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같은 건물의 4층, 비상계단.
착잡한 표정의 우석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야간투시경 너머, 바짝 뒤따르고 있던 두 명의 굳은 얼굴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살아남은 건 셋뿐인가.’
입 안이 소태라도 삼킨 것처럼 지극히 썼다.
실책이다.
통유리로 된 건물 외벽 너머로 1층 내부의 상황을 얼추 확인하고 들어온 터였다.
남기혁이 좀비들에게 쫓기면서도 즐겁게 웃는 모습도 보았고, 그들 무리가 돌고 돌아 중앙으로 향하는 것도 확인했다.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파악한 바로, 위로 향하는 길은 중앙의 에스컬레이터, 지금은 전기가 나가서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그리고 어느 건물에나 있을 비상계단이 전부였다.
우석진과 1조 인원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은밀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어렴풋한 어둠이 깔린 중앙 부분에 무수히 많은 아우성이 얽혀있는 걸 알아챘다. 좀비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기우뚱한 사다리를 만드는 것처럼 에스컬레이터에 주르륵 깔려 있었다. 그들 위로 차곡차곡 새로운 좀비들이 타고 올라가, 이제는 머지않아 에스컬레이터 자체가 무너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1층의 좀비들이 모두 중앙에 몰려있다는 걸 깨달은 우석진은 당연히 그 자리를 피했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을 선택한 건 남기혁을 보다 안전하게 1층까지 내려올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봤던 것처럼 1층의 에스컬레이터는 좀비로 그득해서 도저히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모든 층이 그러할 테니, 비상계단을 안전한 퇴로로써 미리 확보해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비상계단은 예상대로 잠겨 있었다. 중앙으로 남기혁을 몰아넣은 것만 봐도 비상계단이 봉쇄되어 있을 게 뻔했던지라 당황하지 않았다. 잠긴 문 정도는 금속제 락픽(Lock-pick) 기구를 가진 조원 덕분에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손쉽게 열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둠뿐인 비상계단 안으로 진입했다.
좀비들의 동선으로 봐선 아예 비상계단 쪽으로 접근조차 못 하도록 남기혁을 몰아세웠을 게 분명했고, 역시나 계단으로 향하는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니 남기혁이 이동 경로로 쓸 수 없었던 비상계단 안쪽은 별다른 장치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좀비 몇 마리 넣어놓는 게 전부이지 않을까.
하지만 건물 옥상에 서 있는 타깃은 이 비상계단을 한가로이 놔둘 생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기혁이 모든 좀비를 뿌리치고 비상계단을 사용하게 될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함정을 만들어둔 게 틀림없다.
1층의 비상계단은 일부러 방심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고요했다.
2층에선 불 꺼진 비상구 표시등 안에 숨어있던 센서가 사람을 인식하여 시끄러운 소리를 울렸다. 올라가는 족족 계단마다 설치된 센서가 쉴 새 없이 소리를 더하니, 모두가 긴장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간투시경으로 진원지를 찾아내어 다급히 부쉈지만, 높다란 계단 위에서는 이미 징그러운 괴성이 줄줄이 터지고 있었다.
계단은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위를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어느 정도 충분한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들린 시끄러운 소리에 반응하여 머리를 내밀던 좀비들이 그 틈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장면은 가히 끔찍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만한 좀비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거지?’
석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위를 노려보았다.
2층부터 4층까지의 내부 상황을 직접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층마다 배치된 비상계단의 문 너머로 차마 짐작조차 하지 못할 많은 수의 괴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층마다 좀비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는 건데, 이 비상계단에서 자신들이 처리한 수만 해도 수십이 넘는다.
최소 백여 명.
그만한 수의 좀비를 타깃 혼자 전부 동원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살아남은 두 명의 조원 중, 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부하의 머리를 향해 총을 드는 지금 이때까지도.
“히익! 혀, 형님!”
몰려드는 좀비는 전부 처리했다. 소음기가 있든 없든, 어차피 소리를 듣고 달려올 좀비들도 없으니 상관없었다.
“살려주십쇼, 형님! 사…, 살짝 긁힌 것뿐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봤어요!”
1조 중에서 단둘만 남아서인가.
우석진은 자신과 같이 유일하게 다친 곳 하나 없는 남자가 이미 좀비에게 손을 물려버린 동료를 필사적으로 감싸는 걸 보았다.
“그냥 손톱에 긁힌 상처입니다! 큰형님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물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물린 자리로 좀비들의 피가 들어가야……!”
탕-!
우석진의 권총이 짙은 화약 냄새를 풍기며 연기를 쏟았다. 그것과 같은 연기가 석진의 앞을 막아서던 동료애 깊은 남자의 머리에서도 아주 잠깐 흘러나왔다. 그마저도 터져 나온 핏물에 삼켜져 버렸지만.
석진은 힘없이 쓰러져 계단을 굴러 내려가는 죽은 부하를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형님이 내려오실 길을 위험하게 만들 순 없지.’
남기혁이 내려올 길은 비록 시체와 피가 가득하더라도 절대 위험해선 안 된다. 그걸 위해서라면 머지않아 좀비가 될 아군도 아무 감정 없이 죽일 수 있고, 그런 자들을 감싸며 앞을 가로막는 자들 또한 누구든 제 손으로 처리할 것이다.
“으, 으아…-!”
탕-!
한 발의 총성이 마지막 남은 조원이자, 곧 좀비가 될 게 분명한 남자의 머리를 꿰뚫었다. 비명조차 완성하지 못하고 뒤로 쓰러진 남자가 그를 감싸주던 시체 위에 포개지듯 떨어졌다.
혹시 몰라서 한 발을 더 쏘려고 했더니, 총에서 틱-하는 튕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무래도 방금 쏜 게 마지막 총알이었던 모양이다.
혼자가 된 우석진은 탄환 없는 총을 품에 넣은 채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발끝에 뭔가가 툭 채였다.
방금의 남자들이 소란을 떨다가 떨어뜨린 야간투시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기혁은 야간투시경도 없이 이 어둠 깔린 건물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가진 거라고는 어느 날 미친 듯이 찾아대던 작은 라이터 하나뿐.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코앞 정도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남기혁에게 가져다줄 생각으로 야간투시경을 집어 들던 우석진이 멈칫했다.
‘어차피 형님은…….’
우석진의 손끝이 짧게 떨리는가 싶더니, 야간투시경을 그대로 바닥에 둔 채 거두어진다. 이걸 쓰려면 안경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래서는 남기혁이 몇 걸음 나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남기혁의 시력에 관해선 그만큼이나 우석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좀비 사태가 터지기 두 달쯤 전부터 시력이 점점 나빠지더니만, 이젠 안경 없이 사물을 분간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에 이르렀다. 특히나 좀비 사태 이후로는 시력 감퇴가 너무 빨랐다. 어떻게든 맞는 안경을 구해와도 다음 날 새로 구해오길 반복해야 했다.
좀비 사태가 터진 지 사흘째 저녁.
그날도 새 안경을 구해와서 건네주는 우석진에게 남기혁이 다정하게 웃어주며 말을 건넸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형님. 다만… 왜 이렇게 시력이 나빠지시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하핫, 내가 문제라서 그래.”
“문제라뇨?”
“준성이를 엿볼 수 있다는 건, 지금이 ‘현실’이 맞다는 증거나 다름없거든. 그래서 자꾸 엿보게 되나 봐.”
“형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남기혁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눈으로 우석진을 바라보며 흘리듯 말했다.
“그냥…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할 때가 있다는 말이야.”
새 안경을 쓰며 싱긋 웃던 남기혁의 얼굴이 다시금 집착과 광기로 물들어갔다.
“준성이가 같이 있어 주면 더 이상 불안해할 일도 없겠지.”
한 사람을 떠올리며 차가운 불을 삼켜내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지금 이때까지도 점점 탁해져 가고 있었다.
우석진은 타깃이 남기혁과 어떻게 만나고 어떤 접점을 가졌는지, 대체 무슨 수로 제 형님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하고 있다.
남기혁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선 그가 필요하다는 걸.
자신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남기혁이 필요한 것처럼.
‘형님….’
남기혁을 떠올리며 몸을 바로 세운 우석진이 이젠 고요해진 계단을 차분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려올 새도 없이 총살당한 좀비들이 위로 향하는 계단에 너저분하게 쓰러져 있었지만, 그들은 우석진의 발걸음을 조금도 묶지 못했다.
계단의 끝.
5층에 다다른 우석진은 유일하게 자리 잡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남기혁의 것과 같은 군용 단검을 손에 쥐었다. 총알도 없으니 이제부터는 좀비가 나타나도 전부 육탄전을 벌여야만 했다.
남기혁이 수류탄을 사용할 정도라면 분명 많은 좀비가 있었을 것이다.
육탄전으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을 만한 수였기에 그런 방법을 썼지 않을까. 그 뒤엔 옥상까지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의 좀비를 처리했을 테고.
남은 좀비들 따위는 남기혁에게 가는 앞길을 막는 순간, 모조리 제 손으로 처리해버리면 될 일이다.
우석진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천천히 문을 열었다.
각오가 무색하게도, 문 너머에는 움직이는 좀비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폭발에 노출되어 여기저기가 조각나거나 머리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버린 좀비들이라면 여럿 보였지만, 괴성을 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올 만한 좀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형님이 전부 처리하신 건가.’
남기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우석진은 얼마 가지 않아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어어….
아우….
탁- 탁-.
어렴풋이 들리는 신음 너머로 누군가의 맑은 발소리가 들렸다. 좀비의 것이라고 치기엔 너무나 정갈하고 균일한 소리라, 저절로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형님의 발소리는 아니야. 그럼 설마 타깃이?!’
고개를 돌린 우석진의 시선이 에스컬레이터에 닿았다. 맑은 발소리는 누군가가 태연하게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하나하나 밟는 소리였다.
긴장한 우석진이 단검을 꽉 쥔 채 에스컬레이터를 노려보길 몇 초.
겁도 없이 환한 빛을 내뿜는 손전등을 쥔 남자가 이내 우석진을 찾아내었다.
야간투시경에 빛을 정통으로 받아버려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우석진의 귀로, 남자의 여유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한 마리 남아 있었네.”
어째서인지, 남자의 목소리에 담긴 냉기가 남기혁을 굉장히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