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209)화 (209/240)

- 209화 -

감염된 강준성을 안아 들고 연구소에 들어왔던 때처럼, 도한서는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강제로 꿈도 꾸지 않는 숙면에 빠져든 탓인지, 눈을 뜬 그 순간에도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지 않았다. 그저 습관처럼 준성의 이름을 부르며 옆자리를 손으로 더듬거릴 뿐.

“…강준성.”

답장처럼 들려오는 건, 서늘한 공간에 튕기듯이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뿐.

멍하니 누워서 옆자리의 휑한 공간을 쓰다듬던 도한서의 손이 새하얀 시트를 한 손으로 찢을 것처럼 그러쥐었다.

넋을 놓은 것 같던 한서의 얼굴이 차츰 싸늘하게 굳어갔다.

몸을 일으켜 앉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자 남겨진 이 하얀 공간이, 어째 예전보다 훨씬 더 차갑고 서늘해진 느낌이 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매트에서 내려온 한서는 준성이 일부러 두고 간 게 분명한 한쪽 끈 떨어진 백팩을 집어 들었다. 안을 열어보자, 마지막으로 열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물건들이 차 있다.

사라진 거라고는 라이터 하나와 손전등, 그리고 그의 상처를 잠시나마 덧나지 않도록 유지해 줄 붕대와 거즈가 전부였다.

특히나 이곳 수술용 트레이에 넉넉히 얹어둔 좋은 재질의 붕대와 거즈 대신, 약국에서 적당히 사 왔던 게 분명한 싸구려를 들고 갔다.

마치 더는 빚지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리고, 제 몸 따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도한서는 그런 자그마한 것에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는 준성의 의도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긴 했지만, 차라리 식량이라도 좀 챙겨갔으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라도 할 텐데.

한서의 시선이 수술용 트레이를 살폈다.

채혈해 뒀던 혈액팩은 전부 사라졌다. 혈액팩이 있던 자리에는 사용 흔적이 남은 채혈용 주사기가 보란 듯이 놓여 있었다.

한서는 소매를 걷어, 서툰 주삿바늘 흔적을 어렵잖게 찾아내었다.

‘피를 더 뽑아갔나?’

채혈용 주사기는 보통 혈액검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 한 번에 뽑아낼 수 있는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강준성이 아무리 눈썰미가 좋고 신중했다고 하더라도 팔에 난 바늘구멍 하나를 티 나지 않게 여러 번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 번에 끝까지 뽑았다고는 해도 고작해야 10mL……. 눈속임인가.’

한서는 자신의 팔에 난 하나뿐인 바늘구멍과 피 묻은 채혈용 주사기를 노려보았다. 시간 계산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그리고 쓸데없는 희망을 주기 위한 이러한 수작질이 더욱 그를 거슬리게 했다.

혼자 남은 공간을 둘러보다가 문을 향해 걸었다.

원래 이 방의 문은 도한서의 생체 인증이 아니면 안에서든 밖에서든,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다. 하지만 드나들 때마다 일일이 인증을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준성이 ‘갇혀 있다’라는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고 싶었다.

이 방에 홀로 갇혀 있던 세월이 길었던 도한서로서는 이곳에 홀로 방치될 때마다 느끼던 한기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진 강준성이 자신이 느껴왔던 것과 똑같은 한기를 느끼지 않길 바랐다.

게다가 강준성에겐 아직 남기혁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괜찮은 척을 해도, 더러운 폐공장에서 남기혁에게 감금당해왔던 과거의 기억은 그리 쉽게 사라질만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 남기혁에 대한 경쟁심도 있었을 것이다.

남기혁은 그가 손에 넣었던 강준성을 감금하고 억압했지만, 자신만큼은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고 상냥히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모든 주도권은 강준성에게 있으니,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안심시켜주려는 마음도 있었다.

자신은 그딴 놈과 엄연히 다르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고작 그뿐이었는데, 매정하게도 강준성은 스스로 이 공간을 걸어나갔다.

자신을 버려두고.

쾅-!

도한서의 주먹이 문가에 붙어 있는 불 꺼진 단말기로 날아가 꽂혔다. 깨져버린 유리 패널의 조각 일부가 도한서의 주먹에 꽂혀, 금세 핏방울을 냈다.

과격한 주먹질과 달리, 도한서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어떤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고, 어떤 기분인지도 드러나지 않았다.

틀에 박힌 마네킹처럼 창백한 무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역시나 도한서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음조차 없는 텅 빈 복도가 그를 당연한 듯이 맞아주고 있다.

한 발, 한 발, 비상등만이 켜져 있는 어둑한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갔다.

가는 길에 있는 방이란 방은 모조리 열어보았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미칠 듯한 적막과 익숙한 한기, 그리고 강준성의 체취라고는 단 한 모금조차 남지 않은 지독한 약품 냄새뿐이었다.

연구소의 마지막 방까지 모두 열어본 후에야 새삼스레 체감되었다.

‘정말 가버렸구나.’

나를 두고.

“하….”

허탈한 숨을 뱉은 도한서가 몸을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어둡고 서늘한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길에는 온통 머리를 마비시킬 것 같은 약품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공허한 공간을 향해 감정 없는 목소리가 물었다.

“뭐든 고치겠다고 했잖아.”

그 말에 응답하듯, 잠에 빠져들기 전에 강준성이 했던 대답이 머릿속을 울렸다.

“넌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내가 잘못한 거야.”

강준성은 도한서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떠나는 건 오로지 제 잘못이라며, 부드럽게 입을 맞춰주었다.

과거, 인한병원에서 제게 구조 헬기를 타라며 등을 떠밀던 강준성이 떠올랐다.

“이번 구조헬기가 다녀간 후로 언제 다시 구조가 올지 몰라. 이번에 가야 해.”

“날 위해서든 뭐든, 내 억제제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해놓고서 혼자 버려두려고?”

“버리는 게 아니잖아. 네 안전을 위해서…….”

“누가 그딴 안전 챙겨달래? 네가 직접 몸으로 챙겨주는 거 외엔 관심도 없어.”

강준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도한서, 자신 역시도.

“…버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이 원한 건 단 한 가지였다.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

“나 버리면 확 죽어버릴 거야.”

그때 했던 말은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제 모든 것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자가 자신을 버리는 거다.

그거야말로 도한서라는 인간 자체가 ‘죽음’을 맞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때 했던 말이 진심이었음에도, 도한서는 순순히 제 목을 조를 수 없었다.

‘아직이야.’

아직 강준성은 죽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가 자신을 버린 건 맞지만, 완전히 떠나버린 건 아니었다.

‘다시 잡으면 돼.’

버려졌다면 다시 쫓아가서 그 목덜미를 물고 매달리면 된다.

더는 자신을 버릴 수 없도록.

남은 시간은 약 27시간.

현재 시각 기준, 자신이 남긴 혈액팩이 강준성을 지켜줄 수 있는 제한시간이었다.

그 안에 반드시 강준성을 붙잡아, 다시금 끌고 올 것이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어두운 이 공간 속으로.

도한서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붉게 피어난 곡선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한 한기를 머금었다.

차가운 복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무 꽉 쥐었던 탓에 후끈한 열기가 감돌던 손끝이 서늘한 벽면에 닿았다.

손끝으로 벽면을 쓸며 지나온 어둠 속을 한 걸음씩 나아갔다. 손끝에 느껴지는 냉기가 도한서의 감정을 차곡차곡 저 아래로 내리눌렀다.

‘더는 버릴 수 없도록 가둬두자.’

벽면을 쓸던 손끝이 어느새 손톱을 세웠다. 끼이익, 벽이 긁히는 기분 나쁜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야 해.’

점차 가빠진 도한서의 숨소리가 기괴한 소음과 어우러졌다.

‘나 말고는 아무것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없도록 세뇌하는 것도 좋겠어.’

누군가를 닮은 악독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채웠다.

모든 주도권을 주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며 스스로 낮은 자리에 엎드렸던 도한서였다. 그런 그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때의 자신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버려질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망가뜨리는 게 나았는데.

웃고 있는 도한서의 입술 사이로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살면서 차라리 자신을 버려주길 바랐던 적이 셀 수도 없다.

그래서 알지 못했고,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제 모든 걸 통째로 무너뜨리는 것 같은 이런 신기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줄은.

‘괜찮아. 이제 두 번 다시 버려지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버리고 싶어도 더는 버릴 수 없도록 만들면 된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도록, 끝없이 살리고 또 살려서라도.

도한서의 입가에 걸린 섬뜩한 미소가 그의 서슬 퍼런 살기와 한 몸처럼 맞물렸다.

강준성의 유기(遺棄)가 가져온 극도의 절망과 불안은 도한서라는 인간에게 새로운 극악의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나아가 그를 조금씩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이를 증명하듯, 복도의 벽면에는 도한서가 날을 세운 손톱자국이 기괴한 꼬리를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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