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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182)화 (182/240)

- 182화 -

한 박자 늦긴 했어도 머리를 뒤로 뺀 게 정답이었다.

두개골을 박살 낼 것처럼 내리꽂히던 마체테의 칼날이 남기혁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이 떨어져 박살이 나고, 베여버린 오른쪽 눈에서 피 몇 방울이 튀었다.

“큭…!”

순간 주춤한 남기혁이 피가 흐르는 눈을 단검 든 손등으로 꾹 눌렀다. 생각보다 제대로 베인 건지, 눈꺼풀이 좌우로 완전히 찢긴 느낌이 들었다. 눈알도 아마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

남기혁은 그나마 멀쩡한 왼쪽 눈으로 아직도 시야에 가득한 연막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눈깔…!’

자신의 눈을 베어버린 강준성이 아니라, 초점이 거의 잡히지도 않는 제 왼쪽 눈을 욕했다.

왼쪽 눈은 이전에 곽두재와 싸울 때 안경 파편이 박혔던 적이 있었는데, 그 탓에 오른쪽 눈보다 더 시력이 나쁘고 초점도 엉망이었다. 오른쪽 눈을 못 쓰게 되었으니, 이제 의지할 거라고는 이런 뿌연 시야라도 가진 눈 하나뿐이다.

‘눈 하나뿐….’

그 사실을 상기하자, 남기혁의 얼굴이 삽시간에 절망으로 뒤덮였다. 이제껏 그의 측근을 포함한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얼굴이다.

“안 돼….”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너무 떨어서 좀비들처럼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날 지경이다.

오른쪽 눈을 짚고 있던 손등이 떨어졌다. 손등의 흥건한 핏자국이 그의 왼쪽 시야를 채웠다.

“절대 안 돼….”

그나마 시력이 괜찮았던 오른쪽 눈이 쓸모없어져 버렸다. 부상 탓이라고는 하나, 왼쪽 눈도 ‘망가졌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시력이 지극히 나쁘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그마저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남기혁은 꿈속에서조차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지독한 공포를 바로 이 순간에 느끼고 있었다. 그에 맞춰 머릿속에 멋대로 누군가의 음성이 재생된다.

“누구? 남기혁이 누군데?”

“나와 만난 적이… 있던가?”

“석진이도 그렇고, 다른 애들이 다들 나보고 이상하다고 하긴 하더라. 어떻게 널 잊을 수가 있냐고. 근데 진짜 기억이 안 나는걸.”

현실에서 마주한 자신의 전대(前代) 회귀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속속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꿈을 엿보던 그가, 어떤 말로를 맞았던가.

“씨바아아알-!”

단검을 내던진 남기혁이 격한 외침을 터뜨리며 연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그의 오른손이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그물처럼 내뻗어졌다.

강준성은 연막 속에 완전히 갇혀버렸음에도 남기혁의 머리를 노릴 수 있었다.

캔으로 만든 조악한 연막탄은 실제 군대에서 쓰는 것에 비해 연기가 적고 덜 뿌연 편이었다. 그래서 눈이 특히 나쁘지만 않다면 연기 너머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실루엣 정도는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일부러 바람이 부는 방향을 계산하여 자신이 가장 먼저 연막탄 속으로 숨는 패턴을 택했다. 그렇게 되면 순간적으로 남기혁의 시야에서 도망친 후에 그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계획은 반만 성공했다.

좀비를 상대한다는 마음으로 단번에 머리를 내려찍었으나, 동물적 감각이 발달한 남기혁은 그마저도 피해버렸다. 다행히 얼굴이라도 벤 것 같긴 했지만 결정타는 아닌 듯했다.

연막탄을 더 뿌려서 기회를 노려보고자 백팩으로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씨바아아알-!”

갑자기 터진 남기혁의 외침이 준성의 전신을 사슬로 묶듯이 꽉 옭아매었다. 누군가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전신이 이토록 경직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연막 사이로 불쑥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건 이때까지와 마찬가지로 군용 단검을 쥐고 있었어야 할 남기혁의 손이었다.

하지만 남기혁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당연히 저 손이 노리는 건 자르다 말았던 왼쪽 어깨이려니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른 방향을 택했다.

“컥…!”

강한 힘을 담은 남기혁의 손이 준성의 목을 틀어쥐었다. 전신을 가려주던 연막이 바람을 타고 흔들리던 그 틈을 정확히 노린 게 분명했다.

강한 힘에 목을 틀어 잡힌 준성은 순간적으로 전등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돌아오는 걸 느꼈다.

“윽, 허억…!”

붕대 감긴 준성의 목은 제대로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로 남기혁의 손아귀에 산산이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배려 없이 압박하는 어마어마한 힘이 준성의 숨통을 조였다.

카강-!

힘없는 준성의 손에서 떨어진 마체테가 지면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구르고 굴러, 주인 잃은 군용 단검과 그 끝을 맞대었다.

준성은 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제 머릿속을 파고드는 지독한 꿈속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잊고 싶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기억이 준성의 호흡을 틀어막았다.

“허억, 헉…! 으, 아…!”

어깨의 통증조차 잊었는지, 준성의 두 손이 남기혁의 손아귀를 풀어내고자 아등바등했다. 손톱을 세워 남기혁의 손을 긁어대고, 머리를 비틀어 마구 움직여댔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꿈속에서 목이 졸렸을 때와 달리, 금방이라도 숨을 끊어버릴 것 같은 무자비한 압박감은 준성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남기혁은 피에 물든 오른쪽 눈을 아예 뜨지도 못한 채, 오직 왼쪽 눈으로만 준성을 노려보았다.

“이것만은 안 돼, 준성아…. 절대 안 돼….”

빠르게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준성은 자신의 목을 틀어쥔 남기혁이 차마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공포에 질려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죽을 날이 코앞에 다가온 사람처럼.

“하…악…-!”

남기혁의 손아귀에 한층 강한 힘이 더해졌다. 준성의 눈동자가 저절로 위를 향하고,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아무 호흡도 오고 가지 못했다.

“역시 너한테는 이게 제일 좋겠어.”

남기혁의 광기 어린 살기가 초점을 잃고 죽어가는 준성의 두 눈에 그늘을 드리웠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형이 예쁘게 잘라둘게. 이젠 ‘제대로 된 꿈’도 꿀 수 있을 테니까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강한 약도 놔줘야지.”

실실 웃기 시작한 남기혁의 손아귀가 준성의 목에 열을 더했다.

“하아…, 꿈 따위보다 현실이 백배 나아. 이젠 아파서 꿈틀거리는 것까지 느낄 수 있잖아.”

강준성의 목숨이 제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게 체감되기 시작하니, 공포에 떨던 게 언제였나 싶을 만큼 기분 좋은 전율이 일었다.

꿈속에서는 혹여나 강준성을 죽이더라도 그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으면 다신 볼 수 없어.’

그 불안한 사실이 도리어 희열이 되어 남기혁을 자극했다.

강준성의 진정한 삶과 죽음, 모두가 제 것이다.

자신의 삶과 죽음(기억)을 전부 강준성이 쥐고 있는 것처럼.

그때.

삐-삐-삐-삐-!

갑자기 옥상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란 남기혁이 급히 주변을 살폈다.

소리가 난 곳은 옥상의 입구였다. 정확히는 옥상 문에 뭔가가 붙어 있다.

그것은 남기혁이 1층에서 맞닥뜨렸던 출입 감지용 기계와 닮아 있었다. 센서를 작동시켜서 움직임을 감지하면 소리를 내는 방식과 달리, 그건 리모컨으로 소리를 낼 수 있는 장치인 듯했다.

남기혁은 그제야 준성이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강제로 꺼내 보니, 역시나 하얗고 작은 리모컨을 쥐고 있다.

“하, 별걸 다 준비……!”

쾅-! 쾅쾅-!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남기혁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크아악-!

캬학-!

문 너머로 좀비들의 괴성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반응한 좀비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문으로 돌격하는 바람에 벌써 문이 푹푹 패이기 시작했다.

이 건물의 옥상 문은 그리 튼튼하지 않았고, 방음 역할 또한 형편없었다. 기껏해야 흔한 사무실 문짝 정도의 경도일까.

그걸 이미 알고 있었던 준성은 마지막 수단으로 ‘좀비들’을 준비해두었다.

남기혁이 5층에서 수류탄을 쓴 건 예상외였지만, 폭음의 수와 그가 알려준 파괴력,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본 폭발 범위를 고려했을 때, 아직 5층에는 상당한 수의 좀비들이 남아 있으리라 판단했다.

준성의 예측대로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몰려온 좀비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쾅-! 쾅-!

격렬한 타격이 이어졌다. 곧이어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문손잡이가 툭 튀어나와 떨어져 버렸다.

직후, 강한 충격을 받은 옥상 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입구가 훤히 뚫려버렸다.

카아!

으어어-!

소리를 듣고 몰려든 좀비들은 금세 목표물을 찾아냈다. 밝은 하늘 아래, 옥상 한가운데 서 있는 두 명의 살아있는 인간은 그들에게 있어 최우선 목표였다.

5층의 어둠 속을 뚫고 나온 좀비들이 준성과 남기혁을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그들의 피 묻은 이빨이 그 어느 때보다 흉악하고 끔찍하게 빛났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좀비들을 보며, 준성은 제 입꼬리를 보기 좋게 비틀어 올렸다.

좀비들에게 물려 죽는 개죽음이라도 각오한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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