 어두운 목소리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속삭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딱딱히 굳어버린 준성이 두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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