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74)화 (174/240)

- 174화 -

“크윽!”

작은 폭발에 휘말린 남기혁이 몸을 웅크리며 쓰러졌다. 놓쳐버린 라이터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기혁은 라이터를 쥐었던 왼팔이 단숨에 타들어 간 듯한 고통을 느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분진 폭발에 휘말린 건 왼팔 하나였다. 남기혁이 본능적으로 팔을 쭉 뻗어서 폭발 위치와 몸을 최대한 떨어뜨려 놓은 덕분이다.

라이터의 불꽃이 작아서 파괴력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왼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팔은 물론이거니와 어깨조차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큰 화상을 입었다. 벗겨진 피부 사이로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났다.

“윽….”

남기혁의 잇새로 고통을 참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꿈속이나 현실이나, 폭발에 휘말린 육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남기혁은 이딴 고통에 신경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웅크렸던 몸을 화들짝 일으킨 남기혁이 멀쩡한 오른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씨발, 병신같이 놓치기나 하고.”

자책하며 내뻗는 그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초조하고 급했다. 왼팔의 부상보다도 바닥을 메운 밀가루를 헤집는 게 그에겐 더 중요해 보였다.

급하게 더듬어대던 그의 손끝에 차갑고 딱딱한 작은 물건이 닿았다. 그제야 남기혁의 얼굴이 한숨과 함께 훅 풀렸다.

찰칵.

손에 잡힌 라이터를 켜보자, 다행히 작은 불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자욱하던 밀가루는 그새 다 가라앉아, 더는 폭발하지 않았다.

남기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라이터를 이리저리 살폈다. 새까만 그을음이 생겨버린 뚜껑 부분과 불꽃을 감싼 사각 틀이 약간 녹은 것 외에는 달리 큰 이상은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왼팔과 비교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미약한 피해였으나, 남기혁은 그마저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처럼 준성이가 준 건데 아깝게…….”

강준성에게 라이터를 받았던 건 꿈속이었다. 현실에서는 직접 인한시를 뒤져서 찾아온 별거 아닌 라이터에 불과했건만, 남기혁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사람처럼 그게 강준성이 선물해준 거라고 믿고 있었다.

라이터를 손에 꼭 쥔 채 몸을 일으킨 남기혁은 작은 불빛에 비친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이어 천장 또한 올려다보았다.

다른 에스컬레이터로 향하기 위해 좌측으로 나아갈 걸 충분히 예측하고 설치해 둔 투명한 낚싯줄은 벽을 타고 저 높은 천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주변에 널린 밀가루 사이사이와 천장에도 남아 있는 얇은 고무 조각들로 봐선, 밀가루를 담은 풍선이 낚싯줄에 연결된 뾰족한 뭔가에 찔려서 터진 게 확실했다.

‘하여튼 이런 것도 잘 만든단 말이지.’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전율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어둠 속을 휴대폰의 불빛이라든지 손전등 같은 걸 이용해서 시야를 확보하려 들었을 것이다. 맹인(盲人)이 된 좀비들이 그 불빛에 이끌려서 달려들 것이라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하지만 강준성은 남기혁이 ‘라이터’를 쓸 거라는 걸 완벽히 예측하고 있었다.

꿈을 기억하고 그 안에 녹아든 경험치를 갖고 있는 남기혁이라면.

그리고 이때껏 꿈에서 보여온 남기혁의 성격과 신중함을 생각해, 좀비들이 그득하게 숨어있는 건물 안에서 환한 빛을 선택하는 것만은 반드시 피했을 거라 여겼다.

강준성의 예상대로, 남기혁은 환한 빛이 아니라 좀비들이 잡아내기 어려운 자그마한 불빛을 택했다.

좀비들을 배치하지 않은 것도 분진 폭발을 염두에 둔 강준성의 계획이었다.

좀비들이 배회하다가 낚싯줄을 건드리지 않게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기혁의 심리였다.

아래층에서 남기혁은 그에게 달려오는 좀비들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그때마다 사진기의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처럼 아주 짧게 라이터를 껐다 켜는 식으로 시야를 확보해왔던 남기혁으로서는 너무나 비교되는 3층의 고요함에 의문을 품는 게 당연했다.

막연한 기척에만 의존할 순 없으니 바로 직전에 행했던 시야 확보의 방법을 활용할 수밖에 없을 터.

그전처럼 찰나의 시간 동안 빛을 내는 게 아니라, 고요한 주변과 발밑을 충분히 살필 수 있을 정도의 확고한 불빛을 켰다. 그로 인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던 미세한 입자가 뜨거운 불길에 닿아, 작지만 제대로 된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분진 폭발은 그렇게 강준성의 계산 속에서 남기혁의 왼팔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마도 그가 바랐던 건 팔과 함께 머리까지 날아가 버리는 거였겠지만.

남기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준비할 수 있는 함정.

그게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 줄이야.

낮게 웃는 남기혁의 뒤로,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기어 올라오는 좀비들의 위세가 강해졌다. 그리 크진 않아도 폭발음이 들린 건 분명했기에, 예민한 귀로 낯선 소리를 잡아낸 좀비들이 진원지를 향해 물밀 듯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남기혁은 라이터를 켠 채로 다른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달렸다. 바로 지척에 있지 않은 이상에야 이 정도의 불빛을 좀비들이 눈치챌 리 없었다.

강준성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불꽃에 의존한 채, 남기혁은 다음 스테이지로 향하는 새로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4층은 1층과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소리를 이용한 함정이 가득했다.

다만 1층과 달리, 이번엔 어딘가로 유인하여 원하는 길로 이끄는 일 따윈 없었다.

오직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수밖에 없도록 사방에서 요란한 소리를 터뜨렸고, 이에 반응한 좀비들이 미로 같은 복도를 달렸다. 남기혁은 마지막 5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앞에 두고도 좀비들에게 쫓겨 이리저리 길을 바꿔가며 숨 가쁘게 움직여야 했다.

뒤쫓아오는 무리를 따돌리고 앞길을 막는 좀비들을 단검 하나로 베고 또 베어 쓰러뜨린 끝에, 결국 마지막 층인 5층에 다다랐다.

“하….”

5층에 다다른 남기혁은 라이터에 비친 정면을 보자마자 기가 찬 듯이 작게 웃었다.

상가나 사무실이 아니라 공터처럼 뻥 뚫린 형태의 카페테리아.

그곳에는 암담할 정도로 많은 좀비가 가득 차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던 좀비들은 4층의 소란에 더욱 빼곡하게 모여들어 있었고, 그들 너머 멀리에는 휘적거리며 배회하는 실루엣들이 보였다.

얼핏 봐도 뚫고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없다.

라이터를 끄고 어둠 속을 감각적으로 나아간다 한들, 좀비들은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과 명백히 다른 체온과 생기를 가진 인간을 잡아내고 말 것이다.

더군다나 분진 폭발에 의한 왼팔의 부상이 꽤나 심각했다.

아래층에서 달려 올라오는 지금까지도 차마 들지 못할 정도로 왼팔의 통증은 여전했고, 벗겨진 피부 밖으로 흘러나온 피는 도통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손끝에 맺힌 따뜻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몇 분, 아니, 몇 초 후면 저 좀비들이 분명 이 피 냄새를 맡고서 게걸스럽게 달려들지 않을까.

마치 강준성이 그들을 빌어 말하는 것 같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그냥 죽으라고.

‘그럴 수야 없지.’

조금만 더 가면 네가 있는걸.

남기혁은 통증도 무시한 채, 피투성이가 된 왼손으로 라이터를 꽉 쥐었다. 근육이 움직이며 더해진 고통은 강준성과의 만남을 코앞에 둔 그의 기백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 * *

서늘함을 넘어 춥다고 느껴질 정도의 찬 바람이 부는 5층 건물의 옥상 한복판.

강준성은 단단히 닫힌 건물 안으로의 문을 부릅뜬 두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까지 온 거지?’

남기혁이 그의 부하들을 두고서 홀로 건물 안에 들어왔다는 건 옥상에서 입구를 내려다보았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남기혁이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문 너머는 아직까지 고요했다.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남기혁이 건물 안에 들어온 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다. 일반인이었다면 지금쯤 자신이 배치한 함정과 수많은 좀비로 인해, 죽어도 열댓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남기혁이다.

결코 쉽게 죽을 자가 아니었다.

‘3층 정도 왔으려나.’

분진 폭발을 준비해뒀으나 옥상에서 3층의 소란을 듣는 건 불가능했기에, 잘 작동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상 그쯤 오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

‘그전에 죽었을 수도 있어.’

사실 2층에서 이미 죽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4층이나 5층만큼은 아니어도 2층 역시 상당히 많은 수의 좀비를 배치해두었다. 게다가 어둡긴 해도 빛이 들던 1층과 다르게 2층부터는 갑작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짙은 암흑으로 가득했다. 본능에 가까운 빠른 반응이 아니라면, 남기혁이 밟고 올라왔을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포위하듯 몰려오는 좀비들 사이를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남기혁이 살았을지 죽었을지를 가늠하던 준성의 귀에, 갑자기 먹먹한 폭음이 들렸다.

쾅-!

흠칫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쾅-! 쾅-!

약간의 공백을 둔 연이은 폭음을 들으며, 준성은 하얀 얼굴 가득히 긴장을 담았다. 등허리에 매여 있던 마체테를 꺼내 들 즈음엔 닫혀 있던 문이 진동할 정도로 폭음이 가까워졌다.

이윽고.

끼익-

닫혀 있던 옥상 문이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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