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서가 왜 이렇게 쓰러질 때까지 피를 뽑아야 했는지도 쉽게 짐작이 갔다.
섹스를 통해 모처럼 혈액이 도파민 과잉 상태의 준(準) 백신이 된 상태였다. 이때 뽑아둔 혈액량이 준성의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진행을 일시적으로나마 멈춰둘 수 있는 시간과 비례하니, 무리를 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양을 채취하려 했을 거다.
“이……!”
정신을 잃은 도한서를 향해 바보 같고 미련하다며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기에.
준성은 애꿎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으며 한서를 꼭 끌어안았다. 찬 바닥에 오래 쓰러져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뜨거운 피를 하도 뽑아내서인지, 도한서의 몸은 그야말로 얼음장이나 다름없었다.
“음….”
준성에게 안겨 있던 한서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스르르 눈을 떴다.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주제에, 더듬더듬 준성을 마주 끌어안았다.
“왜 나와 있어?”
“…너야말로 왜 이런 데서 퍼질러 자고 있냐?”
“그러게.”
피곤한 기색이 섞인 낮은 웃음을 흘린 한서가 준성의 등을 쓸어주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리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혈액팩을 주워서 준성의 품에 안겨준다.
“잠깐 들고 있어.”
준성은 한서가 맡긴 두 개의 혈액팩을 저도 모르게 소중한 듯 끌어안았다. 뒤이어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잠깐, 내려줘. 야, 도한서!”
준성을 가뿐히 안아 든 한서가 그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내려달라고! 너 방금 쓰러졌다가 일어났잖아.”
“자고 일어난 것뿐이야. 멀쩡해.”
“그럼 나도 멀쩡하니까 내려놔. 내가 걸을 수 있어.”
“넌 누가 봐도 환자야. 붕대가 폼으로 감겨 있는 건 아니잖아.”
준성은 태연하게 대꾸하는 한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분명 따가운 눈초리를 느꼈을 텐데도 한서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묵묵히 제 걸음을 옮겼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도록 발버둥이나 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내색은 안 해도 아직 어지러울 텐데, 괜히 난동 부려봐야 내려놓지도 않을 것 같고 억지로 버티고 있을 한서만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도한서는 기어이 방에 도착할 때까지 준성을 놔주지 않았다. 얌전히 안겨 있던 준성은 한서가 제 몸을 매트에 내려놓아 준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나,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이불을 덮어주던 한서의 손이 멈칫했다.
“얼마나 살 수 있는 거냐고.”
“원래대로라면… 길어야 15분. ”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싸늘한 대답이었다.
준성의 옆에 걸터앉은 한서가 그의 물린 자리를 쓸었다. 두툼한 거즈를 타고 약간 간지러운 쓰라림이 느껴졌다.
“살점이 다 뜯어져 나갈 정도로 물린 것도 아니고 바이러스의 침투량도 적어서 아마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야.”
거즈를 뚫고 그 안의 상처를 낱낱이 눈으로 뜯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준성의 목을 바라보던 한서의 차가운 눈빛이 금세 누그러졌다. 그는 보기만 해도 안심이 될 정도의 여유롭고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어디까지나 ‘원래대로라면’ 15분이라는 것뿐이지,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냐.”
한서의 손이 준성의 손등을 받쳐 들었다. 그의 엄지가 준성의 손목 안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준성의 약간 빠르게 뛰는 맥박이 엄지 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금처럼 주기적으로 내 피를 일정량 제공하면 며칠이든 멀쩡히 버틸 수 있어. 도파민 과잉 상태의 혈액까지 있으면 1년도 거뜬하고.”
“1년….”
희망적인 말이었다.
보통은 좀비에게 물리고 수 분 안에 죽음을 맞는다. 물린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바이러스 침투량이 늘고, 감염 진행속도 또한 빨라서 몇십 초 만에 변하기도 한다.
다행히 준성은 물린 정도가 심하지 않았고 소량이나마 한서의 혈액을 곧바로 먹여두었기에 별다른 감염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서가 자신의 혈액을 상당량 수혈해서 바이러스의 진행을 거의 막아둔 덕분에 당장은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준성은 그가 안고 있던 두 개의 혈액팩을 내려다보았다. 다음으로는 수술용 트레이에 놓여 있는 250mL 혈액팩 하나와 링거대에 걸려 있는 반쯤 남은 팩 또한 올려다보았다.
“만약 내가 지금부터 더 이상 네 피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돼?”
한서의 눈매가 금세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딴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것처럼 무언의 압박을 주는 그의 눈빛에, 준성이 동요도 없이 재차 물었다.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 나도 내 몸에 관한 건데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어?”
“…….”
준성을 빤히 바라보던 한서가 약간의 한숨을 담아 대답했다.
“앞으로 2, 30분 정도 지나면 세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게 느껴질 거야. 물린 부위에서 점점 넓은 범위로 빠르게 퍼져 나갈 거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준성은 그 시간에 겁을 집어먹기보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자신의 끝을 계산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도한서의 혈액은 준성이 직접 수혈용 바늘을 빼냈던 이후로 양이 줄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섹스를 하고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지금 이때까지, 어림잡아 5시간하고도 몇십 분이 흐른 것으로 추측되었다.
‘혈액팩 하나당 250mL. 지금 내게 들어간 도한서의 혈액은 팩의 절반인 125mL 정도이고 그게 약 6시간 정도 버티게 해주니까… 남은 혈액을 전부 쓴다면 앞으로 약 18시간.’
링거대와 수술용 트레이의 혈액팩을 바라보던 준성이 다시금 제 품으로 시선을 내렸다. 겉으로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도파민 과잉 상태의 특별한 혈액에 그의 흔들리는 눈빛이 비쳤다.
‘이것까지 다 써봐야 42시간인가….’
준성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되뇌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250mL 혈액팩이 4개다. 도한서는 하루 만에 1L에 달하는 혈액을 뽑아내었고, 이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양이다.
성인 기준, 2L 정도의 피를 흘리면 대부분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반이라고는 하나, 1L나 되는 피를 뽑았는데 멀쩡할 리가 없다. 오죽하면 빈혈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절까지 했겠는가.
‘미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준성은 여전히 제 손목을 쓰다듬으며 맥을 느끼고 있는 도한서를 남몰래 노려보았다. 지금도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준성의 손을 들어 그 손목에 입까지 맞춘 한서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만 곁에 있으면 네가 죽을 일 따윈 없어.”
안심시키려는 눈웃음이 오히려 준성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대신 네가 죽겠지.’
이틀에 한 번꼴로 도한서의 피 1L를 뽑아내야만 자신이 살 수 있었다. 당장이야 건강한 상태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며칠 가지도 못해서 도한서의 몸에 이상이 생길 게 뻔했다. 영양을 보충할 먹을 만한 것도 변변찮고 수분 또한 언제 부족해질지 모르는 때에 과도한 혈액 채취는 당연히 문제가 된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해봤자 넌 듣지도 않겠지.’
준성은 자신의 손목에 간지러운 키스를 남기는 한서를 그저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이 마주친 그가 점점 다가와 입술을 맞대고, 창백한 안색만큼이나 서늘해진 숨결을 넣어주는 동안에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성욕이 아니라 부드러운 애정으로만 점철된 키스를 나누며, 준성은 자신을 감싸 안는 도한서의 품에서 불안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왜 이렇게 떨어. 추워?”
키스를 나누던 한서가 준성의 떨리는 등을 차분히 쓸어주었다. 오한을 느끼는 것처럼 떨던 준성이 한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아직 떨리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준성이 나직이 물었다. 한서는 자신에게 기댄 준성의 머리를 쓸어주며 피식 웃었다.
“언제는 허락받고 물었어? 그냥 물어봐.”
“…….”
한서의 대답을 듣고도 준성은 선뜻 묻지 못했다.
잠시 한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준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한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떨림을 삼키는 준성의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넌… 어떻게 할 거야?”
한서의 부드럽던 눈빛이 단번에 살벌해졌다. 그딴 상상은 절대 하지도 말라는 것처럼 험악해지던 눈빛이 뒤이어 고요하게 침잠했다.
“당연한 걸 뭘 물어.”
한서가 수술용 트레이로 손을 뻗어, 척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이는 메스를 들었다. 그 끝이 도한서의 목을 스스로 찌르듯 겨누었다.
한서의 입매가 진심 어린 묵직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나도 같이 죽어야지.”
준성은 저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어쩜 너는, 내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