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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204)화 (204/240)

- 204화 -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꿈보다 더한 지옥을 보여준 사람인데, 어떻게 그 끔찍한 자의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돼.’

준성이 두 눈을 부릅뜬 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얼굴 없는 머리가 그의 발끝에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졌다.

“싫……!”

기겁한 준성이 움직여지지 않는 발을 어떻게든 웅크려보려 했다.

“괜찮아.”

주문과도 같은 상냥한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그 한마디에 긴장했던 몸이 확 풀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남기혁의 머리 뒤에서 쑥 뻗어 나온 일행들의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흐릿하게만 보이는 얼굴과 달리, 남기혁의 입을 막아버린 피투성이의 손은 굉장히 선명했다.

“이제 저놈은 잊어도 돼.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으니까.”

도한서의 의미심장한 말은 준성의 불안감을 살포시 내리눌러주었다. 기대고 있는 등을 타고 그의 온기가 퍼져, 차갑게 굳어 있던 온몸에 안도감을 품은 생기가 돌았다.

그러는 동안 남기혁의 머리에 수많은 손이 달라붙었다.

피로 범벅된 손들 사이로, 여러 개의 칼자국이 새겨진 까만 눈구멍이 준성을 노려보았다. 그의 머리가 마구 몸부림치며 제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떨쳐내었다.

“준성, 아…. 네가 어떻게 날 잊어…!”

처음 들어보는 원망의 목소리.

남기혁은 단 한 번도 강준성을 원망하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그랬고, 현실에서도 그랬다.

꿈속에서 수없이 준성에게 죽을 때도 원망의 말은커녕,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을 가장 먼저 찾아와 준 것에 감격했다. 자신을 죽일 때마다 점점 닮아가듯 미쳐가는 준성이 마냥 사랑스러워 보였다.

현실에서도 준성의 함정을 겪으며 몸이 너덜너덜해지고 끝내 죽어버리기까지 했지만, 그 와중에도 남기혁의 눈에는 강준성을 향한 원망은 단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다.

망각.

오직 그것만이 남기혁의 원망을 끄집어냈다.

“네가 어떻게! 날……!”

독기 담긴 뾰족한 칼날과도 같은 목소리가 다시금 입을 틀어막는 손에 의해 먹먹히 차단되었다.

이윽고 준성의 발끝에 닿아 있던 남기혁의 머리는 수많은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피투성이의 사람들이 남기혁의 머리 하나를 둘러싸고 게걸스럽게 뜯어먹는 소리를 내었다. 입을 틀어막힌 남기혁의 비명은 점차 사그라져,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얼굴 없는 남기혁의 마지막을 두 눈 뜨고 전부 바라보고 있던 준성은 남기혁의 목소리가 완전히 끊기고 나서야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줄 수 있었다.

그때를 노리기라도 한 듯, 준성의 귓가에 남기혁의 피 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너도 나와 똑같아.”

안심하고 있던 준성이 깜짝 놀라며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로 얼룩진 흐릿한 얼굴이 어느새 그의 옆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네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핏물 속에서 남기혁의 입매가 음산한 곡선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만드는 엔딩은 언제나 배드 엔딩(Bad Ending)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남기혁의 머리는 끈적한 핏물이 되어 바닥에 산산이 조각나듯 흩어져버렸다.

* * *

“헉!”

눈을 번쩍 뜬 준성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숨이 벅차서 목이 당겼다. 두 손은 잠들어 있는 동안 꽉 쥐고 있기라도 했던 건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린 것뿐만 아니라 손바닥에 손톱자국까지 찍혀 있다. 아직 열감이 남아 있는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기까지 했다.

준성은 숨을 고르며 조금 전의 꿈을 되새겨보았다. 평범한 꿈답게 군데군데 기억이 애매한 부분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남기혁이 했던 의미심장한 말만큼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미친 새끼.’

집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꿈에서까지 그런 괴상한 몰골이 되어 찾아오다니.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지?’

준성은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손으로 훑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남기혁의 얼굴은 잊고 싶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사람다운 꿈’이 아니라 지옥 같은 반복된 꿈속에서의 일은 무엇 하나 잊을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의 기억력과 무관하게 꿈속에서의 모든 일은 바로 몇 분 전에 겪었던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기억된다. 이때껏 쭉 그래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러하다.

단 하나.

남기혁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제게 그토록 큰 영향을 준 남자인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신적인 문제인가.’

남기혁이 죽었으니 어떻게든 그와의 일을 잊어보고자 뇌가 마음대로 기억을 손댄 건 아닐까.

남기혁이 제게 해왔던 끔찍한 일들과 그를 향한 제 원한을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뇌가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멋대로 기억을 조작하는 사례도 있으니.

순간적으로 남기혁이 그의 눈을 신경 쓰던 게 생각났지만, 그것만으로는 제 기억과의 확실한 연결점을 찾을 수 없어서 포기했다. 그저 막연하게, 둘 다 반복된 꿈을 경험한 사람들이고 그중 한 명이 죽어버리면서 뭔가 제게도 여파가 온 건가 싶기도 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게 된 남기혁, 그의 꿈속 모습을 떠올리던 준성은 뒤늦게 자신이 제법 평온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숨이 가쁘긴 해도 예전처럼 목이 졸리는 것처럼 호흡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겁을 먹거나 몸이 덜덜 떨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한서는 무슨 꿈에서까지 그렇게…….’

꿈속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지탱해주던 도한서를 떠올렸다. 그의 상냥한 속삭임과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체온이 지금도 함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섹스 중에 했던 한서의 말이 뒤늦게 하나하나 떠올랐다.

“난 너 두고 어디에도 안 가. 그러니까 일일이 애원하며 붙잡을 필요 없어.”

막을 새도 없이 조각조각 나서 끝없이 추락하던 자신을 도한서가 붙잡아주었다. 애원하며 붙잡아야 했던 건 자신인데, 도리어 그가 매달렸다.

“예쁜 짓 많이 할 테니까 나 버리면 안 돼요, 주인님.”

정말 버려질까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자신을 꼭 끌어안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안도감으로 애무해주기 바빴다.

“원한다면 몇 번이든 말해줄게. 이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넌 안 죽을 거고, 내가 안 죽게 할 거야.”

열을 달래주고 간지러운 키스를 퍼부으며 안쪽 깊숙한 곳까지 전부 빈틈없이 채워주었다. 제 자존감마저도.

준성은 도한서를 떠올리는 내내 얼굴에 열기가 몰려드는 걸 느끼며 눈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죽음에 굴복하며 떨고 싶지 않았다.

제게는 도한서가 함께 있으니까.

평소의 강준성으로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의욕적인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방에 도한서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딜 간 거지?’

매트에는 자신이 누운 자리 외에는 온기가 없었다. 한서가 가져다 둔 의자로도 손을 뻗어 시트를 만져봤지만 역시나 차가웠다.

자리를 비운 지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기에 직접 찾으러 가고자 매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알몸이었던 준성은 섹스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해도 말끔해진 제 모습을 내려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방 한구석에 한쪽 어깨끈이 잘린 백팩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백팩 안에서 여분의 속옷과 깨끗한 옷가지를 꺼내어 입은 준성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진통제가 잘 돌고 있어서 아프진 않았지만, 셔츠를 입으면서 약간 뻐근해진 어깨가 복도의 한기로 인해 저릿거렸다.

준성은 가장 먼저 자신이 갔었던 샤워실로 향했다. 자신이 있던 방과 가깝기도 했고 혹시나 씻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바로 향했던 거였지만, 예상과 달리 텅 비어있었다.

샤워실에서 나온 준성은 소리가 울리는 음산한 복도를 걸었다. 불이 아예 꺼져 있었다면 모를까, 비상등만 드문드문 켜져 있으니 이게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일단은 도한서의 이름을 부르며 눈에 보이는 문마다 하나씩 다 열어보았다. 준성으로서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방도 있었고 각종 도구가 빼곡히 차지한 연구실도 있었지만, 어디에도 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간 거야?’

복도를 반 이상 걸었는데도 보이지 않고 이름을 불러도 대답 한마디 없으니, 이젠 슬슬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한서가 자신을 홀로 내버려 두고 멀리 갈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혹시라도 정말 두고 가버린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적으로 오싹한 공포와 극도의 불안감이 턱까지 차올랐다.

도한서를 찾는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할 즈음.

복도 끄트머리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도한서!”

쓰러진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본 준성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급히 달려가서 몸을 받쳐주고 얼굴을 들었다. 비상등에 비친 도한서의 얼굴은 평소보다 몇 배는 창백했으며, 숨도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굳게 닫고 있는 눈가도 왜인지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야, 왜 이래? 도한서!”

당황한 준성이 도한서를 부르며 그를 받쳐 안는 순간,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린 준성의 눈에, 새로운 혈액팩 두 개가 보였다. 그걸 바라보던 준성은 굳은 얼굴로 도한서의 팔을 확인했다. 역시나 그의 팔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사 자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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