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까마득한 어둠을 등진 채로 입구에 들어선 도한서는 자신을 노려보는 살기 담은 눈빛을 무시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비들이 휘젓고 간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해진 옥상에는 얼굴이 낯익은 두 남자만이 있었다.
‘강준성은?’
옥상에 응당 있어야 할 강준성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남기혁에게 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들어왔던 바로는 그럴 리가 없었기에 자연히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옥상 한쪽에 마련된 창고가 보였다. 5층 내부로 이어진 입구 외에 문이 있는 건 그곳 하나뿐이니, 아마도 창고 안에 있지 않을까 했다.
“야.”
창고에 시선을 박고 있는데, 남기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 면역자야?”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홀로 여기까지 무사히 올라왔다. 시력이 온전했다면 그의 몸에 난 자잘한 상처가 전부 날붙이에 의한 것이란 걸 알아챘겠지만, 그의 곧게 선 몸 실루엣만으로는 조금의 삐걱거림도 확인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우석진의 증언이 있었다.
그가 말하길, 모든 좀비가 저 남자를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건물에 좀비들이 바글바글해진 것도 이해가 갔다. 저 남자가, 혹은 저 남자를 이용한 어떠한 방법이 강준성을 ‘일시적 면역’ 상태로 만든 게 분명했다. 강준성이 다수의 좀비를 이용한 함정을 만들면서 한 번도 물리지 않은 거로 보아, 제 추측은 확실한 듯했다.
하지만 도한서는 면역자냐는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화려하고 잘생긴 얼굴에 걸맞은 예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천천히 다가오는 남기혁을 마주하며, 도한서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네가 남기혁이지? 얘기 많이 들었어.”
도한서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얘기를 많이 들었다’라는 부분에서는 제아무리 남기혁이라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준성이가… 내 얘길 했어?”
살기로 가득한 상황임에도 가슴이 설레었다.
강준성이 타인에게 제 이야기를 하다니.
강준성은 언제나 냉정했다. 꿈속에서 이런 재난 상황을 수없이 맞닥뜨렸음에도 나태해지거나 방심하는 법이 없었고, 불필요한 사적인 이야기도 굳이 풀어놓는 법이 없었다. 오죽하면 그의 동료가 됐던 사람들도 ‘강준성에게 동생이 있다’ 정도만 알 뿐, 그녀의 이름이나 나이조차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 정도로 본인과 연관된 일이라면 굳이 드러낼 필요성조차 못 느끼던 강준성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니.
남기혁으로서는 확실히 두근거릴 포인트였다.
한편으로는 눈앞의 남자에 대한 적개심이 치솟았다.
강준성에게 그런 깊은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신뢰를 구축한 자는 꿈속에서도 흔치 않았다.
한서는 남기혁을 향해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
“꿈속에서부터 집착해온 미친 또라이 새끼라던데.”
욕설을 섞은 직설적인 말에 남기혁이 웃으며 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아직 단검에 질척하게 마르다 만 준성의 피를 내려다보며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준성이가 내 집착을 알아주다니, 기분 좋은데?”
남기혁을 차갑게 바라보던 도한서가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쟤 여기에 트라우마 심은 것도 너지?”
“맞아.”
남기혁이 한차례 부르르 떨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준성이는 목을 졸라줘야 매달리거든. 살려줘, 살려줘, 하면서 얼마나 예쁘게 우는지…….”
“근데 어쩌나.”
한서는 자신의 목을 톡톡 건드리며 보란 듯이 가리켰다.
“그 트라우마, 이젠 얼마 못 갈걸.”
“그럴 리가.”
“장담할 수 있겠어?”
남기혁은 자신이 새겨 넣은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강준성은 그 트라우마에 삼켜져, 자신과 똑같은 몰골로 나락을 기어 다닐 뻔했으니까.
그러니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저딴 남자가 준성의 트라우마를 걷어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정말 제 생각대로 흘렀는가 자문해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아까, 제 손에 목을 졸렸을 때 보였던 강준성의 반응 속에서 ‘두려움’이란 감정은 찰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떻게든 남기혁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기, 이때껏 쌓아왔던 분노, 그리고 한시도 잊지 않는 냉정함이었다.
“하….”
남기혁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지독하게 새겨 넣었던 트라우마, 아니, 자신의 흔적은, 지금의 강준성에게 있어 고작 ‘찰나’에 불과했다.
그걸 깨닫자 탁한 시야만큼이나 머릿속까지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기혁의 복잡한 얼굴을 바라보던 도한서가 흐음, 하는 콧소리를 흘리며 물었다.
“네가 트라우마를 새겼다던 쟤 목, 확인은 해 봤어?”
“확인?”
“붕대 밑.”
그런 게 있었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었다. 워낙 위험하고 거친 상황 속에서 지내고 있으니, 목에 생채기 한둘쯤은 충분히 생길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아하, 확인 안 해봤구나?”
남기혁의 의아한 반응에, 도한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내가 좆 박다가 꼴려서 씹어놨는데, 그걸 못 보다니.”
순간 도한서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얼빠진 표정이 되었던 남기혁이 순식간에 살기를 터뜨렸다. 그의 얼굴이 야차처럼 험악해지고 부릅뜬 눈은 빠르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씨발…, 지금 뭐라고 했냐…?”
좆을 박아? 꼴려서 씹어?
남기혁의 머릿속이 삽시간에 혼란으로 물들었다.
너무 귀하고 예뻐서 감히 꿈속에서조차 탐닉해본 적 없는 강준성의 몸을, 바로 눈앞의 남자가, 더러운 좆을 박고, 개처럼 씹었다고?
남기혁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 준성이가 너 따위에게 몸을 내줄 리가…….”
“네가 뭘 안다고 장담해?”
도한서는 남기혁을 조롱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혼란에 물든 남기혁을 겁도 없이 도발하고 있다.
“궁금하면 강준성한테 옷 좀 다 벗어보라고 할까? 몸 전체에 내가 씹어댄 흔적이 가득할 텐데.”
“아니야…. 아니야….”
멍하니 고개를 내젓는 남기혁을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한서의 눈동자가 거만하게 번들거렸다.
“어젯밤에 하도 예쁘게 울어서 목울대도 좀 씹어줬는데, 숨 쉴 때마다 쓰라려서 나만 노려보던걸.”
도한서가 제 목을 보란 듯이 쓸어 보였다.
“난 너 같은 멍청한 새끼와는 달리, 숨을 못 쉴 때가 아니라 ‘숨 쉴 때마다’ 내 생각만 나게 만들어보려고.”
“씨발-!”
참다못한 남기혁이 화가 치밀어 오른 표정으로 도한서에게 뛰어들었다.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찬 남기혁의 단검이 한서의 목 옆쪽을 향했다. 그 자리는 한서가 우석진의 목에 잭나이프를 꽂아 넣었던 것과 같은 자리였다.
시도는 좋았으나, 탁한 시야로 인한 정확도 하락과 한서의 빠른 움직임이 있었기에 첫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대신 남기혁은 제 단검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매서운 돌려차기를 날렸다. 한서는 5층의 어둠 속으로 숨듯이 뒤로 몸을 날려, 무서운 소리가 나는 발차기를 가까스로 피해내었다.
“이 더러운 개새끼가!”
남기혁이 버럭 외치며 더 깊이 파고들려던 그때.
크아악-!
그어!
한서의 뒤에 펼쳐져 있던 어둠 속에서 두 명의 좀비가 튀어나왔다. 입구에 서 있던 도한서를 분명 먼저 발견했을 텐데도 그들은 오로지 남기혁에게만 달려들었다.
“칫!”
시력이 멀쩡했다면 아무리 어둠 속이라 하더라도 좀비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초점도 제대로 잡을 수 없는 엉망인 눈으로는 좀비들의 실루엣을 잡아내는 것조차 턱없이 어려웠다.
남기혁은 달려드는 두 좀비 중 몸집이 작은 쪽을 발로 차서 벽면에 패대기치고는 다른 한 명의 머리 옆쪽으로는 정확히 단검을 꽂아 넣었다. 귀를 파고든 단검 끝이 그대로 뇌를 망가뜨렸는지, 좀비가 억억 소리를 내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카흑-! 크엑!
패대기쳐졌던 좀비 쪽은 던져지면서 허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했다. 바닥에 기이한 모양새로 누워서는 전신 마비가 온 것처럼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남기혁을 포기할 수 없는 건지, 그를 향해 치아를 딱딱 부딪치며 시끄럽게 괴성을 질러대고 있다.
두 좀비에게 신경을 빼앗긴 틈을 타, 도한서가 그에게 불쑥 달려들었다.
갑자기 눈앞에 튀어나오듯 돌진한 도한서는 남기혁의 단검 쥔 손목부터 덥석 붙잡았다.
순수한 완력으로만 치면 남기혁이 한서보다는 한 수 위였으나, 직전에 한쪽 팔로만 난간에 매달렸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삐걱거리는 어깨와 시큰거리는 손목이 남기혁의 완력을 상당히 약하게 만들어 두었다.
“나 개새끼 맞아. 강준성의 개새끼.”
요염하게 웃어 보인 도한서가 다른 손으로 남기혁의 목을 움켜쥐었다. 남기혁이 강준성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컥!”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버린 남기혁의 귓가에 도한서의 스산한 음성이 스쳤다.
“그러니까 우리 주인님 괴롭힌 새끼는 내장까지 다 물어뜯어 줘야 충견이겠지.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