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함정이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남기혁은 준성을 더욱 압박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음에도 단검을 거두고 허리를 뒤로 튕기듯 젖혔다. 간발의 차로 그의 오른쪽에서 날아든 무언가가 앞섶을 베듯이 훑으며 훅 지나갔다.
“읏!”
분명 날아든 무언가를 피했음에도 앞섶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남기혁은 자신의 가슴팍에 닿아 셔츠를 태우고 있는 작은 불에 흠칫했다. 다행히 단검 쥔 손등으로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꺼져버릴 만큼 작은 불씨였다.
하지만 안심할 여유는 없었다.
틱-, 틱-, 틱-.
움직일 때마다 자꾸만 발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오른쪽에서 불에 휩싸인 뭔가가 날아와 부딪히려 들었다.
유연하게 피하다가 몇 개는 단검으로 강하게 쳐내었다. 그중 하나가 지척에서 바닥을 굴렀다.
‘캔?’
남기혁은 그제야 자신을 공격하던 덩어리가 웬 깡통들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고 단순히 빈 캔이 대뜸 불을 뿜고 있던 건 아니었다.
캔의 표면에는 두 개의 일회용 라이터가 붙어 있었고, 몸을 반으로 가르듯이 짙은 회색의 스틱 폭죽이 둘려 있었다. 불은 바로 그 스틱 폭죽의 끝에서 시작되어 라이터의 표면을 불태웠을 테고, 당연히 안에 들어있던 가스와 닿아서 제법 위협적인 불을 내게 된 것이다.
다리에 닿은 끈은 폭죽의 끝에 불을 붙이는 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캔을 고정하고 있던 줄이 폭죽이나 라이터의 불길에 녹아서 끊어지면 지금처럼 매섭게 발사되는 구조다.
이런 부비트랩까지 준비해놨을 줄이야.
‘가끔 난 네가 머리 쓰는 게 무섭단 말이지.’
날아오는 물건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죽이기 위해’ 반격을 개시한 마체테의 칼날을 피해내며 발목 언저리 높이의 함정들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강준성은 그가 설치한 함정들을 실로 놀라울 만큼 모조리 피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남기혁이 투명한 줄을 건드릴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강준성을 얕보고 있었다.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것쯤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걸 활용했던 건 어디까지나 좀비들을 상대할 때였다. 3층에 설치된 함정도 그렇고, 지금 이 트랩들도 직접 당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준비된 함정.
남기혁은 자신이 강준성에게 특별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들을 보며 전신이 기분 좋게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보통은 ‘좀비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걸 기분 나빠해야 할 테지만.
“준성아, 사랑해.”
대뜸 날아온 남기혁의 고백에 준성의 눈꼬리가 못마땅하게 꿈틀했다.
대꾸해줄 가치조차 느낄 수 없는 말을 마체테의 묵직한 칼날로 베어버리려던 찰나.
남기혁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불덩이를 쳐내며 준성에게 올곧게 달려들던 것과 달리, 단순하던 다리의 움직임이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단검을 휘두르는 방향과 공격 루트를 바꿔서 준성을 제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남기혁이 움직임을 바꾼 그 순간부터 불덩이는 단 하나도 날아오지 않게 되었다.
준성은 남기혁의 공격을 버겁게 막아내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남기혁은 그새 함정이 설치된 패턴을 알아채 버린 듯했다.
바닥에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는 함정은 사실 그리 다양하게 얽혀있는 게 아니었다.
예측불허한 패턴으로 얼기설기 만들려면 그만한 도구와 재료들, 그리고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 하나 만족스러울 정도로 넉넉지 않았기에 함정을 준비하는 데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런 짧은 시간 동안 패턴을 모두 읽고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기혁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최소한 그의 ‘집착’에 좀 더 주의했어야 했다.
남기혁은 자신의 발아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오직 강준성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남기혁은 강준성의 움직임을 통해 그가 어떻게 움직이며 함정을 피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덕분에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함정이 설치된 루트를 파악할 수 있었고 지금은 단 한 줄의 낚싯줄도 건드리지 않은 채 매서운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집착적으로 본다 했더니만, 남의 움직임을 기억해서 함정을 손쉽게 피해버릴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아까운 함정만 잃어버린 ‘손해’뿐이었던 건 아니었다.
‘역시 이상해.’
준성은 남기혁의 안경 쓴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안경이 익숙하지 않은 건가? 아니, 그걸 떠나서 초점이 잘 안 맞는 것 같은데.’
남기혁의 공격은 굉장히 예리하고 무겁다. 그건 꿈속에서 남기혁과 함께 좀비들을 상대할 때 충분히 깨달은 바였다.
그런 그의 공격이 가끔 미세하게 어긋났다. 단순히 자신을 상처입히기 위해 무작위로 공격하는 것뿐이라면 이런 걸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남기혁은 집요하게 자신의 왼쪽 어깨를 노렸다. 물론 아까 깊이 베였던 것 때문에 왼팔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니, 남기혁으로서는 크게 반항할 수 없는 그 부위에 집착할 만도 했다.
남기혁의 성격이라면, 그의 당초 생각대로 팔다리를 잘라내는 것 외에는 불필요한 상처를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알아챌 수 있었다. 왼쪽 어깨를 노리는 그의 공격 속에서 번번이 예리함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생각은 남기혁이 자신의 발아래를 보며 함정을 피하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것과 연결되었다.
함정이 설치된 자리는 옥상의 창고가 길게 그늘을 드리운 곳이었다.
아직까진 햇볕이 짱짱한 낮이었다. 투명한 낚싯줄이라 하더라도 빛을 받으면 눈에 확 띄기 마련이라, 함정을 만들려면 필시 그늘이어야만 했다.
함정 속에서 바닥에 거미줄처럼 늘어진 낚싯줄을 피하기 위해선 움직임이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요란하게 움직였다가는 어디에 어떻게 펼쳐져 있을지 모를 낚싯줄을 자꾸 건드려서 본인만 위험해질 테니까.
단순해질 움직임, 그리고 함정을 피하고자 자연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될 찰나의 순간들.
그때를 노려 남기혁을 공격하려 했던 건데, 그는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방법으로 위기를 넘겨버렸다.
그건 준성에게 미쳐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그늘 속에 숨어있는 낚싯줄을 분간하는 게 상당히 어려웠을 테니까.
준성은 남기혁의 시력이 그가 쓰고 있는 안경으로조차 커버하지 못할 만큼 나빠졌다는 걸 확실히 알아챘다.
‘그렇다면……!’
준성은 남기혁의 단검을 쳐내며 밝은 빛 아래로 튀어나왔다. 그러고선 한쪽 끈만으로 어렵사리 어깨에 매달려 있는 백팩 안으로 왼손을 집어넣었다.
“으윽!”
부상 당한 어깨가 시큰한 통증을 퍼뜨렸다. 아픈 신음이 절로 나오고 팔이 덜덜 떨렸다.
멀쩡한 오른손으로 백팩을 뒤지기 위해 마체테를 버렸다가는 아무것도 못 해보고 남기혁에게 당장 붙잡혀버릴 게 뻔했다. 그래서 피가 줄줄 흐르는 왼팔을 뒤로 꺾어, 백팩 안을 뒤졌다.
준성의 손에 붙잡혀 나온 것은 여분으로 만들어뒀던 연막탄 두 개였다. 아까 바닥을 굴러다니던 캔의 작은 불길에 심지 끝을 스치듯 대어서 불을 붙이고는 자신의 뒤쪽 좌우에 던져버렸다.
“또 뭘 하려는 거야?”
그새 속삭일 정도로 달라붙은 남기혁이 단검을 쳐올렸다. 준성이 급히 마체테의 검면을 방패 삼아 제 어깨를 노리는 검 끝을 막았다.
“아악-!”
워낙 강한 힘이 실려있는지라, 단검을 막던 마체테의 검면이 어깨의 베인 부분을 사정없이 짓누르게 되었다. 당연히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고, 입에서는 참고 싶어도 참을 수 없는 비명이 터졌다.
“아파? 많이 아파? 미안해. 근데 더 아파질 것 같은데 어쩌지?”
남기혁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투로 말하며 낮게 웃었다. 분명 눈가는 울상을 짓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는데 입가는 희열에 취한 것처럼 웃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또라이 같다.
“미친, 새끼가……!”
“응, 미쳤지. 너한테 미쳤어.”
욕을 해줘도 좋다고 웃고 있다.
그때, 준성의 뒤쪽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뒤쪽에 던져둔 연막탄에서 나는 소리였다.
준성이 남기혁을 강하게 밀쳐내자마자 연막탄의 연기가 몸을 감쌌다. 바람의 방향을 고려하여 던져둔 연막탄은 준성의 생각대로 바람과 함께 그를 가장 먼저 잡아먹었다.
두 개의 연막탄이 내뿜은 큼지막한 연기는 준성을 완전히 삼킨 후에야 남기혁에게로 손을 뻗고 있었다.
남기혁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흐릿한 시야에 연기가 더해지니 도저히 준성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대충 기척을 따라서 검을 휘둘렀다가는 준성의 몸에 쓸데없는 상처가 생겨버릴 수 있다.
그 작은 머뭇거림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남기혁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