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네가 어린…….”
‘네가 어린애냐?’라고 핀잔을 주려다가 멈칫했다.
도한서는 어릴 때부터 지하 연구실에 감금되어 그의 양부모가 하라는 대로 감정 없이 순종하고 질질 끌려다녀 왔다. 그랬던 그가 과연 누군가에게 이처럼 투정을 부릴 틈이나 있었을까.
강준성이니까.
제 입으로 ‘주인님’이라 칭할 정도의 남자니까, 그에게만큼은 떼를 쓰게 되는 거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본능적으로 어떠한 투정이든 모두 받아줄 거라 확신하는 평범한 어린아이들처럼.
게다가 그 투정의 원인이 제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라니.
‘나도 미쳤지.’
도한서의 단순하고도 투명한 감정이 덮쳐오자,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한 투정이 도한서의 충동적인 감정으로 뒤섞인 결과물이라 해도 그 끝이 오직 ‘강준성에게만’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배 속 어딘가가 저릿저릿한 감각에 짜릿했다.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온 열기를 느끼며, 준성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도 모자라 눈까지 돌려버리니, 이에 한서가 눈꼬리를 꿈틀한다.
“무슨 생각 해?”
“…아무것도.”
준성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서는 입을 가린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아 뗐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웃고 있냐고.”
“아….”
입을 가린 손이 떨어져 나가자, 기껏 가리고 있던 입매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얼른 입꼬리를 내렸지만, 준성의 턱을 잡은 한서의 엄지 끝이 더 해보라는 듯이 입가를 꾹 눌렀다.
한서의 손을 급히 떼어낸 준성이 얼른 표정을 정돈했다.
“부탁 안 들어줄 거야?”
“떨어져야 하는 게 전제 조건이라면.”
“…….”
단호한 도한서를 바라보며 준성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턱을 들었다.
“다녀오면 산책시켜 줄게.”
자신의 개에게 거만 떨며 산책을 제안하는 주인님처럼, 준성은 한서가 무시할 수 없는 기묘한 위압감을 풍겨 보였다.
“까짓거, 원하는 대로 같이 산책 가주면 될 거 아냐.”
“흐음.”
한서의 단호하던 눈이 누그러졌다.
“내 산책 범위는 꽤 넓은데.”
“상관없어.”
준성으로서는 어떻게든 도한서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게끔 만들어야 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할 때였기에, 새로운 플랜을 짜려면 당장 남기혁과의 결판부터 어그러질 판이다. 나아가, 다른 방법을 동원해 버스팀과의 연락법을 만들고 그들의 루트를 한시바삐 변경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준성은 도한서가 결국 제 말에 따라줄 거라 믿었다. 그의 감정과 욕구는 아주 단순하기에, 제 쪽에서 어느 정도 맞춰주기만 하면 미리 갖춰진 플랜을 뒤엎어버린다는 선택지는 절대 고르지 않는다.
강준성에게 미움받고 버려지게 될까 봐.
‘내가 그러겠냐?’
도한서를 버려두고 간다는 선택지 따위, 있을 리가 없는데.
“좋아.”
한서의 입에서 그제야 승낙의 말이 흘러나왔다.
한서도 준성의 부탁을 끝까지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싫어’라고 내뱉자마자 다시금 자신을 설득하는 걸 보고 곧바로 깨달아버렸다.
이제껏 준성의 플랜에 두말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왔던 도한서다. 그런 그가 단호히 거절했음에도 거듭 부탁을 해왔다. 그것만 봐도 이미 강준성의 플랜에는 도한서의 승낙이 기본 전제로 깔려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본 전제를 비틀어버리면 강준성은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테고, 그 결과물을 감당해야 하는 건 역시나 그가 된다.
영악하게도, 강준성은 ‘일부러’ 대비 플랜을 짜두지 않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바로 곁에서 움직이고 있는 도한서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강준성에게 대비 플랜이 없다는 걸 알기에, 한서는 결국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저 스스로 준성의 플랜을 망쳐버린다는 건, 그에게 있어 자신이 ‘방해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강준성을 따라 하듯 ‘일부러’ 튕겨보았다. 기왕 노림수에 넘어가 줄 거, 주인님에게 합당한 대가라도 요구해볼 생각이었다.
그 대가가 곧 ‘산책’이라는 뭉뚱그린 단어다.
‘그 정도는 괜찮잖아?’
한서는 자신의 투정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간 걸 확인하며 눈을 흘겼다.
“내 산책은 좀 까다로울 거야, 주인님.”
준성은 그저 도한서가 제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그리고 올 때 한 가지 더 부탁이…….”
“산책 두 번.”
“…알았어.”
준성은 한서를 향해 집요한 새끼라며 눈을 흘기고는 끊겼던 말을 이었다.
준성을 홀로 놔두고 차를 몰아야만 했던 때를 떠올리던 도한서는 머지않아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깨끗한 몸으로 샤워실을 나섰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군인들의 숙소에 들러, 누구의 것인지 모를 외출용 검은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었다. 세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비릿한 피 냄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제법 상쾌한 내음이 났다.
밖으로 나와보니 버스에는 두 명의 사람과 운전수만 남아 있었다. 세 명 모두 장대욱의 일행이었다.
나머지는 알려준 대로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다른 건물로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만일을 대비해 버스에 사람들을 남겨둔 건 정답이었다. 그래야 외부 정찰도 가능하고,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뛰쳐나왔을 때 곧바로 태워서 출발할 수도 있다.
다른 건물에서 태평하게 샤워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온 도한서를 발견한 세 사람이 저마다 긴장한 얼굴로 경계심을 보였다. 좀비를 맞닥뜨리던 때보다 더욱 겁을 내는 것도 같았다.
사람 얼굴은 지금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강준성과 깊이 연관된 자들의 얼굴은 모두 외우고 있었다. 저들은 기억에 없는 얼굴들이니까 당연히 장대욱의 사람들이겠거니, 그리 생각할 뿐이다.
한서는 그들의 껄끄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불쾌감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남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관심도 없다.
양부모의 ‘명령’에 따라,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되도록 버릇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타인에게 조금이나마 맞춰주려는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짓에 굳이 신경을 쏟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신경 써야 하는 건 이제 이 세상에 강준성, 딱 하나뿐이니까.
타고 온 검은 세단으로 향하며, 도한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주인님은 이 개새끼 마음을 알까 몰라.”
송두리째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온 신경을 이 먼 곳에서까지 여전히 독점 중이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잠시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급해진다.
운전석에 올라탄 한서는 조수석에 던져놨던 검은 재킷을 들었다. 수많은 좀비를 학살할 때 피에 젖을 걸 우려해서 일부러 벗어두고 갔는데, 그래도 그전까지 묻었던 게 있어서인지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연구소에서 살인을 시작한 이후로 언제나 자신의 체취처럼 느껴지던 피 냄새인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상당히 껄끄러웠다.
피 냄새가 나는 재킷을 차창 밖으로 홱 던져버렸다. 아무래도 강준성에게 피 냄새를 묻힐 순 없으니, 가는 길에 새 재킷이라도 하나 구해서 입어야겠다.
차의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킨 한서는 준성을 내려줬던 위치까지의 경로를 확인했다.
이제 준성이 맡긴 ‘다음 미션’을 수행할 때다.
* * *
연막탄의 연기가 높이 피어오르던 건물 앞.
차례차례 도착한 검은 차량과 승합차들이 길가에 줄지어 늘어섰다.
건물 앞에 서서 유리문에 붙어 있던 휴무 공지를 바라보던 남기혁이 제 옆에 서 있던 우석진에게 말했다.
“들어가는 건 나 혼자야.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해.”
“그럴 순 없습니다.”
우석진을 필두로, 다른 부하들 역시 단호한 얼굴을 했다.
“뻔히 함정 파 놨을 걸 아는데, 어떻게 형님을 혼자……!”
“석진아.”
삐딱하게 고개를 돌린 남기혁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함정도 내 거야. 준성이가 날 위해 준비한 거라고.”
남기혁의 미소를 마주한 우석진이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 마디만 더 얹었다가는 저 광기 서린 눈동자가 매서운 칼날로 변모해, 자신을 무자비하게 도륙 낼 것 같았다. 이는 다른 부하들 또한 느끼는 바였다.
입을 다문 석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남기혁이 그가 애용하는 군용 단검을 꺼내 들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서 오라는 듯, 그의 손끝에 닿은 유리문이 부드럽게 밀려 열린다.
문을 열자마자 어디선가 피 냄새가 풍겨 왔다. 그 냄새를 맡은 남기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어둑한 실내를 훑어보며 작게 웃었다.
“데리러 왔어, 준성아.”
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남기혁이 잔뜩 열에 달아오른 얼굴로 제 입술을 핥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제 손에 잡힌 강준성이 고통스럽게 울며 매달리는 모습만이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다.