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남기혁은 손에 든 알림 기계를 화초에 다시 끼워 넣으며 자리를 박찼다. 알림음을 당장 꺼버린다고 한들, 어차피 좀비들이 이곳까지 달려오는 건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걸 이용해서 좀비들을 한 곳에 유인하는 게 낫다.
남기혁이 선 자리는 상가 1층의 중앙,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네 개의 사각 매장을 낀 십자로(十字路)였다. 멀리서 달려오는 좀비들의 괴성과 발소리, 빛을 등지며 드러나기 시작한 그들의 모습을 보니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본능적으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 곳에서 달려오는 좀비들을 피해, 유일하게 아무 괴성도 들리지 않는 옆길로 내달렸다.
어찌 되었든 남기혁이 가야 할 곳은 강준성이 기다리고 있을 옥상이었다.
방향으로 봐선 좀비를 따돌리며 빙 돌아가게 생겼지만, 옥상까지 가기 위한 길은 중앙에 있었다.
척 보기에도 꽤 잘 나가는 상가 건물이니,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으니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에스컬레이터쯤은 계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어렴풋한 어둠이 깔린 상가 중앙에서 긴 에스컬레이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상계단도 당연히 있겠지만, 강준성이라면 그쪽부터 막았을 테니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만약 강준성이 그답지 않게 비상계단을 멀쩡히 내버려 뒀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이용할 일은 없을 거다.
‘날 위해 준비해준 거잖아. 당당히 즐겨야지.’
가슴이 기분 좋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다리 근육에 좀 더 힘을 가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어 놓은 여러 매장과 호객용 스탠드 간판 같은 장애물이 앞길을 방해했지만, 워낙 날렵하고 발이 빠른 편이라서 뻥 뚫린 길을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빠르게 달리면서 중앙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길로 몸을 꺾자, 벽에서 갑자기 또 다른 알림음이 들렸다. 다른 매장에서 떼어온 건지, 이번 알림음은 같은 싸구려 음향이긴 해도 다른 노랫소리였다.
캬아악-!
새로운 벨 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또다시 좀비들의 괴성이 들렸다. 아까 모였던 좀비들이 소리를 따라 뒤에서 남기혁을 쫓아오고, 다른 곳에 퍼져 있던 새로운 시체들이 좌우 길을 막듯이 달려들었다.
정면의 길만 뻥 뚫려 있기에, 또다시 안전한 외길을 달려나갔다.
이후로도 같은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남기혁의 뒤를 쫓는 좀비의 수는 금세 먼 뒤쪽까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많아졌다.
양치기 소년이 개를 풀어 양을 몰듯, 어느새 남기혁은 강준성이 짜놓은 판 위에서 1층의 모든 좀비를 꼬리처럼 달고 다니게 되었다.
상가 사이의 좁은 길에서 좀비를 하나하나 상대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법한 어마어마한 수였다.
게다가 이 1층 안의 상가들은 손님 몰이를 위해 대부분 통유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줄로 줄 세워 상대한다고 해도, 이 성격 급한 좀비들이라면 유리까지 다 부수고 달려들 터였다.
“하핫, 망할.”
어쩔 수 없이 내달리며 상큼하게 웃었다. 자신을 위해 이 판을 짜고 있었을 강준성을 떠올리니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한편으로는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가 이 좀비들을 무사히 동원할 수 있었던 수단, 방어책을 확보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그것부터 망가뜨려야지.’
방어책 따윈 있으면 안 된다. 강준성이 희망을 품을 물건 따위, 모조리 없애버려야 했다.
좀비로 가득해진 지옥 같은 세상에서 널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해결책은 나밖에 없어.
나만 봐.
강준성의 사지를 잘라내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사실을 뿌리 깊이 박아넣어야 했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딴 곳에서 맥없이 당할 순 없었다.
우르르, 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들을 이끌며 중앙으로 달려간 남기혁이 재빨리 에스컬레이터를 밟았다.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처럼 두 칸씩 뛰어오르며 뒤를 살피니, 사람 두 명이 나란히 서면 약간 비좁을 정도의 입구가 무식한 좀비들로 꽉 채워졌다.
한 칸씩 뛰어 올라가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조차 못 하는 좀비들은 첫 번째 칸에 다들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그렇게 쌓인 좀비들의 몸이 평평한 오르막길을 만들어 주었기에, 뒤쪽에 있던 좀비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급하게 밟거나 기어서 기혁의 뒤를 쫓았다.
비좁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뒤쫓는 속도가 현저히 늦어진 탓에, 남기혁은 벌써 2층에 다다라버렸다.
‘여긴 어둡네.’
2층을 둘러본 남기혁이 눈가를 찌푸렸다.
1층은 대부분의 매장이 통유리로 되어있었기에 그 너머의 창문을 통해 어느 정도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시야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2층부터는 통유리로 된 매장보다 사무실의 비중이 훨씬 컸기에 중앙까지 거의 빛이 닿지 않았다.
‘차라리 눈이라도 좋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시력이 마이너스까지 떨어진 상태였고 안경마저 제 눈에 딱 맞는 맞춤이 아니었다. 안경을 써도 답답함이 느껴지는 시야인데 사방이 어둡기까지 하니 이대로는 제대로 나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좀비들이 이런 기분이겠지.’
관찰자가 되기 이전.
강준성처럼 꿈속을 무한히 회귀하며 좀비들에게 끝도 없이 물려 죽었던 때가 떠올랐다. 관찰자가 된 뒤로는 그마저도 직접 체감할 수 없었고 그저 엿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기에, 꽤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좀비에게 물려서 숨이 끊어져 가던 그 짧은 시간.
회귀의 대가로 ‘고통’을 잃어버린 강준성과 달리, 남기혁에겐 그때가 가장 끔찍했다. 머리가 깨지든, 누군가의 칼에 찔리든, 활활 불타 죽든, 그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죽은 자들에게 조각조각 뜯어먹히다니.
좀비들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제 살갗을 찢고 근육을 씹었다. 극상의 진미라도 앞둔 것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또 먹었다. 배를 채우기 위한 게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을 뜯고 씹어야 한다는 것만이 본능으로 남아버린 그들은, 뜯어낸 것 대부분을 찢긴 입가 사이로 줄줄 흘리고 떨어뜨리면서도 또다시 이빨을 박았다.
죽은 자들이 온몸의 살점을 뜯어내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동안, 몸속을 돌아다니던 피의 흐름이 느려지는 걸 느꼈다. 그러다 머지않아 몸 곳곳이 제 의사와 상관없이 펄떡거리고, 마지막으로 머리가 이상해진다.
두 손으로 뇌를 꽉 쥔 채로 터뜨릴 것처럼 압박하듯 주물러 대는 느낌이 그야말로 끔찍하다. 그걸 느낀 순간, 머리를 구성한 세포와 피부까지 전부 피로 채워버릴 것처럼 차오른 뭔가가 또 다른 고통을 선사한다. 망치로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듯한 정신없는 자극에 억억,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때쯤엔 머리에 몰린 피가 안구까지 뒤덮어버린다. 시야를 핏빛의 어둠으로 감싸버려, 눈앞에 있는 자가 사람인지 좀비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고작해야 어렴풋이 움직이는 실루엣을 잡아내는 게 전부다.
딱 지금처럼.
“씨발.”
나직이 욕설을 내뱉는 남기혁의 입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의 흐릿한 시야 너머,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는 좀비들의 괴성을 듣고 몰려온 2층의 무리가 보였다. 어둠 속을 가차 없이 휘적거리는 움직임과 시끄러운 괴성을 듣고서 그들이 좀비라는 걸 분간해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좀비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소리,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이 흘리는 피 냄새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둠에 눈이 익고 나면 실루엣 정도는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지만, 남기혁 본인이 붉은 피막에 뒤덮인 눈으로 어둠 속을 돌아다녀 봤던 적이 있었기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같은 회귀자 출신의 강준성 또한 모를 수가 없다.
‘하여튼 머리 좋아.’
강준성도 1층에서 남기혁이 죽어버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남기혁의 피지컬을 감안하여 그와 놀아보려는 것처럼 양몰이 따위를 했지만, 결국은 그 무리가 비좁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삐끗할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좀비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었다.
목표를 쫓는 좀비들은 시끄럽다. 성대가 부서질 정도로 괴성을 질러대며 살아있는 인간을 뒤쫓는다.
괴성은 바이러스가 내리는 명령이다.
근처에 있는 좀비들에게 자신들의 동지가 될 대상을 발견했으니, 어서 빨리 이빨을 박아 넣자고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지금처럼, 에스컬레이터에 다닥다닥 붙어서 올라오기 바쁜 무리가 괴성을 질러대는 통에 2층의 좀비들이 눈치채버렸다. 그 괴성이 들리는 위치 근처에 타깃이 있다고.
어둠 속을 배회하던 2층의 좀비들이 일제히 소리를 쫓아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좀비들처럼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남기혁이 의존할 수 있는 건 이제 청력뿐이다. 도망칠 길 없이 빼곡하게 몰려 들어버리면 제아무리 청력이 좋다 해도 도망칠 수 없게 된다.
포위되면 그야말로 끝이다.
바이러스를 품은 자들은 같은 바이러스를 품은 자를 공격하지 않게 되니, 유일하게 공격 가능한 대상인 남기혁에게 모두가 이빨을 박아 넣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쉽게 당할 남기혁이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