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준성에게 깔린 한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노려보지도 못하고 머리를 내저어야 했다.
“너 지금 무슨…….”
성난 목소리가 멋대로 꺼져 들어갔다. 목구멍에 돌덩이라도 박힌 것처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혀 또한 둔해진 게 느껴졌다.
준성의 열띤 두 손이 한서의 창백한 볼을 감싸며 쓰다듬었다.
“간단해. 날 찾아서 붙잡으면 돼.”
“강…준성…!”
“붙잡고 나면…….”
머리를 내린 준성이 한서와 이마를 맞대었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준성의 열기가 살포시 닿은 이마를 타고 한서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기분 좋은 온기가 한서를 휘감은 수면제의 약효를 더욱 돋우는 듯했다.
“…글쎄, 붙잡으면 넌… 날 어떻게 할까?”
힘없이 웃는 준성을 가까스로 노려보던 한서가 자신의 얼굴을 감싼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윽, 하는 신음을 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우악스러운 손아귀 힘과는 달리 애처로울 정도의 목소리였다. 도한서가 맞긴 한가 싶을 정도로.
“잘못한 거 있으면 다… 말해…. 뭐든지 말해달라고…….”
힘을 조절하는 것조차 어려운지, 준성의 손목을 붙잡은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가 움찔하며 힘을 빼길 반복한다.
“내가 고칠게…. 고치면 되잖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비는 것 같은 비굴한 목소리였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꽉 붙잡고 매달린 채로 뭐든 원하는 대로 복종하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준성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준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드는 도한서의 모습은 참으로 처연하고 애달팠다.
그럼에도 준성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네가 희생하느니… 이딴 세상, 다 뒤져버리라고 해.”
그때 했던 말은 지금도 똑같이 내뱉을 자신이 있었다.
도한서가 대체 뭘 잘못했기에 희생해야만 하는가.
태어나서 제대로 된 자유조차 맛보지 못한 이 불쌍한 녀석이 대체 왜, 만인을 위한 제물이 되어야만 하는가.
강준성으로서는 이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에 도한서의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삶 자체를 자유롭게 바꿔주기로 마음먹었던 거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내가 네 ‘세상’이 되었고, 그런 내가 네 자유를 망가뜨릴 바이러스가 되었다면…….’
나 역시 뒤져야 맞는 거겠지.
자신이 과거에 했던 발언을 되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어 보인 준성이 한서를 덮듯이 끌어안았다. 그의 이마에 한서가 해줬던 것처럼 간지럽고 상냥하게, 온 애정을 담아 입을 맞췄다.
“넌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내가 잘못한 거야.”
좀비들조차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도한서에게 있어, 지금의 강준성은 그의 삶을 망치게 될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다.
“그러니까…….”
준성의 입술이 내려와, 이젠 눈을 거의 다 덮어버린 한서의 눈꺼풀에 키스했다.
“나 벌주러 와.”
한서의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그 사이에서 흐릿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강준성을 붙잡았다. 반면, 그의 집요한 눈과 달리, 준성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은 힘이 쭉 빠져서 거의 걸쳐져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강…준…성….”
준성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둔한 입술에 입을 맞추며 숨결을 넣어주듯 속삭였다.
“기다릴게.”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도한서는 끝내 눈을 감아버렸다.
준성은 완전히 잠들어버린 한서에게 제 몸을 포갠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준성은 비척거리는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새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쓸며 한서에게서 내려오는데, 손목이 덜컥 당겨졌다. 잠들긴 했어도 준성의 손목을 그러쥔 손에는 아직 약간의 힘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한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손을 떼어낸 준성이 이번엔 그의 몸을 똑바로 돌려 눕혔다. 머리 밑에 베개도 대어 주고 긴 다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올려서 매트에 살포시 올려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불까지 끌어다가 꼼꼼히 덮어주고는 물건을 거의 다 털어 넣은 백팩을 매트 옆에 놓아주었다.
준성은 손에 들고 있던 하얀 약통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고작 네 알의 수면제가 남아 있었다.
한서가 진통제를 가지러 나간 사이에 이 약통을 백팩에서 꺼내 들 때까지만 해도 주저함이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도한서의 품에서 그의 요란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고민한 끝에 결국 답을 내렸던 것처럼, 그때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뿐이었다.
도망치자.
절대 잡을 수 없도록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도한서가 모르는 곳에서 소리 없이 죽어버리자.
정신이 다 무너질 정도로 목놓아 울면서 벌벌 떨기만 하던 어제의 기억을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울고 떨어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해결은커녕, 오히려 도한서를 더욱 지독한 곳으로 등 떠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자신이 도한서에게 있어 ‘민폐 캐릭터’가 되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맛봐야 했다. 모처럼 도한서가 회복시켜준 알량한 자존감은 참 다행스럽게도, 도한서의 삶을 망가뜨리는 민폐 덩어리 역할에서 벗어나자고 말해주었다. 덕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꽤 깊숙한 곳에 구겨 넣어둘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도한서에게서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이 약을 써야만 했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지금처럼 몸까지 크게 다친 상태로는 도한서를 완전히 떨어뜨릴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도한서는 과도한 긴장과 강준성에게 쏠린 신경 때문에 푹 잠들지 못했다. 방금도 잠든 것처럼 얌전히 누워있다가 몸을 뒤척거리자마자 깨버려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니 그를 푹 재우고 빠져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수면제의 효과는 실제로 몇 번 써먹어 본 적이 있었던 준성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약이든 녹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준성은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도한서는 눈치가 빠르니까 혹시나 약이 녹아든 음료의 맛을 단번에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 대신 일부러 과일 맛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 음료를 선택했고, 몰래 알약을 손에 쥐고 있었다. 물론, 혹시나 약을 넣는 걸 들킬 수도 있으니 그의 시선도 잡아두고 배도 채울 겸, 굳이 칼로리 바 하나를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한서의 시선을 확인하며 수면제를 쥔 손으로 캔 뚜껑을 땀과 동시에 구멍에 약을 흘려 넣었다. 그러고선 곧바로 입을 대었으니, 제대로 녹지도 않은 수면제가 준성에게 영향을 끼칠 리 없었다.
그렇게 ‘강준성이 입을 댄 음료’는 뒤이어 도한서에게 주어졌다.
예상대로 도한서는 ‘강준성이 입을 댄 음료’는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저 한 모금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 이제 막 넣어둔 수면제는 그가 음료를 마시는 동안에 자연스레 녹아버렸고, 서서히 맛을 바꿔 간 덕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준성은 완전히 푹 잠들어버린 한서를 내려다보며 손아귀 안의 약통을 수술용 트레이에 얹어두었다. 더는 쓸 일도 없을 테니,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달랑 거즈와 붕대, 라이터 하나와 손전등만 손에 든 채 몸을 돌리려던 준성의 눈에, 수술용 트레이에 놓여 있던 혈액팩이 보였다. 준성은 머뭇거림도 없이 그 혈액팩을 손에 쥐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다. 아니면 도한서가 도저히 찾지 못할 만한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중간에 멋대로 죽어서 좀비가 되어버리면 큰일이니, 아깝긴 해도 모처럼 도한서가 뽑아둔 이 혈액은 반드시 챙겨야 할 물건이었다.
혈액팩만 챙겨서 나갈까 하다가 돌연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바늘이 약간 굵은 채혈용 주사기를 든 준성이 그것과 도한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성은 주사기를 노려보다가, 이불 속에 넣어둔 한서의 팔을 꺼내었다. 피부가 창백해서인지 팔꿈치 안쪽의 혈관이 상당히 잘 보였다. 준성은 그 팔의 위쪽 부분에 병원용 노란 고무줄을 감고 바늘 끝을 한서의 팔 안쪽 혈관을 향해 꽂았다.
그간 본 게 있어서인지, 준성은 제법 그럴듯하게 바늘을 꽂아 넣었다.
뽑아낸 피는 고작해야 작은 눈금 하나 정도.
1mL도 안 되는 아주 적은 양의 피였다.
허공에서 한계치까지 주사기를 쭉 당긴 준성은 내부에 소량의 혈액이 전부 묻게끔 흔들었다. 그러고선 마지막으로 주사기를 끝까지 눌러서 제 손에 얼마 되지 않는 도한서의 피를 부었다.
‘아까워.’
강아지처럼 자신의 손바닥에 고인 도한서의 피를 할짝거렸다. 진한 피비린내가 입 안을 채웠지만, 도한서의 것이라서인지 딱히 역겹거나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준성은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채혈용 주사기를 일부러 보란 듯이 트레이에 두고서 혈액팩을 챙겨 들었다.
일부러 피를 뽑은 흔적을 남겨두었다. 피를 얼마나 더 뽑아갔는지 모르는 이상, 혈액팩이 다 소진되었을 시간이더라도 도한서는 강준성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준성은 핏자국이 남은 제 손바닥을 핥으며 도한서에게 살풋 웃어주었다.
“우리, 계속 엇갈렸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네가 살 수 있으니까.
준성은 미련이 번지는 눈동자를 거두며 이내 도한서의 공간을 스스로 빠져나갔다.
잠든 도한서만이 남아 있는 새하얀 공간에는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오직 서늘한 공기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